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언론 통폐합은 일본의 2차 대전 중 언론 통폐합 사례를 토대로 작성"
"언론사가 우후죽순격으로 난립, 사이비 기자가 판을 치는 당시 상황에서 일부 언론사 종사자들은 사회적 기생충이나 마찬가지. 때문에 언론 통폐합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당시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던 허문도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의 검찰 진술조서다.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는 각각 임시총회를 열고 전국 신문·방송·통신사의 통폐합을 내용으로 하는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것이 이른바 보안사가 주도한 ‘K-공작’이라 명명된 신군부의 배후조종에 의해 단행된 언론 통폐합이다. 언론 통폐합 조치로 인해 중앙지는 7개지에서 6개로 줄었고, 경제지도 2개지로 정리되었으며 지방지는 1도 1지 원칙 하에 14개가 10개지로 줄었다. 통신사는 동양통신·합동통신이 통합되어 연합통신이 출범했다. 방송도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의 2대 방송망을 중심으로 하는 공영방송 전일체제로 재편성되었다. 동양방송(TBC)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KBS가 흡수 KBS 제2텔레비전전과 KBS 제3방송으로, TBC FM은 KBS 제2FM으로 개편되었다. 정부비판에 앞장섰던 동아방송(DBS)은 KBS가 인수하여 KBS 제4방송, 라디오 서울로 개칭되었다. 허문도씨는 검찰에서 "당시의 언론 통폐합은 일본이 2차 대전 중 통신사를 통폐합한 역사적 사실을 참고로 했다."면서 "소신을 가지고 언론 통폐합을 주장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이 세 차례나 거부했다."고 말했다. 또 언론사 사주들이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로비를 하는 바람에 보안사 실무자들은 언론 통폐합을 강력 추진했으나 노태우 사령관은 반대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제5공화국에서 언론통폐합의 주역이었던 허문도 씨. 그는 검찰에서 ""언론사 난립으로 사원들에게 월급도 못주는 경영주가 있었고, 또 그런 관계로 사이비 기자가 넘치는 상황에서 그런 언론사나 종사원은 사회적으로 기생충이나 마찬가지여서 언론통폐합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제5공화국에서 언론통폐합의 주역이었던 허문도 씨. 그는 검찰에서 ""언론사 난립으로 사원들에게 월급도 못주는 경영주가 있었고, 또 그런 관계로 사이비 기자가 넘치는 상황에서 그런 언론사나 종사원은 사회적으로 기생충이나 마찬가지여서 언론통폐합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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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도 검찰 진술조서 1996년 1월11일 서울지방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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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의협심 강한 사람

 

-전두환 보안사령관과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요.

"1980년 1월 말 문공부에서 열린 해외주재 공관 공보관 회의에 참석차 귀국했다가 저녁에 저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진영, 허삼수 등을 만나 일본 방위청과 언론계에 돌고 있는 북한 동향이 심상찮다는 등의 정보와 일본 사정을 얘기해 주자 허삼수와 김진영이 '우리가 소개해 줄 테니 직접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 지금 말한 내용을 보고해 달라'고 부탁하여 그들의 제의를 승낙했습니다.

먼저 허화평 비서실장을 만나라고 하여 그 무렵 허삼수의 소개로 허화평 비서실장을 만나 전두환 보안사령관 면담 일정을 잡았습니다. 1980년 2월 초순 17시경 보안사령관실로 찾아가 약 1시간 동안 일본 국내 정세, 북한 동향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처음으로 전두환 장군을 만났습니다. 아주 의협심이 강하고 강직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눈 대화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이 있는가요.

"전두환 사령관은 박 대통령 살아계실 때 정․관계 등에 있으면서 온갖 아첨이나 나쁜 짓을 다했던 사람들이 박 대통령 죽자마자 민주 투사로 둔갑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데 앞장서는 등 한심하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일본의 경우 19세기 중엽 명치유신이 일어나 도쿠가와 막부가 멸망했으나 봉건영주들은 항복하지 않고 일본 동북지방으로 쫓겨가면서 모두 순사했다.

1백년이 지난 후에도 이를 미담으로 여기며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는 등 정치적 군장에 대한 평균적 의리의 수준이 한일 양국민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정치적 수준이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더라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너무 한심하다는 데에 전두환 사령관이 전적으로 공감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중정 비서실장으로 발탁

 

-그 자리에서 보안사령부에 와서 일해달라거나, 아니면 일본 국내 정보를 제공해달라는 등 어떤 협조를 부탁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제가 일본 자위대 및 방위청과 언론계에 돌고 있는 북한 동향이 심상찮다는 등의 정보와 당시 일본 사정 등을 설명해 드리자 전두환 사령관이 '잘 들었다'고 했을 뿐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진술인은 1980년 4월20일 당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사실이 있는데 그 경위는 어떤가요.

"1979년 10월26일 박 대통령이 서거한 후, 당시 분위기에서는 박 대통령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던 사람들도 그 관계가 언론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주일 대사관 공보관으로 근무하면서 일본 언론이나 잡지들이 박 대통령에 관한 기사를 쓰는데 자료 협조 등을 하면 본국에 자료 요청도 하고, 또 관련 인물을 인터뷰하는 것을 적극 주선해 주는 등 일본 언론이 박 대통령의 치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데 협조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보고받은 전두환 장군이 저를 심상치 않게 본 모양입니다. 1980년 4월16일~17일경 보안사령관 비서실에서 '전두환 장군이 의논할 일이 있으니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일시귀국 형식으로 귀국하여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가자 全장군이 저한테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하여 그때부터 일하게 됐습니다."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의 임무는 무엇인가요.

"주요 임무는 중앙정보부에 올라오는 정보보고를 읽고 상황을 판단하여 중요한 상황만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진술인은 사전에 5월17일 24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선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5월17일 18시경 남산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에 있었는데 누군가가 '이화여대에 모여 있는 전국 각 대학 학생회장들을 검거하러 갔는데 경찰에서 알려주어 대부분 도망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 무렵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선포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시위가 발생한 이후 중앙정보부 광주지부에서 올라오는 정보보고는 수시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되었는가요.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그때그때 수시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주사태가 발생한 1980년 5월18일부터 5월27일까지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주로 어디서 근무했는가요.

"그 기간 동안에는 중앙정보부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이 진행되었으므로 거의 매일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장실에 나오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진술인은 1980년 5월31일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임명됐는데 임명된 경위는 어떤가요.

"1980년 5월30일경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부터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임명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정확한 임명 경위는 모릅니다. 제가 신문기자로 근무한 사실이 참작된 것 같고, 또 당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비서실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론인 해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문공분과위원회 구성은 어떤가요.

"위원장으로 오자복(현역 중장), 위원들은 염길정, 허만일(문공부 보도담당관), 김행자(이화여대 교수), 정태수(문교부 국장), 김상준(현역 대령) 등이 있었습니다."

-진술인이 허만일, 염길정을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허화평 비서실장에게 추천한 사실이 있는가요.

"허화평 비서실장이 좋은 사람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여 제가 허만일과 염길정을 추천하여 그들이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사실입니다."

-진술인은 문공분과위원으로서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했나요.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가 문교 파트와 문공 파트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저와 염길정, 허만일 등은 문공 파트를 맡아 주로 사회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언론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어떻게 개혁해야 될 것인지 등에 관한 계획을 논의하고 수립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습니다."

-1980년 6월 국보위 문공위에서는 '국가홍보기본계획'이라는 문서를 작성한 사실이 있는데 진술인도 이에 관여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와 같은 문서작성에 관여한 기억은 없으나 당시 문공위에서 언론문제, 즉 새로운 상황에서 언론의 기본방향은 어떠해야 한다든지 하는 논의는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와 문공부와는 어떤 관계였나요.

"국보위 문공위라는 것이 문공위원들만 있고 그외 여러 가지 행정적인 손발이 없으니 문공위원회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해당부서인 문공부에 요구하여 정책 방향 등을 입안했습니다. 서로 협조 관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보위 문공위에서 결정하는 것을 문공부에서 집행했는가요.

"문공위에서 정책방향 등을 수립하려면 아무런 자료가 없으니까 문공부에 자료를 요청하여 참조하는 것 뿐이지 상위개념, 하위개념으로 볼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시 보안사에 결정, 집행하는 일을 대외적으로 모양을 갖추기 위해 국보위 각 분과위원회 명의를 빌려 발표한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본 언론계 자체정화계획이라는 것도 제가 본 기어이 없는데도 국보위 문공위의 명의로 나온 것으로 보아 보안사 정보처에서 문공위 명의만 빌린 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술인이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있을 당시 언론인 숙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요.

"제가 문공위원으로 있을 당시 언론인 숙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국보위 문공위는 언론이 해직과는 관계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국보위 사회정화위원회에서 보안사를 손발로 하여 사회 각 분야 정화 차원에서 언론인뿐만 아니라 공무원 해직 등을 주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국보위 사회정화위원회에는 어떠한 사람이 일하고 있었는가요.

"김만기씨가 사회정화위원장으로 있었으며, 위원 중에는 허삼수 등 여러 명이 있었는데 각 종 사회분야의 정화를 총괄했습니다. 언론인 해직도 정화 차원에서 사회정화위원회 주관으로 시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론인 강제해직은 보안사 작품

 

-1980년 7월8일경 보안사 정보처에서 해직대상 언론인을 선정, 문공부를 통해 언론기관에 통보하여 8월16일 현재 9백33명의 언론인을 자율정화 형식으로 강제 해직시킨 사실은 알고 있는가요.

"예"

-그 당시 보안사에서는 1백여 명의 해직대상 언론인 명단만을 문공부에 보냈는데 문공부나 해당 언론사에서 임의로 해직 대상자를 추가하여 강제 사직시키는 바람에 해직인원이 9백33명이나 되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 당시 각 언론사에서 임의로 해직 대상자를 추가하여 강제 사직시키는 바람에 해직 인원이 상당히 늘어났다는 얘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당시 보안사에서 문공부에 통보한 해직 대상자가 1백여 명이라는 얘기는 믿기 어렵습니다. 1980년 8월16일자 문화공보부에서 작성한 언론인 정화결과 보고서를 보니 이수정 공보국장의 글씨가 맞는데, 그 보고서에 기재된 정화 대상자 3백36명이 보안사에서 문공부에 넘겨진 해직 대상자 합계가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언론이 해직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여러 자료에 의하면 1980년 7~8월 언론인 해직은 국보위의 기본지침에 따라 보안사에서 관계기관으로부터 자료를 수집하여 해직 언론인 명단을 작성하고, 문공부로 하여금 자율정화 결의대회를 함과 동시에 각 언론사에 해직 대상자 명단을 통보하거나 직접 언론사에 통보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 뿐만 아니라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도 언론인 해직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사회정화위원회에서 사회정화 차원에서 그런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론통폐합 수차 건의했으나 거부 당해

 

-당시 국보위 백서에도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의 주요한 국정개혁 실적으로 언론계 자율정화를 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실제 언론인 숙정은 보안사나 사회정화위원회에서 하고 명의만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 이름을 빌렸다고 생각합니다."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에서 위원들과 언론문제에 대해서 논의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당시 저는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에 이름만 걸어놓고 잘 나가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간혹 나가면 문공위원들과 사회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언론이 어떤 역할을 담당할 것인지 등을 논의한 사실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언론 통폐합에 대해서 1980년 6월경 오자복 문공분과위원장에게 논의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한 뒤 저는 문공분과위원회에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겠구나 생각하여 더 이상 관심도 없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언론 통폐합에 대해 건의한 사실이 있는가요.

"1980년 6월경 언론 통폐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오자복 문공분과위원장과 함께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보고했다가 1차로 거절된 후 1980년 7월경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한 번 더 구두 보고했다가 거절된 사실이 있습니다."

-1980년 6월경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이 이상재에게, 이상재는 김기철에게 자료를 건네주면서 언론 통폐합 방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해 1980년 7월 중순 '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을 마련, 9월13일경 권정달이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1980년 10월 중순 보안사 정보처에서 '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을 마련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한 사실은 알고 있으나 9월13일 보고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보위 문공분과위의 지시로 문공부에서 1980년 7월14일 사회 역기능 간행물 정화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에 따라 1980년 7월31일 1백72종의 정기간행물에 대해 등록취소 조치를 단행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있을 당시 누구의 지시나 안이라기보다는 문공분과위원들 사이에서 유명무실한 간행물이 너무 많으니 정리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말이 나와 그와 같은 계획을 수립, 문공부로 하여금 시행토록 한 것은 사실입니다."

-위 계획에는 일간신문, 통신, 방송 등은 별도계획에 의하고 우선 1차적으로 정기간행물에 대해 조치한 것으로 나오는데 어떤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나 당시 정기간행물로 등록만 하고 몇 달씩 간행하지 않은 출판물이 많이 있었고 그런 간행물을 정리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추가로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이비 언론은 사회의 기생충

 

-언론이 해직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언론 통폐합의 사전 정지작업인데도 진술인이 언론 통폐합에만 관여하고 언론인 해직에는 관여치 않았다는 말은 모순 아닌가요.

"당시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으로 있던 제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보안사의 핵심 실세들 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언론 통폐합 구상은 언제 최초로 했는가요.

"1980년 5월 말경 제가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들어가서부터 언론 통폐합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통폐합안을 작성하기 훨씬 전인 기자 생활을 할 당시부터 사이비, 공갈 기자 등이 활개치는 것을 보고 이 상태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할 당시도 언론의 폐해 등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할 기회가 있었으나 여건상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이 되면서 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일본 체류 중 우리나라 언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언론사 난립으로 사원들에게 월급도 못주는 경영주가 있었고, 또 그런 관계로 사이비 기자가 넘치는 상황에서는 그런 언론사나 종사원은 사회적으로 기생충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진술인이 공부한 일본의 언론 통폐합 사례는 어떠했나요.

"제가 책을 보던 중 일본도 2차 세계대전 중 통신사 등을 통폐합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신문사는 전국지는 3개(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지방지는 1도 1사 원칙이고, 통신사는 1개로 통폐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진술인이 입안하여 추진한 언론 통폐합안을 보면 지방지가 1도 1사 원칙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일본 사례를 참조한 것은 아닌가요.

"제가 일본에서 생활을 하여 일본의 중앙지가 3개밖에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점을 참작했으나, 일본에서도 2차 세계대전 중에 통신사 등을 통폐합한 사실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진술인이 언론 통폐합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기본구상은 어떤 내용인가요.

"언론과 재벌의 분리, 방송 공영화, 사이비 기자가 발붙일 수 있는 토양을 없애는 조치 등을 기본구상으로 했습니다. 처음 입안할 때는 구체적인 조치 등은 세우지 않고 기본정책 방향만 세웠습니다."

-기초자료는 어떻게 수집했는가요.

"평소부터 제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고, 당시는 계획 입안단계로서 구체적인 조치는 정책 결정이 되고 난 후의 문제였기 때문에 제가 하는 공부 외에 따로 수집하는 자료는 없었습니다."

-여론, 의견 수렴 과정은 어떠했나요.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있을 당시는 다른 사람들과 의견교환을 한 사실은 없었고 개인적인 소신으로 언론 통폐합을 연구하는 정도였습니다. 문공분과위원들 사이에서 언론을 이대로 두어도 될 것인가, 언론도 개혁해야 될 것이 아닌가 등의 말만 있었지 따로 여론을 수집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들어간 뒤에는 같은 비서관실에 있던 이수정, 민정비서관실에 있던 최재호, 이광표 문공부장관 등과 어떤 식으로 언론 통폐합을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교환도 하고 했습니다."

 

전두환의 반대

 

-언론 통폐합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은 얼마나 관여했나요.

"권정달과는 직접 의견교환을 한 사실이 없고 1980년 9월1일 청와대로 들어간 후에는 비서관으로서 언론 통폐합의 의미나 성격 등에 관해 허화평, 허삼수와 얘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허화평이나 허삼수가 의견을 제시하거나 한 사실은 없고 제가 주도적으로 언론 통폐합의 필요성 등을 말하는 처지였습니다."

-언론 통폐합 방안을 수립하여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 오자복 위원장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보고한 경위는 어떤가요.

"당시 제가 마분지 같은 보고용지에 언론 통폐합의 정책방향을 써서 오자복 위원장에게 보고한 후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오자복 위원장에게 보고한 것은 1980년 6월경으로 기억되고 약 2~3일 후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도 보고했으나 반대했습니다."

-보고 당시 그 장소에는 누구누구가 있었나요.

"오자복 위원장에게는 단둘이 있을 때 보고했고,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보고할 때는 오자복 위원장과 둘이서 국보위 상임위원장실에서 보고했습니다."

-당시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언론에 대해 자극만 주고 정책효과는 적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반대했던 것 같습니다."

-진술인이 언론 통폐합 방안을 수립하여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그 방안을 보고하고 설득한 사실이 있다는데 그 경위는 어떤가요.

"제가 평소부터 소신으로 가지고 있던 언론 통폐합이라는 정책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취지 등을 잘 이해 못하는 것 같아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던 사람들에게 제가 가지고 있던 정책방향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식으로 한 사실이 있습니다. 누구누구에게 설명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호용 사령관 외 다른 몇 사람에게도 양해를 구하려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정호용에게 설명한 내용이 TBC방송을 삼성으로부터 분리하고, 신아일보 폐간 등 중앙지를 정리하고, 지방사는 1도 1사 원칙으로 통폐합하는 등의 내용이라는데 어떤가요.

"사실과 다릅니다. 그때는 통폐합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고 대강의 정책방향만 제시한 것 뿐이기 때문에 어느 방송사를 어디로 통합한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창조적 민족주의

 

-진술인은 1980년 6월경 발표된 '창조적 민족주의'라는 저서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

"책이 아니고 약 20~3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팸플릿 형태로 된 것입니다. 기본구상이나 플롯은 제가 말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친구였던 당시 국민대 교수 김영작에게 만들게 하여 제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준 것입니다. 제가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 즉 한국의 민족주의는 저항적 체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창조적이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체질의 민족주의로 전환해야 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진술인은 언론 통폐합안이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에게 통폐합안의 취지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고 했는데, 당시 만난 사람들은 누구누구인가요.

"특별히 대상을 찍어서 만난 것은 아니고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안의 효율성을 설명한 것입니다."

-1980년 7월15일 보안사에서 전두환, 노태우, 정도영, 권정달, 허삼수, 허화평, 이종찬, 진술인 등이 참석하여 개헌안의 골격을 논의한 사실이 있다는데 어떤가요.

"저는 그런 기억이 없고,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당시 군부의 핵심실세 외에는 그런 곳에 끼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제 감으로는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정확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진술인은 1980년 9월1일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임명된 사실이 있고 약 보름 후에는 다시 정무비서관으로 이동한 사실이 있지요.

"예, 임명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으로 들어가니까 비서실장으로 있던 저를 비서관으로 같이 데려간 것 같습니다. 약 보름 후에 제 업무가 공보비서관보다는 정무비서관에 합당할 것이라 판단했는지 정무1비서관으로 옮겨 정치기획 및 체제홍보를 담당했습니다."

 

언론사 사주들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로비

 

-1980년 10월 중순경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을 보고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예"

-그 경위를 자세히 진술하시오.

"앞서 말한 것처럼 제가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있을 때인 1980년 6월~7월경 2회에 걸쳐 전두환 대통령에게 언론 통폐합안을 결재받기 위해 보고했으나 거절되어 사실상 언론 통폐합 추진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7월~8월경 보안사 정보처에서도 저와 별도로 언론 통폐합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1980년 9월경 허화평 비서관이 '지금 보안사에서도 언론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가 그동안 언론 통폐합을 추진했으나 일이 잘 안되고 있으니 네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보안사에 넘겨주어 그 곳에서 언론 통폐합 방안을 마련하여 결재받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언론 통폐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최재호 비서관을 통해 보안사 정보처에 보내준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보안사 정보처에서 '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이 10월 중순경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을 데리고 대통령 결재를 받기 위해 청와대로 올라왔습니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전두환 대통령, 이광표 문공부장관, 김경원 비서실장, 이웅희 공보수석, 허화평 정무수석비서관,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 노태우 보안사령관, 권정달 정보처장이 2~3페이지 보고했을 무렵 전두환 대통령이 보고를 중단시킨 다음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김경원 비서실장, 이웅희 공보수석이 반대 취지의 발언을 하고, 노태우 보안사령관까지 반대 발언을 하므로 대통령께서 결론을 보류하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언론 통폐합이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진술인은 왜 찬성 발언을 하지 않았는가요.

"미처 제가 찬성발언을 하기 전에 전두환 대통령께서 결론을 보류하기로 결정하시는 바람에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제가 그토록 열심히 추진했던 언론 통폐합이 또 한번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태우 보안사령관은 자신이 언론 통폐합 방안에 대한 결재를 올렸으면서 무슨 이유로 대통령 앞에서 반대취지의 발언을 했는가요.

"제 생각에 이미 그 시점에서는 언론 통폐합 소문이 상당히 나 있었으므로 관련 회사에서 노태우 보안사령관을 상대로 언론 통폐합을 하지 말아달라고 상당한 로비를 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노태우 보안사령관은 언론 통폐합 추진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허화평 보좌관이 보안사 정보처에 강력히 언론 통폐합을 추진할 것을 지시하여 마지못해 결재서류를 올린 다음 정작 대통령이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언론 통폐합에 대한 의견을 묻자 반대 발언을 한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언론 통폐합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 사람들이 확고한 의지도 없이 성의없이 보고했다가 결재가 보류되는 바람에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고 느꼈습니다."

 

중국 음식점에서 언론사 통폐합안 작성

 

-그때부터 언론 통폐합 추진을 포기했는가요.

"언론 통폐합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저의 소신이었으므로 그 무렵부터는 일절 보안사에 알리지 않고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최재호 비서관 등에게 언론 통폐합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저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 이학봉 민정수석 비서관이 1980년 11월11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해제 후의 정국 운영방안에 대해 보고하면서, 해제 후 대책의 일환으로 언론 통폐합이 필요하다고 보고하여 대통령으로부터 언론사 통폐합에 대해 결심을 받았으니 결재안을 만들어 올리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이수정 비서관, 이광표 문공부장관, 최재호 비서관, 필경사 1명을 데리고 서울 강남에 있는 함지박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3~4시간만에 대통령 보고서류를 완성했습니다. 그 다음날인 11월12일 오전 중 이광표 장관이 이 보고서를 가지고 대통령 결재를 받아 보안사령관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날 오후 보안사에서 언론사 사주들을 불러 각서를 받아 집행하게 된 것입니다."

-11월12일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결재받은 언론 통폐합안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 작성한 보고서 제목은 '언론창달계획'이며 그 내용은 언론과 재벌의 분리, 방송 공영화 등을 기본 원칙으로 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신아일보를 경향신문으로 통합하고 경제지는 한국경제, 매일경제 두 신문으로 통합하고, 통신사도 연합통신으로 통합한다는 내용 등이었습니다. 지방사는 1도 1사로 한다는 원칙만 세우고 세부 계획은 보안사에서 계획을 세워 집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방사에 대해 1도 1사 원칙만 기재하고 구체적으로 어느 신문사를 어느 신문사에 통폐합한다는 내용을 기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느 신문사를 어느 신문사에 통폐합한다고 보고서에 명시하면 보안이 누설될 우려가 있는 데다 당시 저는 구체적으로 어느 신문사를 어느 신문사에 통폐합한다고 판단할 만한 자료를 갖고 있지도 못했으므로 지방사에 대해 1도 1사 원칙만 기재했던 것입니다."

-결재안의 집행은 누가 했는가요.

"결재안에는 집행기관이 어디라는 내용은 없었는데 문공부장관이 결재한 후 결재안 사본을 바로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제 생각에는 대통령이 결재할 때 보안사가 집행하도록 지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초안을 작성하여 대통령의 결재를 받기 전후하여 이상재나 허만일 문공부 공보국장에게 집행준비를 지시한 사실이 있나요.

"저는 그런 지시를 한 사실이 없습니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결재시 이미 집행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보안사에 있다가 청와대로 온 허화평, 이학봉 등은 보안사를 손발처럼 부릴 위치에 있었으니까 결재 전에 미리 보안사에 연락하여 준비하도록 지시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집행은 어떤 방법으로 했는가요.

"자세한 내용을 몰랐고 사후에 보안사에서 언론사 사주 등을 불러 포기각서를 받아 집행했다고 들었습니다."

 

언론 통폐합안 결정되자 노태우, 벌컥 화를 내다

 

-11월12일 진술인이 언론 통폐합에 관해 대통령의 결재를 받기 전에 보안사에서 이미 집행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진술인과 권정달, 이상재 사이에는 결재 전에 미리 대통령의 재가가 나면 그 내용대로 집행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지방지 통폐합에 대해서는 1980년 10월 중순경 당시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보고한 '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에 기재되어 있는대로 집행한다는 점에 대해 인식을 함께 하고 잇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권정달이나 이상재에게 별도로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작성한 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대로 집행하라'고 지시한 사실은 없습니다."

-큰 회사가 작은 회사에 흡수된 경우도 있었다는데 지방사 통폐합의 기준은 무엇이었는가요.

"제 기억에는 큰 회사가 작은 회사에 흡수된 사례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1월12일 이광표 문공부장관이 결재서류를 건네줄 때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무척 화를 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보안이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대통령 결재를 받아 이광표 문공부장관을 통해 집행을 의뢰하는 바람에 자신의 개인적 입장을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해 화를 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10월 중순경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권정달 정보처장을 대동하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언론 통폐합에 대해 보고할 때 노태우 보안사령관의 소극적인 태도로 보아 언론사 관련 재벌 등이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로비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요직에 있으면서 기습당하듯 알게 되니까 화를 낸 것으로 보입니다."

-위 계획에 따라 언론 통폐합을 실시한 결과 지방지를 1도 1사 원칙에 따라 10개로 통합하고, 公․민영 방송구조를 공영방송 체제로 개편하는 등 64개 언론매체를 신문 14, 방송 3, 통신 1개로 통폐합했는데 사실인가요.

"예"

-언론사 자율결의 형식으로 통폐합한다는 발상은 누구 아이디어였나요.

"제 생각으로는 문공부의 누군가가 관료적인 발상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1980년 11월12일 언론기본법이 제정된 사실이 있는데, 여기에서 진술인이 관여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그 무렵 저와 같이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재직하던 이수정이 언론관계 통합법을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하여 저는 묵인하는 정도였고 이수정이 주도적으로 계획을 수립하여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난세론

 

-진술인이 주도적으로 계획을 수립한 것 아닌가요.

"이수정씨가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근무하게 된 것도 제가 대통령과 허화평씨에게 추천하여 된 것입니다. 그 무렵 이수정씨가 언론관계 통괄법을 제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여 추진해보라고 했을 뿐입니다. 언론 통폐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으므로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으나 법률문제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언론을 법으로 어떻게 규제한다는 발상 자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언론기본법 제정은 5․17 직후 이루어진 7~8월의 언론인 해직, 11월의 언론 통폐합 등으로 인해 재편된 언론계 질서를 법제화한 것으로 당시 신군부의 언론장악 마무리 수순으로 보이는데요.

"언론기본법 제정은 어떤 정치적 구상에 의해 마무리 수순으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청와대나 행정부에 있던 관료들의 행정적인 필요성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 11월18일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진술인과 이수정, 문공부 기획관리실장 김동호, 공보국장 허만일, 박용상 판사 등 5명이 모여 실무대책위원회를 발족하여 언론기본법안을 마련했다는데요.

"통폐합이 있고 난 후 이수정 비서관이 언론관계를 총괄하는 법 제정의 필요성을 얘기한 사실이 있었으며, 언론기본법은 이수정 비서관과 박용상 판사가 전반적인 계획을 수립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1980년 당시 언론 문제는 전두환­진술인­이상재로 연결되는 라인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입안되고 추진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제가 언론 통폐합안을 수립하여 추진한 것은 사실이나 그 문제는 단선적인 라인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고 여러 라인을 통해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 대통령은 언론을 잘 몰랐고, 이상재가 내 지시를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술인은 처음부터 언론 통폐합에 관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난세적 상황에서는 자유주의적 수단으로 자유를 지킬 수 없다는 '난세론'을 역설한 사실이 있지요.

"제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법 논리보다는 정치적 논리로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언론 통폐합안이 국민적 공감을 얻은 사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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