“동료 보수주의자 여러분, 이제 더 성장합시다(let’s grow up). 우리가 이 정당을 되찾고자 한다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바로 그 일에 착수합시다(let’s get to work)!”이 말은 1960년 6월7일, 미국 공화당 경선에서 자타공인 보수주의자인 배리 골드워터가 ‘유사보수’ 리처드 닉슨에게 패한 뒤 연설에서 나온 ‘패자발언’이다. 러셀 커크와 윌리엄 버클리(Buckley) 등을 통해 겨우 보수주의의 정신을 되찾아 꿈틀거리던 미국 보수는, 골드워터의 이 소집명령에 따라 본격적인 보수주의 정치행동의 스타트를 끊게
건국 70여년 만에 대한민국이 거둔 위대한 성취는 인류사에 있어서도 매우 드문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좌파는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야만과 광기가 지배한 역사로 인식하고, 우리 사회의 모순·고통·갈등의 원인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탓이라고 선전해 왔다. 하지만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 가운데 제국주의 지배의 결과물들을 제대로 청산한 나라는 드물다. 오히려 우리의 경우는 미 군정청(軍政廳)이 민간인 신분의 일본인 사유재산까지 포함한 조선반도 내 모든 일본국 및 일본인의 재산을 적산(敵産) 재산으로 몰수하여 이를 관리하
COVID-19에 대한 대응 측면에서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후한 평가를 받고있고, 문재인 대통령과 여권에서 이틀 후에 있을 이번 총선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듯 해서 이에 대한 사실관계와 저의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우리나라가 코로나19에 다른 나라들, 특히 소위 ‘선진국’이라는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잘 대처하고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들을 분석해 보겠습니다.첫째, 대단한 국민성입니다. 온 국민이 앞장서서 금모이기 정신으로 IMF사태를 극복하였고, 또한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 때 많은 국민이 바닷가 현장으로 달려가서 돌 하나하나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대해서 마치 문재인 정권의 치적인양 나라 안팎으로 자랑질을 일삼으며 총선의 불쏘시개로 이용하는 것을 보니 분통이 터진다. NGO 활동을 하고 있는 은퇴한 의사로서 우리나라가 코로나19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여 외신보도에서 찬사를 받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국민에게 알리고자 한다.첫째, 동아시아 국가들의 對중국 준비태세2000년대 들어와서 중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바이러스성 호흡기질환(조류독감, 사스, 신종플루 등)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정부차원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메르스
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서울 세종대로에 위치한 KT광화문지사(支社) 앞 도로는 복수의 단체 집회 개최를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길 건너 북쪽으로 약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주한미국대사관이 위치해 있어 정치적으로 상징성이 매우 큰 곳이기 때문이다.2020년 2월22일 현재 KT광화문지사 앞 보행자도로(보도) 상에는 무려 11개 단체 명의로 정식 집회 신고가 이뤄진 상태다. 그 가운데 꾸준히 집회를 하고 있는 단체는 ‘민중민주당’이다. 이들은 주한미국대사관 남측 모퉁이 경계로부터 남쪽으로 약 2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신주 앞에 ‘북침 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제11조와 관련된 취재를 진행하는 동안 펜앤드마이크는 경찰 측의 ‘불순한 행태’를 다수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문제의 소지 원천 차단하라’는 특명이 내려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편파적인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나서서 좌파 시위를 보호해주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집회 및 시위 담당 업무를 맡고 있는 유영범 경위는 기자의 관등성명 공개 요구를 거부했고 서울 종로경찰서 집회 및 시위 담당자인 강평준 경사는 기자의
지난 2017년 6월24일, 서울 종로구 소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는 대한민국 헌정(憲政)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반미’(反美) 집회가 열렸다. 당시 이 집회에 참가한 집회측 추산 3000여명이 시위자들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기지 배치 반대를 부르짖으며, 주한미국대사관 주변을 행진 대열로 둘러싸는, ‘인간 띠잇기’ 퍼포먼스를 벌였다.한편,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1조는 “누구든지 다음 각 호(號)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청사(廳舍) 또는 저택의 경계 지점으로부터 100미터(m) 이내의 장소에서 옥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 여파로 석유·유연탄 등 에너지 및 구리·아연·니켈 등 주요 에너지와 광물 가격이 연일 하락하고 있다 특히 국제 유가가 폭락하면서 글로벌 경기 침체 공포가 커지고 있다. 지난 9일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는 전날(41.28달러) 대비 33.8% 폭락한 27.34달러까지 주저 앉았다. 이는 지난 1991년 걸프전(戰) 이래 최대 낙폭(落幅)이다.또한 국제 광물가격도 심상치 않다.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 가격이 폭락한 그날, 영국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거래되는 구리 현물가격은 톤(t)당 5482달러
스스로 안전을 관리하라는 안내 문자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진다. 쉴새 없이 울려대는 문자의 안전 알림은 확진자의 경로를 공개한다. 무섭다. 개인의 사생활과 자유는 어디로 간 것인지. 안전의 책임이 ‘개인’이어야 한다는 정치인의 발언을 들으니 허망하기까지 하다. 개인이 중요하다면서 개인의 자유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나라가 되어 간다. 소름 끼치는 개인의 사생활 억압지금과 같은 국가의 위난 상태에서 국민 개개인이 감염 확진자의 동선을 스스로 조심하고 확인하라는 배려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그렇다면 스스로의 안전을 개인이 책임지라고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
‘기생충’이 ‘남산의 부장들’을 쓸어버렸다. 지금 한국영화계에는 ‘봉준호’와 ‘기생충’만 보인다. 화제를 분출하는 화산이고,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이다. ‘기생충’이 화제의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와 계급적 적대를 시니컬하게 헤집는다. 영화적 풍자라고 넘기기에는 시선이 사납고, 묘사가 험악하다. 아카데미 수상 흥분이 가라앉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의미까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한국영화는 이념 선전과 선동의 무기로 동원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사례다. 민주화가 실현되고, 세계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103년 전인 1917년에 소련에 공산주의 붉은 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일주일 후 한반도에 박정희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그는 이 땅에 반만년동안 대물림해 온 몸서리치는 가난을 끝장내고 마침내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20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세계가 놀랄 경제도약을 이루어 내었으며, 도미노처럼 밀려오는 공산세력들의 도전과 침략을 당당히 막아내고 현재의 위대한 경제대국 대한민국건설에 성공하였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크나큰 자부심이며,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 그리고 아무도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돌이켜보건대, 남북의 정상들이 처음으로 만난 2000년 남북 정상과 6.15 공동선언은 당시로서는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역사적인 사건이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계기가 되었지만, 두 가지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퇴행시킨 사변이기도 하다. 첫째는 6.15 공동선언으로 대한민국이 ‘낮은 단계 연방제’를 수용 가능한 통일방안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북한에게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을 벌어주었다는 사실이다. 2000년 당시 남북 정상은 6.15 공동선언 제2항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
1. 문화혁명: 대중운동인가? 관제데모인가? 공식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위의 통지가 정부 각 조직에 반포되면서 시작되어 1976년 10월 4일 4인방이 전격적으로 체포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전 중국을 혼란, 폭력, 살육, 기근 속으로 몰아넣었던 극단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에 국가공인의 발발과 종결의 시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이란 권력의 부패나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인민의 자발적인 저항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