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나눔, 공동체로 점철된 생기부 들고 경쟁 배우러 나서
엉터리 교과서로 만들어진 기준이 사고의 편향 불러
갈팡질팡 입시제도 속에서는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가 괴로울 뿐

조윤희 부산 금성고 교사

우수한 학생들을 만나 그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그 아이들의 성장이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교사된 이의 큰 기쁨이자 보람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산 지역 우수학생들의 면접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물론 사교육에서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많지만 부산지역의 경우는 어떤 사교육 못지않게 특화된 논술, 면접 공교육 프로그램이 실시되어 왔다. 그 격과 품질은 이미 어느 정도 ‘시장’을 통해 검증되어 왔다고 자평한다. 물론 필자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명의 현직교사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인문, 자연계열을 아우르고 매번 평가에 관한 피드백을 반영하며 내용을 업그레이드 해오고 있다. 10년이 넘었으나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았다. 논술과 면접이라는 ‘레드오션’에서 진행되지만. 자화자찬은 이쯤에서 접고 문제를 따져보자.

● 스스로 땀 흘려 쌓은 결실도 부정하도록 가르칠건가

학생들은 제시문이 있는 심층면접과 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 등을 토대로 인성면접을 시행하게 된다. 모의면접인 셈이다.

생활기록부에 빼곡한 3년간의 공들인 치적들은 교사 입장에서 보기에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심층면접에 인용된 제시문은 이어서 언급하기로 한다). 내신이면 내신, 비교과 스펙이면 스펙! 독서활동도 어마어마하다. 저 어려운 책을 이 고등학생이 다 읽었단 말인가 연이은 감탄사가 나온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는 없는, 학교장 추천을 받은 학생만 올 수 있다는 이 ‘교육청 프로그램’ 에 참석 중이다.

한 학생에게 질문했다. 장래희망이 무엇이냐.
’CEO가 되겠다’는 학생이었다. 경영의 목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노동자의 ‘평등한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이라 한다. 재작년엔가는 기업의 목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한 학생에게 물었더니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이라 하여 필자를 기함하게 하더니 이번엔 CEO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답을 한 것이다.
기업의 목표가 무엇이고, 경영이 무엇인지 아니 경영의 목표가 무엇인지 답하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최대한 ‘정의롭고’ ‘공명정대’한 답변을 하려고 말머리를 틀었다.
다시 질문했다.

네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느라 그간 애쓴 흔적들을 보았다. 대단한 경쟁력이더라. 너의 경쟁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으나 혼자 잘하려 하지 않고 친구들과 늘 ‘함께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 경쟁이 공정했기에 당당하다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다. 우리 사회는 어느새 경쟁에서 이기려 한다는 것이 곧 비인간적이며 몰인정하고 몹쓸 인성으로 치부된다는 강박이 뇌리에 박힌듯하다.
해당 학생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면 학교에서 ‘함께’한 친구들이 모두 이곳에 오고 싶었을 수도 있었지만 ‘함께’ 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널 여기 참가시켜준 학교 선생님들께 넌 뇌물주고 뽑아달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당황해하며 아니라고 강력히 부정했다. 네가 꼭 여기에 와야 할, 아니 올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다른 학생들보다 우수하고 참석할 만한 객관적 기준과 평가 결과, 거기서 우수하게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건 맞다고 했다. 그럼 그게 바로 너의 노력의 결과고 너의 경쟁력이 아니냐고 물었다. 학생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치열하게 경쟁했기 때문에 그 경쟁 덕에 공정한 기준이 작동할 수 있었고 그래서 네가 여기 온 것이라고 피드백 시간에 말해 주었다. 네가 얼굴이 예쁘거나 마음이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여기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네가 실력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라고 말하자 수긍했다. 경쟁이란 말엔 불편해 하면서 ‘너의 실력’ 이란 표현엔 거부감 없는 인정. 아이들은 분명 ‘경쟁이 좋은 것’, ‘치열한 경쟁이 공정한 것’이라고 배운 적이 없는듯했다.

사실 많은 교사들이 경쟁은 인성을 파괴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학생들의 뇌리 속에 ‘경쟁력이 있다’는 말은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것으로 동치 되도록 세뇌된 것이다. 경쟁은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며, 경쟁에서 선택되는 것이 바로 땀과 노력을 인정받는 순간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고, 남보다 잠을 줄이고 노는 시간마저 아껴가며 자신의 실력을 쌓은 아이들일수록 ‘네가 경쟁에서 이겼다’는 말에 죄책감마저 느끼는 듯한 모양이니 이 땅의 교육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학교생활을 정성이든 정량으로 평가한 뒤 수시로 학생을 선발하라고 한다. 모순도 이런 모순은 없는 듯하다.

● 교과서에서 발췌한 ‘정경유착’, ‘장기집권’, ‘독재집권 정당화’

출처는 한국사 교과서였다.

그림  고교 한국사 교과서 일부 내용에서 발췌
그림 1 고교 한국사 교과서 일부 내용에서 발췌

해당 모의 면접 문제는 이외의 다른 제시문들을 근거로 하여, ‘원조를 단순 호의로 볼 것인지 인도적 차원의 의무로 볼 것인지 관점을 선택하고 ㉡을 평가하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약 80%가 원조를 ‘의무’로 인지했다. 이제는 우리가 남의 나라를 도울 정도의 수준이 되었음에도 늘 스스로를 약자로 대입하여 도와주지 않는 상대는 악당이고 고약한 갑이라고 여기고 싶어했다. 1950년대야 우리가 가난하고 힘에 겨웠던 약자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도 남을 도와 줄 형편인 나라가 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강대국이라 해서 무조건 우리를 도와야할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상대를 돕는 것도 ‘내 배가 부른 다음’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본문에 제시된 밑줄 부분에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다른 나라의 원조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제 불황을 미국 원조의 중단 탓으로 몰아가는 서술은 뭐며, 미국의 지원이 우리나라 경제의 ‘정경 유착’의 원인이라고 기술하는 것은 또 뭣이란 말인가. 그러한 서술 탓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사고방식은 막무가내였다. 우리 경제가 불황에 빠진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게 만드는 잘못된 교육을 철석같이 믿고 와서 아이들을 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심을 넘어 걱정이 앞섰다. 질문을 이어갔다.

예를 들겠다. 지금 우리나라가 원조를 하던 나라가 있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나라가 청년실업에 경기불황까지 겹쳐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하게 상황이 악화되어 원조를 끊으려한다. 그러자 원조 받던 나라가 강하게 반발하고 국제적으로 비난하고 나서면 넌 어떨 것 같으냐. 그래도 그것이 우리 정부의 잘못이냐?너희 집이 지금 곤경에 빠져 대출을 받고 돈을 빌려야 할 지경이 되었어도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빚을 내는 것은 옳은 선택일까?그건 아닌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1950년대 그 당시 우리는 미국과 대등하게 ‘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 원조를 받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 원조를 반드시 지켜야할 의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구나 국제 사회에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 설명에 아이들은 어느 정도 납득을 하는듯했다. 물론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반대 측 설명을 한 학생도 있었다. 그렇지만 ‘의도적으로’ 기술된 교과서의 내용은 학생들에게 반미감정을 심어주고 호의를 권리로 인식하기 좋도록 기술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해설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과서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므로. 미국의 원조가 정경유착을 유발(교과서 기술 내용)하였고, 그것이 이승만의 독재집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덧붙이고 있으니까.
이런 식의 오도된 설명이 수험생이 입시를 준비하는 자료로서 기준이 되고 있고, 교과지식의 기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교과서야 어쩔 수없이 잘못되었으니 교사라도 바로알자라고 말하기엔 참으로 총체적 난국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 ‘상대적 우위’ 확인의 수시로 ‘평등’을 가르치려는 모순을 벗어나야

현장에는 출렁이는 입시제도가 그대로 반영된다. 사교육 잡자고 정시에서 수시로 치켜들었던 카드가 교육정책을 책임져야할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고 학부모의 반대에도 부딪히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수시는 차라리 정시가 낫다는 요구 앞에 갈팡질팡 이다. 이번에도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급기야 정시냐, ‘학종 중심’의 수시냐를 두고 격돌 중이다. 애초 ‘사교육을 절감하고 공교육을 정상화 시킬 수 있는 수시’나 ‘입학사정관 제도’의 확대에 대해 현장교사들이 그리 반기지 만은 않았었다. 하지만 ‘공교육 정상화’라는 아름다운 명분이 주어졌으니, 학부모들의 지지 속에 수시가 계속 확장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부풀려 질대로 부풀려 지는 학교생활기록부는 교사들에게 고민거리이고 대학은 대학대로 그 신뢰성에 문제제기를 한지 오래다. 그런데도 수시를 계속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우려중인 것이다.

그림2  한국사 일부를 발췌하여 제시한 부분의 해설서 일부.
그림2 한국사 일부를 발췌하여 제시한 부분의 해설서 일부.

그러나 어떻든 입시정책의 근간이 아직은 수시이고 그 수시의 잣대는 학생기록부이므로 그 학생기록부엔 상대평가로 인한 서열이 존재하고 우열이 표기된다. 잘 한 아이, 더 잘한 아이 그리고 잘못한 아이가 평가에 의해 서열화 되어있는 것이다. 공정한 선의의 경쟁으로 평가했고, 결과에 대해 신뢰를 보내기로 합의한 제도이다.

그런데 그 서열화 된 평가를 가지고 평등을 가르치려 든다면?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어 평등만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학생기록부의 그 평가결과들은 부조리와 비리의 결과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공정한 경쟁의 결과조차 평등 앞에 무력해진다면 공교육의 정상화를 부르짖는 교육당국은 자기부정도 그런 자기부정이 없음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敎育百年之大計란 말이 무색하게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출렁거렸다. 교육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국가의 장래설계에 집중했다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정권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매번 지향점이 달라졌으니 100년은커녕 20년도 버티기 어려운 것이다. 표를 의식하고 인기몰이에 나선 사람들이 심심하면 꺼내든 카드가 무상급식과 ‘사교육 걱정 안 하는 세상’이었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공포, 사교육으로 돈이 쏟아져 들어갈 것이라는 걱정 탓이었다.

사실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는 사교육 시장과 공교육은 대체제가 아닌 보완재일수 있었음에도 우리 교육당국은 대립각만 세워왔다. 게다가 입버릇처럼 정상화를 부르짖는 공교육은 사교육을 능가할 좋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공문처리나 하는 권력의 ‘卒’로 그 자원을 사용해 왔으니 경쟁력은 차츰 후퇴한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공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진짜 비법은 덮어둔 채 미봉책만으로 일관해 왔으니 공교육은 후퇴요, 입시정책은 사교육 잡기에만 온통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역발상이 필요하다. 공교육은 경쟁을 시켜 진입 진출을 수월하게 하고, 사교육은 공교육의 보완재로 공교육의 서브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면 공교육도 사교육도 이렇게 표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입시의 최전선에서 우수한 입시생을 지도하고 드는 생각은 올해도 또 제자리걸음이구나 싶은 한탄뿐이었다.

조윤희(부산 금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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