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부터 "박정희 스위스은행 계좌에 통치자금 8.5조, 현재가치 300조~400조" 주장
'崔 독일 은닉재산' 주장 소득 없자 '프레이저보고서' 꺼내…미확인된 '스위스 계좌'설 기반
번역자도 거론 않는 "통치자금 8.5조" 주장을 "박근혜 최순실 일당"으로 연루시켜
"'朴 세월호 때 롯데호텔 36층 시술' 제보 허위일 수 없어" 등 가짜뉴스도 퍼뜨려

"프레이저보고서 보면 박정희 통치자금 8조5000억…현재가치 300조~400조"

박근혜 전 대통령을 겨냥한 수많은 '가짜뉴스'가 창궐했던 2016년 말 탄핵 정변 와중에, 시쳇말로 '스케일이 큰' 주장이 현 여권(與圈)인 당시 야권에서 제기됐다. 소위 국정농단설의 소재로 쓰이던 최순실씨가 나라 안팎에 가진 재산이 조(兆)단위에 이른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당초 수천억원에서 시작해 10조원으로, 한술 더 떠 300조~400조원으로 부풀려졌다.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이 스위스 은행계좌에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대에 8조5000억~8조9000억원의 통치자금을 쌓아뒀고, 현재가치로 그 돈이 300조~400조원에 이른다는 식이었다.

대한민국 내 최고 부자(富者)로 꼽히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재산이 20조원 안팎인 현실에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황당무계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40년동안 그를 폄훼하는 세력들이 끊임없이 '박정희 스위스 계좌설'을 부각시켰지만 그 자체가 지금까지 전혀 확인된 바도 없다. 박정희는 국가 통치 과정에서 정치자금을 사용하긴 했지만 정치를 통해 개인적 축재(蓄財)에 열을 올린 일부 내로라하는 정치인들과는 돈 문제에 관해 차원이 달랐다는 평가가 많다. 박정희가 '대한민국 최대 갑부'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는 식의 주장의 근원지는 일명 '최순실 국조특위' 위원 출신인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오산시·4선)이었다. 안 의원은 최근 차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사진=유튜브 검색화면 일부 캡처

안민석 의원은 '탄핵 정변'과 조기 대선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물러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다음달인 2017년 6월13일 '브레이크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프레이저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전 대통령)의 통치자금은 8조원 정도였고 현 시가로는 300조원 정도 되는 천문학적 자금"이라며 "이 돈의 일부가 최순실 일가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같은달 28일에는 오마이뉴스 정치부장 출신 장윤선 기자가 진행하는 tbs '장윤선의 이슈파이터'에 출연해 "1978년도에 미 의회에서 발간한 프레이저 보고서를 보면 박정희가 스위스 은행에 쭉 모았던 돈들의 규모가 나온다"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400조"라고 주장했다. 진행자가 '스위스에만 400조?'라고 놀라움을 표하자 안 의원은 "프레이저 보고서에 나온 겁니다"라고 했다.

안 의원은 그 다음달(7월) 26일에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최씨 일가의 해외 은닉 자산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통치자금 규모가 당시 돈으로 8조9000억원, 지금 돈으로 300조가 넘는 돈. 그리고 그 돈으로부터 최순실 일가 재산의 시작점을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다 밝혀지면 파장이 클 것 같다'는 손석희 JTBC 앵커의 동조성 질문에 안 의원은 "화산이 폭발하는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안 의원은 줄곧 자기 주장의 출처를 묻는 언론 등에 "프레이저 보고서"라는 말로 입증 책임을 다했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사진=2017년 7월26일 JTBC 방송화면 캡처

일명 '프레이저 보고서'는 1978년 10월31일 미 의회에 '제출'된 것으로, 1976년 재미사업가 박동선의 미국 의회 로비사건(일명 '코리아 게이트')을 계기로 작성됐으며 정식 명칭은 '한미관계보고서'이다.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를 위원장 도널드 M. 프레이저의 이름을 따서 프레이저 위원회로 불렀으며,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프레이저 보고서'로 통칭하게 됐다.

보고서엔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기 한국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와 함께 통치자금 관련 의혹 제기가 일부 담겨 있다. 원본은 총 452p 분량이며 2014년 2월10일 노동운동가 출신 김병년 작가가 낸 한역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기간을 "악당들의 시대"로 지칭하는 등 일부 각색과 함께 676p 분량이 됐다.

안 의원은 프레이저 보고서 한역본을 2017년 6월 '최순실 일가 부정축재 재산몰수 특별법' 공청회를 진행하는 동안 들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각종 언론 인터뷰 등에서 해당 문건 어느 부분에 자기 주장의 근거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인용하지 않았다. 보고서 자체도 박정희 전 대통령 비자금이 8조원대에 달했다는 근거나 근사치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동안 언론 보도에 따르면 비자금 의혹을 제기해 오던 김병년 작가조차 '8조원'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7년 6월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최순실 일가의 부정축재 재산몰수를 위한 특별법 4차 공청회에서 인사말 도중 김병년 작가가 번역한 '프레이저보고서'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왼쪽은 같은 당 이상민 의원.(사진=연합뉴스)

보고서에 등장한 가장 큰 숫자는 '1억달러'로 파악됐다.

김 작가 스스로가 번역서의 뒷면 커버(표지)에 "박정희의 스위스은행 계좌"라는 소제목을 달아 본문 일부를 인용, 부각했다. "1970년경" 당시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김형욱 중앙정보부장·김성곤 민주공화당 의원이 각각 1억달러를 축재했다고 익명의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주장'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김 작가는 "김성곤은 수표로 지불되는 자금을 수집"했고, "김형욱은 김성곤으로부터 받은 수표를 현금화하는 동시에 현금으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수집"했으며, "이후락은 스위스에 은밀한 정부자금을 예치하고 관리했다"는 서술도 함께 인용했다.

보고서 내에는 민주공화당이 일부 미 기업으로부터 850만달러 등 자금을 수수했다는 정황이 적혀 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얼마 만큼의 정치자금을 직접 수수, 관리했다는 내용이 없어, 번역서로 내면서 측근들 관련 정황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거론된 '1억달러'의 가치는 얼마일까. 1970년 당시 원/달러 환율은 대략 '1달러 당 310원'으로 알려진다. 그대로 1억을 곱한다면 310억원 가량을 세 사람이 각각 축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모두 더해도 8조5000억원설에 한참 못 미친다. 애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실제 재산 소유를 추정할 직접 근거도 되지 못한다. 

김병년 작가의 '프레이저보고서' 번역서 뒷면 표지.
김병년 작가의 '프레이저보고서' 번역서 뒷면표지에 일부 인용된 369p 내용.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중앙재정의 규모는 1970년 6968억원에서 1979년 8조2754억원으로 확대됐다"고 밝히고 있다. 1970년 기준 8조5000억원이라는 돈이 있었다고 상정해도, 2019년 2월 현재가치로 193조4371억3088만760원이다.

프레이저 보고서가 제출된 1978년 기준 8조5000억원이 있었다면 현재 가치로 67조2505억6780만9603원, 약 3분의1로 평가액이 줄어든다. 어떤 숫자도 안 의원의 300조원~400조원 계산에 미치지 못한다.

안 의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씨를 연루시킨 '박정희 통치자금 300조~400조' 프레임의 허구성은 네티즌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백과 '나무위키'에서도 확인된다. 친문(親문재인)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헛소리"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대목을 인용한다.

참고로 포브스 선정 세계최대 부호1,2,3,4위 재산을 모두 합해도 2500억 달러(280조원) 수준으로 300조가 안 된다. 이렇게 터무니없다 보니 문재인 대통령 지지 성향이 강한 커뮤니티들에서도 최순실-박근혜의 300조 재산 축적설은 헛소리 취급을 받고 있다. 

항간에 "상식을 믿지마! 프레이저 보고서를 믿어!"라며 최순실-박근혜 전세계 부호 1위설을 곧이 곧대로 믿으라는 소리도 있는데, 프레이저 보고서에서도 안민석의 주장을 유추할 만한 내용이 없다. 이후락&김형욱 등 박정희의 측근들이 1억 달러씩 축재를 했다는 내용은 나왔어도 60억달러 스위스 비자금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박정희의 스위스 계좌에서 200만 달러, 20만 달러, 10만 달러가 입금 또는 인출되었다 정도만 나와 있지 정확한 전체액수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프레이저 보고서는 말 그대로 미국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일 뿐, 정확한 공식 통계자료도 아니다. 

안 의원 등이 보고서를 토대로 '박정희 스위스 계좌'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주장을 편 것 역시, 공신력있는 물증(物證)으로 확인된 바는 없는 내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연말까지 계속된 '스위스 계좌 정보공개 청구' 기자회견이 응답없는 퍼포먼스에 그치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박영수 전 특별검사(그래픽=연합뉴스)

안 의원은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선고를 이틀 앞둔 2017년 3월8일 페이스북에 '프레이저 보고서'를 최씨 관련 주장으로는 처음 거론했다. "박근혜 최순실 일당은 독일 재산을 한푼도 캐지 못한 특검을 비웃고 부활을 꿈꾸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당초 최씨의 독일 은닉재산이 최대 7~8조원에 달한다며 '재산 추적팀'을 자처하는 등 눈길을 끌었으나 입증되지 않고, 같은달 박영수 특검팀이 '최씨의 불법 재산은 찾지 못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한 가운데 나온 말이었다. 이후 6월부터 마치 '판돈을 올리듯' 도박에 가까운 의혹제기를 계속 한 셈이다.

안 의원은 앞서 2016년 11월16일 "최순실이 스위스 은행에 어마어마한 돈세탁을 의뢰했다"고 주장했으며, 같은해 12월22일 JTBC '썰전'에 출연해 "지금 알려지기로는 최순실 일가 재산이 몇천억원 대이지만, 조 단위일 것으로 본다"고 했었다.

안 의원은 2017년 1월8일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독일에서 최씨의 은닉 재산을 조사했다며, 시사인 주진우 기자,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 등과 함께 "지난 수십년간 최순실의 돈세탁 흐름을 파악했고 현재 '상상을 초월한' 최순실 독일 인맥과 재산 상황도 많이 파악했다"고 전했다.

"최순실의 소유로 추정되는 부동산도 몇개 찾았다"면서 "국민 여러분과 세월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끝까지 더 열심히하겠다"는 다짐을 드러내기도 했다. '쿠키뉴스'에 따르면 그는 같은달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에서 최순실의 페이퍼 컴퍼니가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며 "독일 내 재산규모만 70억유로(한화 7~8조)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최순실 씨의 재산이 몇 조원대라는 안 의원의 주장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사진=유튜브 검색화면 캡처

"박근혜 前대통령 세월호 참사일 롯데호텔 36층서 시술 보도, 제보 허위일 수 없는데…"

한편 안 의원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6층에서 미용시술을 했다'는 제보를 받았다는 2016년 12월21일 재미매체 '선데이저널'의 보도([충격제보]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롯데호텔 36층에서 무슨 일이?)와 관련, 보도 나흘 뒤(25일) 한 팟캐스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 제보가 허위일 수 없는데, 그랬을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인터뷰 당시 안 의원은 "그걸(보도를) 보고 제가 전화를해서 ('리차드 윤'이라는 기자와) 통화했다"며 "안치용 선생하고 같이 일하는 분인데, 안치용 선생이 YTN기자 출신이다. 그분이 나름대로 그동안 정의롭고 진실된 기사 많이 썼고, 그분께 전화하니까 '자기가 잘 아는 분이 했는데, 그분하고 한번 통화해봐라' 해서 제가 했다. 그 내용은 롯데 고위관계자 당시, 그날 현장에 있었다고 하는 롯데 고위관계자가 한 제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고 하면 그 제보가 허위일 수 없는데, 그랬을 것 같다"고 했다. 

안 의원은 이와 함께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오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롯데호텔 36층 CCTV를 롯데 측이 공개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안 의원의 주장 이후 특검 수사와 언론 보도로 드러나기를, 롯데호텔 36층에는 객실이 없었고 명칭 내 '수이트룸'을 사용한 다수의 대형 회의실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외에도 안 의원은 이른바 '최순실 연예인' 설,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옛 남편 신주평씨에 대한 '공익근무요원 복무' 설(의혹제기 직후 신주평씨는 현역 입대), 자신이 박영수 특검에 제공한 정보가 정유라씨 체포가 크게 기여했다(특검에서 부인)는 '가짜뉴스'의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집권여당 4선 의원에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라면 가질 법한 무게감과 책임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안 의원은 최근인 올해 2월13일 자유한국당 2.27 전당대회 당대표 후보로 출마한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겨냥해서도 "황교안은 박근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최순실의 은닉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특검 연장을 반대했다고 본다"고 정치공세를 폈다.

한기호 기자 rlghdlfqj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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