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7일 저녁, 주영복 국방·이희성 계엄사령관 신 총리 찾아와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보위(國保委) 설치 요구. 신현확 총리, “무슨 소리 하느냐. 국회 해산, 그리고 정부가 있는데 또 무슨 정부 같은 국보위, 이게 뭐냐. 이거 혁명 아니냐. 혁명을 결재 받아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혁명은 총칼로 하는 거지” 하며 반대

[편집자 주] 이 내용은 지난 2007년 4월 작고한 고(故) 신현확 국무총리의 육성증언 녹음테이프 내용이다. 신현확 총리는 1979년 10.26 당시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1980년 5월까지는 국무총리로 재직하며 10.26과 12.12, 5.17과 5.18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광풍과도 같았던 격류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 와중에 신현확 총리는 대통령 시해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아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치러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이 정부에서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를 실시하며,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한다. 그 직후 유신헌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퇴임한다”는 시나리오를 확정했다.
이 와중에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와 결탁하여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통해 실권은 신군부에게 넘겨주고 자신이 명목상의 대통령을 맡겠다고 나섰다.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씨들은 혹시라도 신현확이 대권을 차지하려는 것 아닌가 착각하여 자신들의 집권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신현확 총리가 이끄는 과도정부를 공격했고, 학생들을 선동하여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급기야 1980년 5월 17일 저녁, 최규하는 결국 신군부가 요청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해산 ▲주요 정치인 체포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신현확 내각은 총사퇴했다. 최규하는 신군부 집권의 고속도로를 닦아준 것이다.
신현확 총리는 ‘현대사의 정리’ 차원에서 “나 죽거든 회고록을 출간하라”면서 구술증언을 남겼고, 기자는 이 구술증언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입수하여 월간조선(1999년 2월호)에 공개한 바 있다. 최근 들어 전두환의 5공 창출 및 광주사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어, 역사의 증언을 위한 차원에서 신현확의 육성증언을 다시 공개한다. 관련 내용은 신현확 총리가 남긴 구술증언을 녹취하였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간중간에 기자가 박스기사 형식으로 해설을 붙였다. 분량이 길어 상중하 세 차례로 나눠 공개한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전두환 장군의 중정부장 겸직 반대 등 신군부의 등장을 막다가 최규하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야인이 된 신현확 전 국무총리.(연합뉴스 제공)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전두환 장군의 중정부장 겸직 반대 등 신군부의 등장을 막다가 최규하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야인이 된 신현확 전 국무총리.(연합뉴스 제공)
(기자 해설-신 총리의 측근은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장군을 중정부장 겸임발령을 낸 날 신 총리는 최 대통령과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대통령은 어떤 정치활동도 함께 하지 않겠다”고 측근들에게 선언했다고 말했다. 신 총리가 최규하 대통령이 이상한 행동으로 나간다는 눈치를 채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초부터였다고 한다. 측근의 설명이다.
“12.12 당시 신군부는 신 총리의 꼬장꼬장한 성품에 혼쭐이 났습니다. 그 후 신 총리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전두환, 노태우 장군이 수 차 신 총리를 찾아와 ‘도와 달라”고 했으나 신 총리는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최규하 대통령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최 대통령과 신 총리 사이가 삐걱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도정부의 방향타였던 최규하와 신현확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타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채 역사의 격랑 속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신 총리는 1980년 4월 24일 전 언론사 편집국장을 삼총동 총리공관에 초청하여 만찬을 했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 신현확 총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80년에 들어가서 신문이 안개정국이고 뭐고, 앞이 안보이고, 어떻게 할 작정이냐 뭐냐. 하도 세상이 시끄럽고 말이 많아서 내가 몇 번 기자회견에서도 이야기 했지만은 이래서 안되겠다 싶어 총리공관에 모든 신문사의 편집국장을 초청했어. 그래 가지고 저녁을 같이 했지.
저녁을 먹고 내가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만났다. 뭔가 하면 안개정국이라 하고 방향이 뭐냐, 불안하다 전부 이러는데, 이것 보시오. 기본방향을 몇 번이나 발표했는가. 그러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새로 헌법 만들어서, 새 헌법에 의해서 선거를 해서 정부를 새로 만들고, 국회 새로 구성한다고 그러는데 자꾸 앞이 안 보인다고 하니…. 누가 당선될지 선거를 해 봐야 알지 이걸 자꾸 안 보인다, 안개정국이다 그러면 어쩐단 말인가. 이렇게 설명을 했어.
그러니까 (편집국장들이) “그런 의미가 아니고, 지금 정부가 해나가는 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그 때는 벌써 그런 말이 상당히 많이 나 있었어. “그러면 최 대통령이 그냥 잡을 것인가. 신 총리가 무슨 역할을 할 건가. 이런 것도 의문이고” 뭐 이런 식의 얘기가 나온다 이 말이야.
그래서 내가 얘기하기를, 그 점도 몇 번 설명했는가. 나는 중립을 지키고 정부가 관리정부다. 중립 지켜 새로 정부 수립되고 새로 국회 성립되면 우린 다 물러가겠다. 이것이 우리의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하고, 사명 왼수하고 우리는 물러가겠다. 이런 약속을 몇 번이나 했나. 그래도 못 믿겠다면 어쩌나. 이래 얘기했단 말이야.

권력 맛을 본 최규하, 생각이 달라지다

그 이튿날 청와대에서 사람이 일부러 와서 “이거 ‘우리;’란 말이 무엇이냐”하는 거야. 내가 ‘우리’란 말을 할 때는, 물론 나도 생각이 있지. ‘우리’란 단수가 아니란 말이야. 복수지. 그 복수가 뭐냐. 최규하와 신현확 그런 의미로 이야기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의미냐”고 청와대에서 일부러 그런 것은 “왜 청와대와 최 대통령까지 끌고 가느냐” 이것이야.
그건 벌써 (최규하가 대통령을) 얼마를 해 보니 처음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런 말이지. 그래 내가 화가 위로 올라 고만 소리를 질렀단 말이자. “무슨 소리를 하고 앉았느냐. 청와대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 아닌가. ‘우리’란 말도 모르나.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가라고 그래” 하고 소리를 지르고 안 만났지.>

(기자 해설-이 사건을 계기로 신 총리는 최규하 대통령이 집권연장에 뜻이 있음을 확실하게 눈치챘다고 한다.)

<그 뒤에도 내가 말을 일체 안한 것은, 내가 이 말을 하면 최규하 씨가 처음에는 “안 하겠다” 그랬던 사람이지만 쪼금(조금) 해보니까 점점 생각이 달라져서 “인제 나는 (대통령)을 할 생각인데 왜 네가 같이 끌고 들어가 안 한다고 그러느냐” 그러면, “최규하는 (대통령을) 더 할 생각이다” 내가 이래 주장하는 게 된다 이 말이지. 내가 최규하 씨를 그렇게 몰아붙이면서까지 그런 얘기 끄집어내서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래서 일체 말을 안 했어.
‘우리’란 말을 쓰면 우리는 관리정부의 사명을 완수하고 물러가겠다는 것이 문제지. 그러니 ‘물러가겠다’는 데 이의가 없으면 “왜 우리라고 하느냐” 이른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그래 봤기 때문에, 그냥 화만 내고 상대를 안 해 버리고 말을 안 했어.
또 일면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본인은 그렇게 생각도 않고 있는데,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 그리 몰고 가기 위해서 하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 이상 거론을 안해버리는 거지.>

3김 측의 신현확 제거 움직임

(기자 해설-신 총리의 측근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내각의 국무위원들은 신 총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국정의 중심도 자연 신 총리에게 쏠렸습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신 총리를 자주 찾아와 시국의 흐름을 진지하게 상의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되자 정치권 일각, 그리고 청와대에서는 ‘실세총리, 허수아비 대통령’이라는 말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에 반대하는 공화당 중진들, 그리고 경북지역의 기업인들이 신 총리를 찾아와 집요하게 신당 창당을 권유하기도 했고, 집권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 총리는 단호하게 ‘민주정권 출범 후 나는 그만둔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3김 씨들이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신현확이 자기들 대권 행보의 결정적 걸림돌이라 판단한 거지요.”
당시 신현확 총리와 가까운 사이였던 김수한 의원(전 국회의장)은 “정치권에서 신 총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80년 3월 14일 정부가 개헌심의위원회를 발족해 신 총리가 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수한 씨의 증언이다.
“그 무렵 국회에서 이미 헌법개정특위가 활발하게 가동 중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행정부가 독자적인 헌법을 만들겠다고 나서자 ‘혹시 신 총리가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냐’ 하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신 총리를 국회에 출석시켜 거세게 몰아붙이곤 했어요. ‘정부가 헌법 개정을 한다는 건 국회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어줍지 않은 행동 집어쳐라’ 이런 것이었죠. 그러나 신 총리는 ‘헌법 개정은 정치권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답변하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3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 “새 헌법의 정부형태로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 저충형태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시사함으로써 불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대통령은 외교 등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총리가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이원집정부제 형태를 시사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 총리의 측근은 “이원집정부제의 진원지는 신 총리가 아니라 최규하 대통령”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 총리는 강력하게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했습니다만, 최규하 대통령은 휘하 인사들에게 비밀리에 이원집정부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던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권력은 신군부가 잡도록 하고, 최 대통령은 명목상의 대통령직을 차지한다는 계획이었죠.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직 유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군부를 등에 업는 한이 있더라도 자리를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 판단이 아니라 당시 신 총리가 수 차 나를 불러 해주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제 신 총리는 3김으로 상징되는 정치권, 그리고 정치참여를 노리는 신군부로부터 십자포화를 얻어맞는 상황으로 몰려가게 된다. 이 와중에 3김 측의 신현확 제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다시 신 총리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간다.)

<세상이 전부 내가 말한 것을 돌려서 곡해로만 나간다 이 말이야. 그래가지고 안개정국이란 말이 없어졌느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점점 더했지. 점점 부추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말이야. 심지어 이런 거야.
나하고 같이 몸담고 있던 공화당 간부, 당시 국회의원 중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하는 얘기가 뭔고 하면 “이런 거 알고 해나가십시오. 내가 일부러 알려 드립니다” 하면서 “김종필 씨, 김영삼 씨, 김대중 씨 참모라 그럴 만한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의논을 했습니다. 그 의논이 뭔가 하면 ‘우리가 지금 3김 경쟁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은 신현확이가 잡을 것이다. 그러니까 신현확이가 없어지지 않는 한은 우리가 경쟁해봤자 소용없다. 그러니까 3김이 합쳐서 신현확을 제거하고 우리 경쟁하자. 이렇게 의논을 해서 각자 한 사람씩, 아주 믿을 수 있는 대표를 지정해서 신을 제거해 나가는 의논을 해나가도록 하자. 이것이 합의가 되어서 제가 그 대표 참모의 한 사람으로 지명이 되었습니다. 이래 움직이고 나가는데 신 총리는 혼자서 이 나라 위기관리 정정당당하게 한다고만 하면 될 줄 아십니까” 이렇게 알려주더라니까. 세상이 이래 움직여서는 정상으로 안 가는 것이거든.
그래서 내가 청문회(1988년 5공 특위) 나갔을 때 그랬잖어. “당시에 3당하고 협력이 잘 되었느냐” 그래서 “나는 협력을 못 받아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답변했거든. (정치권은) 당연히 해야 할 협력을 안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당사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래 답변했거든. 청문회 녹음테이프를 한번 보라고.>

(기자 해설-당시 신 총리에게 3김 측의 행보를 전한 인물로 알려진 정치인은 “내가 신 총리를 만나 그런 말을 해준 기억이 난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런데 3김의 신현확 제거라는 구체적 움직임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학생·군 대결하면 불행 초래

<당시엔 실질적으로 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지만, 그건 계엄령이 발포되어 있었으니까 군이 실질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 다만 내가 있는 동안은 계엄령이 지역계엄이란 말이야. 지역계엄이란 무엇이냐. 계엄사령관이 정상적인 내각, 장관을 통한 행정명령 계통이 지휘감독을 받는다 이 말이야. 말하자면 총리의 장관의 부하로써 지휘명령을 받으면서 움직인다 이 말이야.
그때까지 나는 내각은 다 내 책임으로 한다. 그래 하고 있고, 또 그렇게 행동했고. 예를 들면 그렇게 데모가 심해지고 질서가 문란해졌지만, 심지어 내무장관(김종환)이 몇 번을 찾아와서 “이제 경찰은 못하겠습니다. 힘의 한계를 벌써 넘어섰습니다. 계엄군이 출동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제 저희들은 책임 못 지겠습니다” 이런 걸 여러 번 당부했는데, 내가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희생을 당하더라도 경찰이 전부 담당해라. 군은 출동 안 시킨다. 학생과 군이 직접 대결하게 되면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이 사태는 피해야 되겠다”
이렇게 최후의 상태까지 못나가도록 내가 지켰어. 내가 그만 두는 국무회의에서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했지.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군이 전면에 나서는 거란 말이야. 내각의 행정권이 없어져버려. 계엄사령관은 대통령하고 직접 해서 모든 국정을 다 결정하는 거야. 내각은 이름만 있지 없는 거나 똑같이, 법적으로 아무 권한이 없어져 버리는 거야. 그 때는 대통령하고 군하고 직결해서 행정권까지 다 하게 되는 것이 전국계엄이란 말이야.
그런데 청문회(1988년 광주 민주화운동 특위)에서도 “내각이 전국계엄을 사전부터 군부와 짜고 그랬지 않느냐” 나를 공격하는 목표를 그래 설정했다 이 말이야. 내가 청문회에서 그랬지. 이 세상에 어떤 내각이 자신들의 권한을 몽땅 군에 이양하고, 우리는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자. 그러는 것을 사전 모의하는 그런 놈의 내각, 자기 자살하자고 사전 모의하는 그런 내각이 어디 있느냐. 자기들도 그래 공격하고 나오다가 보니 말이 안 되는 소리거든. 그래서 청문회가 좌절된 것이야.>

(기자 해설-시국의 구도는 최규하 대통령이 점점 군부와 밀착되어 가고, 3김은 과도정부를 흔들어 대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내각의 중심에 서 있던 신 총리는 최후수단으로 군부의 전면 등장을 막기 위해 3김 씨와 접촉, 정국운영에 협조를 당부하는 등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시 신현확 총리의 육성 증언으로 돌아간다.)

<나는 나대로 가만히 보면 최규하 씨하고 군부하고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지고 보인단 말이야. 또 신군부로 말할 것 같으면, 전두환 씨에게부터 내가 “당신 겸무하지 마시오” 그카는(그렇게 하는) 판인데  나를 좋다고 할 리는 없지. 이렇게 나가니 나한테는 점점 멀어지고, 저짝(최규하)은 가까워 질려고 그 전부터 그러는 기색이 나한테도 보였고.
이건 경계할 일이다. 아까 12.12 때 설명한 그런 이유로 경계할 일이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서 나는 나대로만 노력을 해나갔지. 그 노력이 뭐냐. 군이 더 이상 발언권을 강화해 나가는 구실과 계기를 안 주어야 되겠다. 구실이 있으면 절로 군의 발언권, 군의 행동을 강화할 수밖에 없고 그걸 막을 수도 없고, 그 구실과 계기가 안 되도록만 해나가는 것이 견제다. 그래가지고 정상적인 헌법제정, 정상적인 선거로 가져가고 이래 하는 것이 관리정부의 사명을 완수해 나가는 길이다. 이렇게 판단하고 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해서 나가는데….
이게 누구와 협력이 돼야지. 그래도 날 따라오는 것은 내각에 있는 장관들이지. 따라와도 그 사람들 자기 업무 범위에서만 그런 것이지 그 외에는 그게 되질 않는다 이 말이야. 하다 하다 나중에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김종필 씨, 김영삼 씨 뭐 이래 전화를 걸어가지고 “내가 직접 만나자고 하면 피차 곤란할 테니까, 또 세상 시끄럽고 그러니 꼭 믿을 수 있는 대리를 나한테 보내주십시오. 내가 좀 할 말이 있다”고. 이래가지고 만난 일도 몇 번 있어요.
만나서 뭐라 했나 하면, 이거 보시오, 나라가 점점 혼란해 가는데 당신들은 무조건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계엄 해제하라” “무조건 해제하라” 그러면 나라 되어가는 것은 어떻게 되어도 좋단 말이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데모가 쪼꼼(조금) 조용해만 져다오. 그러면 내가 즉각 계엄령을 해제하겠다. 그카는 데 왜 당신들은 자꾸 학생들 쪽 지지하고 점점 선동하는 거냐 뭐냐.
내가 경고하는 말이 하나 있소. 어느 나라에서나 질서문란이 어느 정도 이상 진행이 되면 군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요. 하물며 우리는 남북대결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지금도 계엄 선포되어 있는 상황 하에서, 질서가 너무 문란해지면 군이 가만히 있겠소? 심지어 지금도 내각 안에서조차 “이 상태에서는 정상 행정력으로는 불가능이니까 군 출동을 허용합시다” 이것이 한두 번 논의된 것이 아닌데.
이제 나도 한계가 있다. 더 문란해지면 나 못 막는다. 내가 못 막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군이 직접 나선다. 군이 직접 나서면 질서는 회복할 것이다. 질서를 회복한 다음에 군이 “이제 질서가 회복되었으니 도로 들어 가겠다” 그럴 줄 아시오? 어느 나라에서 그런 것 보았느냐. 군이 한 번 전체 통제력을 잡고 나면 그 다음엔 들어가지 않소. 당신들 그것 모르느냐.
이렇게 말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부 그러카는 거야. 그러면 지금 협력해야 되는 거요. 군에다 구실을 주어놓고 나중에 이러쿵저러쿵 그래봤자 소용없는 거요. 심지어 그래 설명했어. 그 자리에선 “알아듣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래놓고, 금방 가서는 정반대 소리 또 발표하고 난리를 치고, 또 선동하고….
심지어는 차량으로 전부 학생들에게 마시는 것, 먹는 것, 빵 실어다 날라주고 자금 대주고 그랬단 말이야. 그렇게 혼란을 점점 조장해 놓고 나중에 군이 나와서 잡았을 때 그 사람들, 정치인들 뭘 어쨌느냐 이 말이야. 그러고 최규하 대통령은 군이 자기를 제일 지지한다고, 제일 가찹게(가깝게) 지낸다고 이래 알았지. 그래서 나는 (국무총리) 고만두고 들어앉아 버렸지.>

“혁명을 결재 받아 하느냐”

 

(기자 해설-시국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대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력은 한계에 부딪쳤다. 학생시위가 절정에 달했던 1980년 5월 15일은 전국 80여개 대학에서 10만여 명의 학생이 거리로 몰려나와 산현확, 전두환 퇴진과 계엄해제 등을 외치며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저녁에는 시위차량이 진압경찰관 대열에 돌진하여 경찰 한 명이 현장에서 깔려 죽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김대중 씨가 이끄는 재야세력인 국민연합은 비상계엄 즉각 해제, 유정회와 통일주체국민회의 즉각 해체, 신현확 총리 즉각 퇴진, 정치범 전원 석방 및 복권 등의 요구사항에 대해 정부가 5월 19일 10시까지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으면 5월 20일 정오를 기해 대(對)정부 투쟁에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위기감이 팽배해 있던 5월 17일. 드디어 군부에서는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를 소집,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했다.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 위해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신 총리를 찾아왔다. 당시 정황에 대한 신현확 총리의 육성 증언이다.)

<마지막에 내가 그만둘 때는, 아마 토요일이지. 저녁 먹고 공관에 있는데 그때 몇 명이(주영복 국방, 이희성 계엄사령관) 나를 만나러 왔단 말이야. 무슨 일이냐 그러니까 서류를 내미는데, “질서회복을 위해선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전국계엄 선포해 주십시오. 그리고 국회 해산해 주십시오. 그리고 비상 무슨 회의? 국보위(國保委)라 그래 국보위란 게 뭐냐고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조직으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니 이 세 가지를 결재해 주십시오“ 그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 하느냐. 비상계엄 전국 선포는 질서가 문란해서 안 할 수 없다면 제외해 놓고 이야기하자. 국회 해산, 그리고 정부가 있는데 또 무슨 정부 같은 국보위, 이게 뭐냐. 이거 혁명 아니냐. 혁명을 결재 받아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혁명은 총칼로 하는 거지. 못 한다.
이래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이거 다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한테 가자. 그래서 최규하 씨한테 갔지. 그런데 뭐 결정이 나나. 나는 못 하겠다 이래가지고 또 옥신각신….
최규하 씨는 내가 반대를 하니까 아무 말 안 했지. 자기는 그냥 “신 총리 그래 말씀하시는데 이렇지 않느냐” 뭐 이런 정도였지. 나는 못 하겠다고 했어. 최규하 씨하고도 손발이 맞아야 일을 하지. 나는 총리 그만두겠다.
나중에 “이제 군이 나와야 질서가 잡히겠다 하는 상황에 빠진 것은 내일 모레 전국 무슨 대회 한다고 이화여대인가에 모여가지고 밤을 새워 전국 대학생 대포들이 이십 며칫 날 정해가지고 전국 일제히 궐기하고 어쩌고. 그러면 이걸 어떻게 대처하느냐. 그러니까 전국계엄은 안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러는 거라.
그래 좋다. 그거는 인정한다. 그러나 국가질서는 지켜야겠다. 나머지는 못 하겠다. 그래서 최 대통령한테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인정하겠다. 그리고 이건 국무회의 결의를 하겠다. 그러고 나는 그만 두겠다” 그래가지고 비상 국무회의 소집해 가지고 전국계엄령 확대하는 것만 결의하고 내각은 전부 사퇴한다. 나는 내가 힘이 모자라고 부덕해서 이래 됐는 거니까 그만둔다. 내각 전체의 사임을 강요하진 않겠다. 각자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자. 그래 부총리부터 한 사람씩 차례로 의견을 말씀해 주시오. 
그랬더니 돌아가면서 전원이 그만 두겠다 그러는 거야. “그만두어라” 이 말이 아니고 내각이 자진해서 총사퇴 결의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에 한 번밖에 없었지. 나중에는 최규하 씨가 “이런 위기시대에 어쩌자고 이러캅니까” 하며 말리고, 나중엔 군부에서도 말렸어. 전두환 씨도 “와이러카십니까. 이러카면 어떻게 해나갑니까” 그래도 나는 못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기어코 총사퇴했어. 그런데 내가 군부하고 짜서 뭘 어짜고 하는 거야?>

최규하 비판

 

(기자 해설-신 총리 측근은 기자에게 “당시 신 총리가 주영복 장관과 이희성 사령관을 데리고 대통령을 찾아간 것은 대통령이 그래도 자신을 믿고 군의 요구사항을 거절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외면당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군부의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신현확 총리는 5.18 검찰 수사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저는 내심 비상계엄 전국 확대 결정권자인 최 대통령께서 단호히 거부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이를 재가하는 것을 보고 매우 섭섭했으며, 국가의 장래가 걱정됐습니다.”
다시 신현확 총리의 육성 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최규하 씨 저 사람이 나라 책임자가 될 사람이 못 돼. 전두환 씨 입장에서는 최 대통령을 이용한 거지. 그건 본인보다 주변이 더 그랬는지 몰라. 예를 들며 김옥길 씨(당시 문교부장관)가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쫓아와서 “학생들 움직임이 이렇고, 어느 학교에서 뭐를 어짜고 저짜고”나한테 와서 일일이 보고하는 거야. 그래 내가 여보시오. 당신 그런 사항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설명하고 있는 거야? 그래 물어보니까 김옥길 씨가 “아, 만날 수가 있어야 보고를 하지요. 일주일 전부터 면회신청을 해놔도 아직까지 면회를 허용하지 않는데 어떻게 보고를 합니까”
만나기 싫다는 거야. 귀찮은 소리 듣기 싫다는 거야. 그 위급한 사태에서 보고도 귀찮다, 너희가 알아서 하라 이 식이거든. 그러니 행정업무도 중요한 결정 될 것 뭐할 것 전부 나한테 와서 “벌써 한 달째 결재가 안 되고 있는 어떻게 합니까” 이러는 거야. 장관들 보통이 그랬어. 내가 왜 그거 결재 받아서 하지 그러느냐 하면, “(대통령이) 결재를 안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러지. 내가 “당신 장관이면 그만한 결단심도 없소? 당신 판단 하에 할 건 하시오” 그런 식으로 해버리니까 전부 나한데만 쫓아와서 의논한단 말이야.
그러니께(그러니까) 정부 안에서도 다 알지. 모든 일은 전부 신 총리가 다 한다. 이러니까 “틀림없이 신 총리가 실권 잡는다. 모든 결정을 신 총리가 하고 있다. 신 총리가 독재 한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린 거지. 그래가지고 학생들 데모하면서 서울역 앞에서 5만 명이 모였을 때, 그 때 플래카드가 ‘물러가라 신현확, 불쌍하다 최규하’ 이러카고 데모하는 거라.
나한테 보고가 그렇게 올라오는 거라. 허허 그래 뭐를 우째? 나를 물러가라고 하는 거는 미운 놈 물러가라 그런다고 그러자. “불쌍하다 최규하”는 뭐가 불쌍하나. 최규하 대통령하고 호흡이 잘 맞았다면 민장 이양이 제대로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나는 그래 봐. 그러나 나는 최종권한은 없단 말이야.

최규하에게 동반퇴진 요구

박(정희) 대통령이 최규하 씨를 국무총리에 앉힌 것이 박 대통령의 큰 잘못 중의 하나인데, 박 대통령의 마지막 얼마동안은 박 대통령이 사람 보는 눈이 흐렸다고 볼 수 있어. 자기 주변에 쓴 사람들, 김재규를 위시해서 차지철 누구누구, 다 모두 문제되던 사람들이야
또 한 가지는 자신감이 너무 많이 붙었어. 박 대통령도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하고, 성공적인 부분이 많았고 하니 자신감이 많이 붙어서 마 “총리나 부총리나 뭐 장관이나 할 것 없이 자기 이론 가지고 대들고 하는 사람 귀찮다, 내가 자신을 가지고 하는 일에 왜 자꾸 덤벼드느냐” 이렇게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이 말이야.
최규하 씨는 그 정반대니까. 그런 일 절대 없으니까. 그러니까 호감이 갈 뿐 아니라 귀찮지도 낳고 다 좋다 이 말이야. 나는 부총리하고 있었는데 밤낮 싸움하니까. 밤낮 그거 못하겠다, 자기하고 반대되는 말을 하니까. 위정자로 볼 때 자기 말 잘 들으니까 아주 편하고 좋거든. 사람이란 집권을 오래 하게 되면 주위에는 받드는 사람뿐이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그래 되지 않느냐. 그러니까 박 대통령 같이 현명한 사람도 말기에는 그런 현상이 나타났지 않느냐 그렇게 봐.>

(기자 해설-신현확 내각이 총사퇴함으로써 이제 시국은 최 대통령과 신군부의 연합이라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국가 행정에서 내각이 배제되고 군이 전면에 등장하는 길을 최규하 스스로 열어놓은 결과였다. 마침 신현확 총리가 퇴진하는 날은 광주에서 계엄군과 시민들이 충돌하여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을 때였다.
신 총리 의전비서관이었던 장영철 의원은 광주사태가 벌어졌을 때 신 총리가 최 대통령을 만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증언했다.
“도대체 대통령이 이 상황에서 담화문이나 성명서 한 장 발표하지 않고 가만 앉아 있습니까. 저는 사표를 내서 정부 일에 간여할 입장이 아닙니다만 대통령께서 직접 광주로 내러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수습을 하도록 하십시오.”
또 다른 측근은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서 돌아온 다음날(5월 17일) 아침, 신현확 총리가 최 대통령을 만나 ‘동반퇴진’을 강력히 권유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 총리는 과도내각의 마지막 승부수는 자신과 최 대통령의 동반퇴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5월 17일 아침, 최 대통령과 아침에 독대하여 ‘우리가 영원히 살려면 함께 사퇴합시다’ 하고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신 총리는 ‘군부가 등정하려면 과도정부를 쓰러뜨리고 가라’ 이런 뜻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최 대통령과 동반퇴진하면 군부의 등장이 불법이 되므로 끝까지 저항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계속 자리를 유지할 경우 군부 등장을 합법화시켜줄 것’이라고까지 했지만 이미 최 대통령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던 겁니다. 지금도 신 총리는 5월 17일 아침을 회상하면서 ‘최규하 씨는 민간정부 출범이라는 국민과의 약속을 위배한 사람’이라고 말하십니다.”
사표를 내던진 신 총리는 자택에 칩거하여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신 총리는 오랜 지우(知友)인 김정렬 씨의 방문을 받는다. 이날 김정렬 씨는 ‘최규하 하야 밀사론’에 대해 털어놓았다. 5.18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에 의하면 김정렬 씨는 1980년 7월 30일 청와대로 찾아가 최 대통령과 5시간 담판을 하여 최 대통령을 하야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 총리와 그 측근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렬 씨가 최 대통령을 한 번이 아니라 두 차례 찾아가 하야를 권유했다고 한다. 다시 신 총리의 육성 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그런 다음에 내가 다 알지. 김정렬 씨, 내가 옛날 자유당 시절부터 내각에 같이 있었고, 제일 친한 사이고, 밤낮 바둑도 같이 두고 이래. 김정렬 씨가 나한테 와서 “신군부에서 (사람이) 와서 최규하 대통령 물러앉으라고, 사임 권유를 맡아서 해달라”는 얘기가 있어서 자기가 갔다 그래. 최규하 씨한테 그렇게 얘기하니까 최규하 씨가 “무슨 소리 하느냐”고, “군이 나를 지지하고 있는데 내가 왜 물러 앉느냐”고, 이러카더라 그래 허허허허. 그래서 김정렬 씨가 또 갔어. 이렇게 해서 사임하게 되었지.>

"명예롭게 퇴진해서 편안한 여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기자 해설-신 총리의 측근은 김정렬 씨가 두 번째 하야 밀사로 찾아갔던 상황을 기자에게 이렇게 전했다.
“당시 김정렬 씨의 첫 번째 하야 권유가 실패하자 신군부는 ‘헌 번만 더 수고를 해주십시오’ 이렇게 요구했답니다. 이번에는 조건이 뭐냐 하면 ‘명예롭게 퇴진해서 편안한 여상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불명예스럽게 퇴진해서 불행한 여생을 사시겠습니까’ 이런 것이었답니다. 김정렬 씨가 두 번째로 이 말을 전하자 최 대통령은 하야를 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 측근은 또 신군부가 김정렬 씨를 찾아가기 전에 노태우 장군이 신 총리를 찾아와 최규하 하야 밀사 역할을 부탁했다고 말했다. 측근의 증언을 들어 본다.
“어느 날인가 노태우 장군이 신 총리를 찾아왔습니다. ‘이 비상시국에 도저히 최 대통령 체제로 갈 수 없으니 어려우시겠지만 신 총리께서 그 뜻을 최 대통령에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러더군요. 신 총리는 이렇게 답변하신 기억이 납니다.
‘답답한 양반들. 내가 5월 17일에 그렇게 동반퇴진하자고 설득해도 안 그만둔 사람을 이제 와서 무슨 수로 그만두게 하란 말이오.’
그날 신 총리가 호통을 치는 바람에 노태우 장군은 고개를 들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노 장군이 ‘그러면 그 문제를 누구와 상의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렇게 묻자 ‘당신들이 알아서 찾으시오’ 그래서 김정렬 씨를 찾아간 것입니다.”
신 총리가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은 1988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였다. 당시 정황에 대한 신 총리의 육성 증언이다.)

<그런 상황에서 (청문회가 열려) 그거 잘됐다, 내 마음대로 말할 기회가 생겼으니까. 그래서 묻는대로 내가 답변하지 이래 생각했어. (증언을) 하고나니까 사설들이 모두 좋지 않게 썼거든, 가장 심한 거는 한겨레신문, 뭐라고 썼나 하면 ‘오만불손한 신현확’ 이게 사설 제목이야.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국회의원들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말을 했다. 오만불손하다’ 이런 식으로 썼어. ‘오만불손한 아무개’ 이래 제목 붙여가지고 사설 쓰는 건 처음 봤거든. 다른 신문들도 별로 평이 좋지 않았고.>

(기자 해설-10.26에서 5.18, 최규하 하야에 이르는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증언은 여기서 끝난다. 1980년 시국에서 야당인 신민당 의원이었던 김수한 의원(전 국회의장)은 “결국 당시 정치권은 신 총리를 오판한 셈이 되었다”고 말했다.)

(하권에 계속)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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