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건국을 부인하는 이들 중에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하는 좌파와 그 동조세력이 많다. 그들의 주장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수립되었다면 현재 평양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보안법과 관계없이 반역집단이 된다. 해방 직후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등 좌익세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하나의 독립운동단체 이상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그 법통성을 부인했다. 그들은 임정의 법통성을 부인하면서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했기 때문이다.

상해 임시정부의 의회 격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문재인 대통령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 100년이라고 주장했다가 최근에는 이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상해 임시정부의 의회 격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문재인 대통령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 100년이라고 주장했다가 최근에는 이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I. 건국일 논란

“우리는 처신이나 성공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

폴란드 역사학자 콜라코프스키의 말이다. 조선일보는 2006년 8월 14일 대한민국의 건국에 관한 국민의식조사결과를 보도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지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 나라 국민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표1] 참조).

2015년 8월 19일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의 광복 70주년 관련 국민의식조사결과는 다욱 흥미로다. “대한민국 건국시점이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국민들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표2 참조]).

위의 두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이 나라 국민 중 67.1~79.0%는 자기 나라의 건국일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고, 단지 21%만이 자기 나라의 건국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건국 70년이 되도록 건국일이 언제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내용증명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대한민국 교육부까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면서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즉 국가의 수립(건국)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2013년 10월 교육부는 ‘고교 한국사 교과서 수정 보완사항’ 중 교학사 교과서의 ‘건국’이란 용어는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고 삭제를 지시했다.
교육부는 국사편찬위원회 자문의견서를 인용하면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이유로 1919년 임시정부 건국 기점설, 1897년 대한제국 건국 기점설, 기원전 2333년 단국왕검 건국 기점설 등을 제시했다(조갑제, 「요설에 넘어간 황당무계한 교육부가 좌편향 교과서 사태의 주범이다」, 『월간조선』, 2014년 4월호, 212-231쪽 참조).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1월 2일, 올해 첫 일정으로 국립국립현충원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국민이 주인인 나라,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썼다.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 차원에서 건국 100주년 행사를 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건국 백년’을 선포하게 되며, 각종 문서와 자료 등을 통해 역사적 기록으로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에는 임시정부 수립일이 건국일이 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건국일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말한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일이 건국일이며, 2019년이 건국 100주년이라는 주장은 과연 맞는 주장일까?
1949년 8월 15일 정부는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으며, 모든 정당과 신문들은 독립 1주년 기념 성명을 발표하고 기념기사를 보도했다. 이때 독립 1주년 기념 기사 보도 과정에서 언론들은 ‘건국 1주년’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정당들의 성명도 대한민국 건립 1주년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1948년 8월 15일이란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도전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좌익운동권이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선전투쟁의 일환으로 해방전후사 및 한국현대사를 대한민국 부정적 관점에서 서술한 도서들을 대량으로 쏟아내면서부터다(양동안a,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백년동안, 2016, 14쪽).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훼손하기 위해 ‘독립’이나 ‘건국’이란 용어의 사용을 기피하는 현상이 확산되었다. 좌익운동권의 선전선동에 넘어간 건전한 한국사 연구자들도 이런 현상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일부 정당과 광복회 등 독립운동 단체와 일부 지식인들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state making)이라고 주장하며 1948년 건국을 부정한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정부가 광복절 행사를 ‘건국 60주년’ 기념식과 겸하려 하자 민주당 등은 이를 강력 비판하며 효창공원 백범기념관에서 별도의 광복절 행사를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강기갑 등 74명의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대표들은 정부의 ‘건국 60주년’ 경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면서 헌법재판소에 위헌(違憲) 제청(提請)을 했다. 그들은 상해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그 독립이 승인된 국가였다”면서 1948년 건국을 인정한다면 그 동안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으로 믿어온 독립운동가들과 국민의 애국심에 큰 상처를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8년 11월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과 일부 시민단체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재판부 전원 일치로 기각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실종되면서 한국은 정부수립일은 있어도 건국일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 결과 67.1%의 국민이 건국일이 언제인지 모르며, 63.9%의 국민이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건국일로 잘못 알고 있는 기현상에 직면해 있다.

[표3] 건국절 관련 논란 일지
 
▲2006년 7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 만들자’ 칼럼 기고를 통해 공론화.
▲2007년 9월 정갑윤 한나라당 의원, 광복절을 건국절로 개칭하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국회에 제출.
▲2008년 8월, 한나라당을 제외한 대부분 야당인사들 이명박 정부의 건국절 기념행사 불참.
▲2008년 8월 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 사업회 등 55개 단체와 야당의원 74명, 대한민국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와 이 위원회가 준비하고 있는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 대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고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2008년 9월 12일 정갑윤 의원,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 철회.
-2008년 11월 헌법재판소,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과 일부 시민단체들이 제기한 헌법소원 재판부 전원 일치로 기각.

II. 1919년 건국설 제기하는 사람들의 논리

2016년 8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연설했다. 이때 당시 야당(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건국절 제정 움직임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해 8월 12일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 71주년을 맞아 애국지사들과 독립유공자들을 초청하여 위로연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광복군 출신의 김용관 씨가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출범했다고 이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의 주장이 있는데, 이는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의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고 건국절의 반역사성과 부당성을 역설했다.
한시준 교수(단국대 사학과)는 이영훈 교수(서울대)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설을 비판하고 1919년 건국설을 주장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한시준, 「대한민국 ‘건국 60년’, 그 역사적 모순과 왜곡」, 한국근현대사학회,『한국근현대사연구』46, 2008년 9월, 236~255쪽).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여기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주권에 기초하여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되었고, 이때는 국민․주권․영토라는 요건을 갖출 수 없었기에, 말 그대로 임시로 수립한 정부였다. 임시정부는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되었다. 이로써 군주주권과 전제군주제로 이어온 한민족의 역사가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로 대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해방 때까지 정부 조직을 유지 운영하면서 민주공화제를 정착․발전시켰고, 1948년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고 주장한다. 즉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에 새로 건국한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이를 재건한 것이라는 논리다.

1948년 건국 주장이 역사 왜곡?

한시준 교수는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1948년을 건국으로 인정할 경우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역사적 모순과 함께 역사를 왜곡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①임시정부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정하여 결과적으로 임시정부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는 결과가 된다.
임시정부는 1919년에 수립되어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존재한 우리의 역사다. 1919년과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국호도 같고, 국민 주권과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것도 같고, 연호도 같고, 대통령도 이승만이란 같은 인물이었다.
②독립운동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역사 왜곡이다.
1948년 국민주권의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당시 정부 수립을 주도한 인사들의 독창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1919년에 국민주권의 민주공화제 정부로 임시정부를 수립 하고, 임시정부가 27년여 동안 이를 정착 발전시켜온 역사 경험이 있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일제와 맞서 싸운 것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역사가 변화하고 발전한 모습들이 적지 않다.
③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세력의 의도를 왜곡하고 있다. 정부 수립 당사자들도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후대들이 ‘건국’이라고 주장한다.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수립할 때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일이 없고,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했다. 제헌국회 임시의장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도 정부를 수립하면서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정부를 수립코자 했고, 연호도 1919년부터 기산(起算)하여 임시정부 사용한 ‘대한민국’을 그대로 사용했다.
④대한민국 헌법과 모순된다.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재건한 것,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헌법 내용과 배치된다.
⑤일반적인 역사의식이나 상식에도 어긋나는 모순이다.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등이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으로부터 그 교명으로 설립인가 를 받았지만, 개교의 연원을 거기에 두지 않는다. 고려대는 1905년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문학교에, 연세대는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광혜원에, 이화여대는 1886년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에서 연원을 찾는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당해 5년 동안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에 복간하지만, 이들 역시 창간일을 1920년에 두고 있다. 이것이 일반인 역사인식이고 상식이다.
⑥미국인들은 미합중국을 건국한 1789년보다 영국에게 독립을 선언한 1776년 7월 4일을 더 중요시한다. 건국보다 독립을 더 중요시하는 미국인들의 역사의식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1948년 건국 주장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를 모욕?

윤대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도 한시준의 입장과 비슷하다. 윤대원은 건국절 주장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4월 11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정신은 물론, 일제 강점기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던 3·1운동마저 부정하는 몰역사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3·1절 기념과 3·1운동 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57, 2017년 2월, 53~84쪽).

그는 또 건국절 주장은 한일협정 협상과정에서 일본이 주장했던 ‘한일병합 합법론’과 이에 근거한 ‘한국의 분리독립론’과 맥을 같이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한일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은 일본이 한국의 분리 독립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립된 신생독립국”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일본의 허락으로 독립된 신생독립국이 되고, 1948년 8월 15일은 이 신생독립국의 건국일이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건국절 주장은 한일병합은 합법이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은 모두 불법이며, 독립운동가는 불법을 저지른 불령선인이라는 현 일본 우익의 주장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보는 견해가 일제 시기 임시정부의 존재와 독립운동사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사관이라는 주장은 의외로 많다. 박성수가 그 대표적 학자다. 그는 “29년 동안 피로 물든 태극기를 가지고 와 정부를 세웠는데, 마치 먼지도 안 묻은 태극기를 들고 와 정부를 세운 것처럼 역사를 기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박성수는 1919년 9월 16일은 그해 3월 17일 수립된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4월 23일 수립된 한성정부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면서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강탈한 주권을 재탈환한 날이며, 이날이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라고 주장했다(박성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건국」, ‘대한민국 건국 시점과 임시정부 성격에 관한 재조명: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회의, 2008년 11월 5일). 
최혜성(백범사상연구소 부소장)은 만약 8월 15일이 건국일로 제정된다면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국된 신생국임을 선언하는 꼴이며, 그래서 단군 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100년도 안 되는 신생독립국가가 되는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3·1 독립선언으로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했는데, 이는 한국인의 자주독립의사를 표출한 것으로 국가성립의 요건이 된다고 주장했다. 건국절 제정론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대해 폄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최혜성, 「과연 우리나라에 건국절이 필요한가?」, 『철학과 현실』, 2017년 3월, 268~292쪽).
지수걸(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은 대한민국이 언제 건국되었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어떤 국가로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혹은 민족공동체의 생존, 혹은 민족공동체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진전시키기 위해 현실의 국가나 분단체제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더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1948년 8월 15일은 보는 입장에 따라 건국절, 혹은 분단절이나 통일절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역사인식의 시대적 제약성’ 때문에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그 어떤 날’일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입장이나 해석을 선택하고 지지하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지수걸, 「건국절 논쟁의 지형 바꾸기」, 『내일을 여는 역사』64, 2016년 9월, 15~25쪽).
한시준의 주장 이후 1919년 건국설은 봇물 터지듯 학계와 언론을 풍미했고, 그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도 대한민국 건국 기점을 둘러싸고 개천설, 대한제국설 등 황당무계한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III.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

양동안은 우리나라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이설이 존재하는 것은 국가가 무엇인지, 건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만 알아도 정리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비판한다(양동안b, 「대한민국의 기원」, 『현대사광장』제2호(2013),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2~23쪽).

흥미로운 사실은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김구 등 김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역 가운데 어느 누구도 1919년이 건국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임시정부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도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지 않았다.
1919년 건국설에 대한 비판에 앞서 국제사회에서 어떤 정치적 결사가 국가로 대우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 무엇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대우받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을 설명하는 유용한 준거는 ‘국가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몬테비데오 협약(Montevideo Convention)’ 제1조다.
이 협약 제1조는 국제법의 인격체로서의 국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구비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a)상주하는 인구(permanent population) : 영토에 지속적으로 정주하는 인구.
(b)명확한 영토(a defined territory) : 외부의 개인이나 집단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인식을 가질 정도로 수비되는 영토.
(c)정부(government) : 영토와 그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에 대해 실효적 통제를 할 수 있는(공적 질서를 강제하는) 정부.
(d)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capacity to enter into relations with the other states) : 대외적 독립성과 자주외교권, 즉 주권(양동안a, 앞의 책, 18~19쪽).

건국절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려면 국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건국, 곧 국가의 건립이란 상주하는 인구, 명확한 영토, 정부, 주권 등 국가 구성 필수 요소를 갖춘 정치결사가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거의 모든 국가의 건국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영토와 인구를 갖춘 정부가 국가보다 앞서 나타나고, 그 정부가 주권을 확보하여 건국이 이루어진다.
건국은 국가 구성 필수요소들을 갖추어가는 일련의 과정의 완성이다. 건국일이란 위에서 설명한 국가 구성의 네 가지 필수 요소들이 완전히 갖추어진 날, 즉 국가구성의 필수 요소들을 완비한 정치결사가 출현하는 날이 건국일이다(양동안a, 앞의 책, 20쪽).

우리 민족의 국가 건립 행위는 1919년의 3·1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의 여파로 국내외에서 한성임시정부, 노령(러시아)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되었고, 1919년 9월 11일 3개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하여 민족국가 건립 노력이 현실화되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총판 안창호가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출범 직후부터 해체론에 시달린 임시정부

원래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란 일정 영토에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거나 실효적 통치를 하고는 있으나, 자기들이 천명한 체제의 원리에 부합한 절차에 따라 정식정부가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잠정적으로 통치 책임을 담당하는 결사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전쟁이나 혁명 등으로 정식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잠정적으로 통치하는 정부, 예를 들어 4․19 이후 허정이 이끈 과도정부를 떠올리면 된다.
자국(自國) 내에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토를 보유하지 못한 채 국외에서 조직된 정부는 일반적으로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라 부른다. 국제법은 임시정부의 승인 획득 요건으로서 일정한 영토 내에서의 ‘실효적 통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중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상적인 의미에서의 임시정부가 아니라 망명정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독립투사들이 상해 임시정부(후에 중경 임시정부)가 정식 국가의 정부가 아니면서도 26년 동안이나 ‘대한민국의 깃발을 들고 이를 독립투쟁의 보루로 삼아 악전고투한 것은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업적이다. 제헌헌법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실효성 있게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 형태를 갖추고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애국지사들의 단체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지속적으로 존폐론에 시달렸다(임정 존폐론 관련 부분은 윤대원a,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이제는 사실과 객관성을」, 『내일을 여는 역사』28, 2007년 6월, 110~120쪽 참조).
1921년 2월에 제기되어 1923년 1~6월 사이 개최되었다가 결렬된 국민대표회의는 내부 분열과 외교활동 실패 등으로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한 임정을 대신할 ‘통일적 강고한 정부조직과 독립운동의 최량 방침의 수립’을 목적으로 소집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정부개조를 주장하는 개조파, 새로운 정부수립을 주장하는 창조파, 임정의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임정옹호파의 대립으로 좌절되었다.
임정존폐론은 1920년대 중반 전개된 관내 민족유일당 운동 과정에서 또 다시 제기되었다. 1934년 이후 임정을 제외한 중국 관내 5개 독립운동 정당들이 조직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할 때도 임정해체론이 제기되었다. 1937년 민족주의 우파단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민족주의 좌파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통합을 모색할 때도 임정해체론이 불거졌다.
이처럼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운동이 전개될 때마다 임정해체론이 제기된 것은 무엇보다 임정이 ‘정부’로서, 또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기능과 역할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정은 또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분열 대립했다. 국무총리 비서로 근무했던 이강훈은 임시정부에 대해 “악착스런 지방열, 사상적 대립과 편견 때문에 일제에 대한 투쟁보다 동족끼리 싸우는 데 정력을 소모하는 비중이 훨씬 더 컸다”, “아직 한 치의 땅도 회복하지 못한 가운데 서로 시기, 질투, 중상, 사분오열하였다”, “임시정부라는 위대한 간판 밑에 애국지사의 탈을 쓴 무리들이 빗나간 정치극을 반복하였다”(『대한민국임시정부사』)고 혹평했다.

임시정부 당국자들, 임시정부를 건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임시정부의 독립투쟁 정신과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고 민족정기와 민족의 얼은 이어받아 마땅하지만, 국가로서의 실체가 없었던 것을 건국이었다고 우길 수는 없다. 국가란 지리적으로 경계가 설정된 영토 내에서 그 영토와 그 위에 거주하는 인구국민에 대해 지속성 있는 통치기구정부를 통해 주권적 지배를 행사하는 포괄적인 정치적 결사(結社)다. 때문에 국가성(國家性, stateness)을 가진 정치적 결사는 반드시 영토․국민․정부․주권 등 국가구성의 4대 필수요소를 갖춰야 한다.
중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구성의 4대 필수요소를 모두 결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라는 영토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보호하고 통제하며 대내외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가 못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역량 부족으로 민족국가 건립 노력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재중 임시정부는 해방된 민족의 영토에서 그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8·15 해방 후 진행된 새로운 국가건립과 법제적 연결성을 갖지 못했다. 때문에 그 정신을 이어받을 수는 있어도 법통을 이어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임시정부 당국자들도 임시정부 하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은 제6차 헌법까지 있었는데, 임시헌법 및 임시정부의 효력이 조국 광복 후 1년 내에 끝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는 국가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가 건국될 때까지만 활동하는 한시적인 건국 준비 조직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양동안a, 앞의 책, 57~58쪽).
임시정부 사료 가운데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인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사료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이다. 이 강령은 1941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향후 독립운동과 건국과정에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정책 대강을 천명한 것인데, 임시정부의 활동을 건국기(建國期) 이전의 나라를 되찾는 복국기(復國期)의 활동으로 규정했다(「대한민국 건국강령」, 한시준 편,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령집』, 국가보훈처, 1999, 75·81쪽, 제2장 복국, 제3장 건국 참조).

[표4] 건국강령의 주요내용

▲복국 제1기 :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일정히 하여 행사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워서 임시약법(約法)과 기타 법규를 반포하고 … 적에 대한 혈전을 정부로써 지속하는 시기.
▲복국 제2기 : 일부 국토를 회복하고 당․정․군(黨政軍)의 기구가 국내로 옮기어 국제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취득함에 충족한 조건이 성숙한 시기.
▲복국의 완성기 : 국토와 인민과 정치․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을 완전히 탈환하고 평등지위와 자유의지로써 각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시기.
▲건국 제1기 : 적의 통치기구를 완전히 박멸하고 국토를 완전 화복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 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며 선거와 입법과 임관과 군사와 외교와 결제 등에 관한 국가의 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하는 시기.
▲건국 제2기 :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의 전수가 고급교육의 면비수학이 완성되고, 보통선거제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는 시기.
▲건국 완성기 : 건국에 관한 모든 기초적 시설, 즉 군사․교육․행정․생산․위생․경찰․농․공․상․외교 등 방면의 건설기구와 성적이 예정계획의 과업이 성취되는 시기.

건국강령의 설명에 의하면 임시정부가 활동하던 당시의 독립운동 단계는 복국 제1기에 해당하고, 건국은 미래의 과제였다. 이 논리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건국된 국가’가 아니라 건국 전 단계인 복국단계에서 활동하는 복국운동 결사라는 논리적 귀결이 나타난다.
임시정부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중은 승인을 거부했다. 국제법상 임시정부로 승인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어느 나라도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으며,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환국할 때 임시정부 자격을 포기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물론, 남한을 점령한 미군도 임시정부를 실질적인 임시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 후 남북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개최된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서나 기타 어떤 국제회의에서도 상해임시정부의 대표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표권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임정 요인들, “건국 시기로 들어가는 과도적 단계”

재중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더라도 1945년에 한반도를 점령한 미국과 소련, 적어도 미국만이라도 재중(在中) 임시정부를 한반도의 임시정부로 승인했다면 대한민국의 국가건립 과정은 임시정부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소(美蘇)는 재중 임시정부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민족의 독립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노력해온 임시정부는 종식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건립은 법제상으로 임시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즉 임시정부와는 무관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국제법상 임시정부로 승인받지 못한 결사를 결성한 행위를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황당한 궤변이다.
건국과 관련한 임정 요인들의 입장은 단순명료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1945년 9월 3일 발표한 ‘국내외 동포에 고함’이란 성명에서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단계” “복국 임무를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계단”이라고 규정했다.
임정 지도자들은 개인 자격으로 환국 후 전개한 자신들의 활동을 “건국활동”이라고 정의했다. 임정 주석 김구는 1947년 서울 원효로에 국가 건립 활동에 참여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건국실천원 양성소’를 설립했다. 이 명칭은 김구 주석이 1947년 현재 건국을 실천중인 사업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임정 요인을 비롯한 해방공간의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건국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1919년이 건국이라고 추론할 만한 사료나 팩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기원이라는 점은 인정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점도 대한민국의 통치이념이 임시정부의 통치이념과 상통하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인정한다 해도 대한민국 건국일을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일이라는 주장은 수용될 수 없다.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인정할 경우 상해 임정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준비기구가 된다. 건국준비기구의 수립은 국가 건립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건국준비기구의 수립은 국가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을 하나도 갖추지 않아도 수립될 수 있지만, 건국은 국가 구성 필수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양동안a, 앞의 책, 66쪽).

상해 임정은 대한민국을 건국하려는 준비 기구였지만, 1945년 11월 환국할 때 임시정부 자격을 포기했다. 때문에 건국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해산된 사례에 해당한다. 따라서 건국준비기구 구성을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다. 1948년 8월 15일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이렇게 건국된 사실을 유엔총회가 승인까지 했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은 어떤 논리로도 뒤집을 수 없다.
1930~40년대에 임시정부는 미․중에 여러 차례에 걸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했으나 자격요건 미달로 실패했다. 이러한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고 주장할 경우 국제사회의 어느 누가 그것을 인정해줄 것인가.
양동안 교수는 국제법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건국연도를 1919년으로 정하자는 것은 병역기피를 위해 개인의 생년월일을 조작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범죄적이고 추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양동안a, 앞의 책, 70쪽).

이승만은 임정 계승 주장, 김구는 임정 계승 반대

이승만은 5․10 총선에 의해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전 민족의 대표적 정부라는 사실을 수없이 주장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주장은 그 흐름을 추적해 올라가면 이승만의 논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된 직후 인사말을 통해 “이 민국은 기미년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의 민국의 부활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여”라고 연설했다.
이 문제와 관련, 윤대원은 이승만 역시 임정 법통론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승만의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된 직후 인사말을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은 임시의정원이나 상해 임정이 아닌, 국민대회와 한성정부의 계승이자 부활을 주장했다는 것이다(윤대원, 「임시정부 법통론의 역사적 연원과 의미」, 『역사교육』110, 2009년 6월, 103~135쪽). 
한성정부가 법통의 근거로 주장되는 중요한 이유는 한성정부가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모여 선언한 정부라는 점에 있었다. 이 부분도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성정부의 성립 근거인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와, 그해 4월 23일 열린 국민대회 모두 유산되었다. 4월 2일의 13도 대표자회의도 실제 참여한 주체는 기호지방의 일부 기독교 인사들뿐이었고, 4월 23일의 국민대회도 대회 개최를 위임받은 일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가 유산되었다(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이제는 사실과 객관성을」, 『내일을 여는 역사』28, 2007년 6월, 110~120쪽).

이 논리에 따르면 3·1운동→한성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법통론은 사실관계에 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음이 자명하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해방정국에서 이승만과는 정반대로 대한민국 제헌의회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지 않았다고 지속적으로 밝혔다. 1948년 6월 7일 기자회견에서 김구는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본다”고 발언하여 이승만의 임정 계승론을 정면에서 반박했다.
김구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면서 대한민국 정당성을 부정했다. 5․10 선거에 반대했던 많은 정치인들이 대한민국 건국 후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돌아선 후에도 김구는 1949년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구·김규식, 1948년 1월 중순까지 건국 찬성

김구와 김규식 등 임정 계는 1948년 1월 중순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김구는 1947년 12월 1일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 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1월 25일에도 김구는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 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고 총선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다음날인 1월 26일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두 나라 군대가 철수한 후 총선거를 해서 통일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면서 제동을 걸고 나섰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규식은 부주석이었다. 두 사람의 반대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함으로써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북앤피플, 2015, 168~169쪽).
첫째,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던 임정이 단독선거에 반대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둘째, 두 김 씨는 우익진영 인물이었으므로 그들의 반대는 우익진영을 약화시키는 한편 단선 반대를 주장하는 남로당을 포함한 좌익세력의 주장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보태주었다.
셋째, 두 김 씨의 주장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영향을 주어 5‧10 선거가 취소될 위기가 조성됐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한의 우익 지도자들마저 단독선거에 합의하지 못하자 선거를 연기하고 유엔본부로 돌아가 새로운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결국 유엔 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유엔위원단이 활동 가능한 남한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을 31대 2, 기권 11로 가결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유엔 승인외교를 벌이는 와중에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그해 7월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한 후 유엔총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대한민국 임정 승인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신문」, 1948년 8월 13일.
 정식 정부 수립을 코앞에 두고 임정 승인을 유엔에 요청하겠다는 것은 곧 정부 수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김구의 행동은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 위에 수립된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일제시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립된 임정의 법통성을 계승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심지연, 「대한민국의 광복과 임시정부의 법통성」, 『정치외교사논총』14, 1996, 159쪽).

건국 반대세력들은 8월 1일, 부주석 김규식을 수석대표로 하는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할 대표단을 선정했다. 분단정권을 승인하지 말고 상하이 임정을 승인해주도록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서영해는 선발대로 파리에 가 있었다. 이 와중에 김규식이 수석대표직 수락을 거부하는 바람에 대표단 파견은 무산됐다.
10월 13일에는 4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외군 철퇴 안을 내놓았고, 11월 3일에는 김구가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이를 유엔사무총장에게 전달했다(이주천, 「건국초기 미국의 대한정책과 이승만의 대응책(1948~1950)」, 『서양사학연구』(19), 2008, 94쪽).
하지만 아직까지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들 가운데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하지 않았다는 김구 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했는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했느냐의 여부는 학문적으로, 객관적으로 진지하고 심도 깊게 따져보지 않은 주제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통치이념을 계승했는지의 여부는 대한민국 건국헌법 내용에 임시정부의 통치이념이 얼마나 계승되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 양동안 교수는 대한민국은 통치이념 면에서는 임시정부를 거의 완전하게 계승했다고 분석했다. 다만,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가운데 국유화와 사회복지 부분을 충분히 계승하지 못했는데, 자유민주주의 체제 및 경제잉여가 빈약한 국민경제의 현실조건에서 이를 완전하게 수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양동안a, 앞의 책, 86~87쪽).

그렇다면 인적 구성 면에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어느 정도나 계승했을까?
임시정부의 지휘부를 구성했던 대통령․국무령, 국무위원회의 주석 및 부주석, 국무위원과 행정부장, 의정원 의원, 광복군 지휘관들 중 8․15 해방 후 남한에서 활동한 요인은 총 28명이다.
임정 요인 28명 중 사망자, 북한 정권 참여자를 제외한 22명 중 대한민국 건국에 강경하게 반대한 인사는 김구․조완구․엄항섭 등 3명, 대한민국 건국에 모호한 태도를 취한 인사는 황학수 1명이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거나 기여한 임정 요인은 이승만․이시영․신익희․이청천․이범석․김상덕․연병호․김붕준․유동열․윤기섭 등 10명으로, 22명 중 45%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제헌의원 선거, 제2대 총선(1950. 5.30)에 참여한 임시정부 요인은 조소앙․조시원․유림․장건상․김성숙 등 5명이다. 대한민국 건국에 불참했고, 5․30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에 충성을 선언한 임시정부 요인은 김규식․최동호․조경한 등 3명이다.
이러한 분석틀로 볼 때 22명의 임정 요인들 가운데 대한민국에 협의로 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인사는 8명(36%), 대한민국 건국에 강경하게 반대함으로써 대한민국 군국에 계승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는 임정 요인은 3명(14%)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인적 측면에서 볼 때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대한민국 건국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임정계승론과 관련하여 최근에는 대한민국 건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점을 과도하게 확대해석하여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곧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어 새로운 논쟁이 불거졌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한시준 교수는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주장은 임시정부의 가치 및 독립운동의 역사를 폄훼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지를 펴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임정 계승론을 주장한 이승만을 비판하고, 임정 계승론을 부정한 김구를 찬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찬양하는 김구는 1949년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이 임정을 계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김구의 죽음으로부터 70년이 흐른 오늘날, 김구 추종자들은 입장을 뒤집고 대한민국이 임정을 계승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임정 수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건국헌법의 전문(前文)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승만 대통령의 ‘민국(民國)’ 연호 사용을 근거로 하여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표9] 대한민국 건국헌법 전문(前文)의 문제 조항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그들은 건국헌법 전문을 예로 들어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표현이야말로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을 뜻하는 증거이며,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부분은 1948년에 대한민국이 새로 건국되지 않고 이미 존재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건되었음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된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을 한다.
건국헌법의 문제 조항은 건국헌법 제정 전에 발표된 국회의장 이승만 취임사의 건국 관련 내용과, 건국헌법 제정 후에 발표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관련 발언, 특히 3․1운동 기념사에 들어 있는 건국 관련 내용에 비추어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도출된다(양동안a, 앞의 책, 50쪽).

①1948년 8월 15일 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국가가 없었다.
②대한민국은 정치적․법률적으로 1948년 8월 15일에 새로 건국되었다.
③대한민국의 건국은 이념 및 염원의 면에서는 3․1운동에서 선포했으나 임시정부만 수립하고 실패했던 대한민국 건립의 부활이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건국헌법 전문의 문제 구절을 해석하면 ‘재건’은 국가를 건설하려다 실패했던 것을 다시 건설하는 것으로 봐야 올바른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1919년부터 1945년 11월까지 중국에 존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민국 연호를 언급한 연설은 1948년 5월 국회의장 취임사, 1948년 9월 국회가 단기(檀紀) 연호를 사용하기로 연호법을 통과시키자 이를 수용하여 공포하면서 발표한 이승만 담화 두 가지다.
이 두 연설의 근본 취지는 대한민국이 1919년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며, 그것의 부활이므로 대한민국의 연호를 1919년부터 기산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1919년을 기산 연도로 하는 민국 연호를 사용한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11일 연호법을 제정하여 단기 연호 사용을 결의했다. 이승만의 민국 연호 사용을 제헌의회가 금지시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민국 연호 사용을 1919년 대한민국 건국 주장의 논거로 삼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이 대통령의 설명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견강부회하는 것이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이후 수많은 성명, 연설, 담화에서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새로 건국되었다고 강조했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냐 여부를 가름하는 데 있어 참고가 되는 신뢰도 높은 수많은 사료들과 팩트(fact)가 존재한다. 그런데 1919년 건국설 주장자들은 신뢰도 높은 사료들은 다 묻어버리고, 또 사료를 정독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건국헌법 전문의 문제 구절과 민국 연호를 자기들 주장의 논거로 삼아 이를 확대하고 있다.

영토․국민․정부․주권을 완비한 시기는 1948년 8월 15일

해방 직후 한반도의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우익․좌익․중간파 등 3개 진영이 경쟁하며 건국을 추진했다. 그런데 해방정국에서 남북한의 지도자들이 타협을 통해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때 한반도의 운명은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소련과 타협하려 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직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라”, 즉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 지령이 민족통일의 길을 모두 막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주권의 회복을 지연시킬 경우 부지하세월로 외국의 통치를 연장시켜야 했다.
더구나 북한에 이미 강력한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남한에서도 남로당까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마당에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비공산세력이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했다면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우익 진영의 국가건립 노력은 민의(民意)에 따른 정부 수립, 즉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에 집중되었다. 영토와 국민이 이미 확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하면 새로운 국가가 건립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남북한 전역에서 유엔 감시 하의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반도 통일정부를 수립하라고 결의했다. 소련과 북한 정권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북한에서 유엔 감시 하의 선거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의 독립정부를 구성하라고 결의했다.
이승만 세력은 유엔 결의에 부응하여 남한에서의 총선거 실시에 앞장섰다. 남북한의 좌익세력은 극렬한 게릴라 준동 등 폭력 활동을 전개하여 5·10 제헌의원 선거 저지 투쟁을 벌였다. 좌익들의 방해 책동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1948년 5월 10일의 선거는 성공적으로 실시되어 제헌의회가 수립되었다.
제헌의회는 새로운 국가 건립에 필요한 헌법을 제정했으며, 새로운 국가의 국호(國號)로 대한민국을 채택했다. 그리고 새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헌법에 따라 정부를 구성했다. 그 정부는 대한민국이 채택한 민주공화정의 주권자인 국민의 주권적 행위를 토대로 구성된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그날 밤 12시를 기해 미군정으로부터 통치권(즉 주권)을 인수했다. 이로써 국가 구성의 4개 필수요소인 영토․국민․정부․주권을 완비한 대한민국이란 독립국가가 탄생하여 건국과정이 완료되었다.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자유선거를 통해 건국되었고 유엔에 의해 합법정부로 승인받았지만 북한의 선거는 공산당 단일후보에 대해 흑백함 투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도 없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는 주장도 지나친 억지다.
국민정서나 민족정기의 이상으로 볼 때 친일파 청산이 미진했던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대한민국은 5․10선거에서 친일인사를 배제하여 정부와 국회의 고위직에는 한 명도 없었지만 오히려 북한 정권에는 친일인사가 있었다.     
이승만과 건국 세력은 해방과 분단의 혼란, 공산세력의 폭동과 남침이라는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국가건설과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국가 안보와 치안의 확보에 전력투구해야 했다. 실질적으로 근대화 혁명 기간 중에 있었던 이런 특수 상황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일부를 당분간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건국 세력의 공과(功過)의 양면을 공평하게 보지 않고 건국세력을 ‘악(惡)의 세력’으로, 민주화 세력을 ‘선(善)의 세력’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김세중,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갈등과 상호의존」, 『시대정신』, 2009년 겨울호, 77쪽). 
일부에서는 1948년 8월 15일에 건국 선포 행사나 기록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이날을 건국기념일이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건은 그것이 발생한 날 반드시 기념되거나 선포된다고 믿는 오류에 빠져 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핵심 사항은 정부수립이었다. 영토와 국민은 이미 확보되었고, 주권도 정부수립일에 인수하기로 미군정과 사전 양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건국 선포가 명시적으로 없었다고 해도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4개 필수요소가 확보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주권을 인수한 날이 1948년 8월 15일이 명확하고 분명하므로, 이 날이 대한민국 건국일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IV. 대한민국 건국일 논란의 본질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세종로 네거리에 세워진 아치에 ‘경축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영어로 ‘Long Live! The Republic of Korea’라고 쓰여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곧 대한민국 수립, 즉 건국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제사회와의 협약이었다. 연합국 간에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고, 유엔총회의 결의를 거쳐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이 국회를 결성하고(1948년 5월 31일), 그 국회에서 헌법이 제정 선포되었으며(1948년 7월 17일), 유엔이 규정한 ‘국민적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기념식(1948년 8월 15일)으로 거행된 것이다.
즉 유엔총회의 ‘한국 독립을 위한 계획’에 근거하여 유엔의 감시 하에 주민 총선거, 국회 결성, 헌법 제정, 정부 수립이란 일련의 과업이 차례로 수행되고 마무리되는 전체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로부터 일련의 과정을 보고 받은 유엔총회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 결의 제195호 제2항에 의해 유엔의 승인을 받았다.
1949년 8월 15일은 제1회 독립기념일이었다. 당일 정부는 정부가 주도하는 독립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이 이날 독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뜻은 그 1년 전에 대한민국이 건국(독립)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기념했음을 의미한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민국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어려운 첫해 동안에 많은 곤란과 장애 중에서도 민국의 안전과 기초 확립에 많은 진전이 있은 것은 사실입니다”라면서 대한민국이 1년 전에 독립, 즉 건국되었음을 선포했다.
임정 지도부의 한 사람이며,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이 이끄는 사회당도 같은 날 “8․15 이날은 우리 만족 해방 4주년 기념이요, 우리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거의 모든 언론들도 이날 대한민국이 1년 전에 독립, 즉 건국했음을 보도했다.
그리고 1948년부터 10년, 20년, 30년 등 매 10년 단위로 건국 10주년, 건국 20주년, 건국 30주년 등 특집보도를 실었다. 이러한 관행은 건국 50주년인 1998년까지 유지되었다. 정부와 국민들도 1948년에 독립, 즉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수용해 왔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국제 자료, 주요 국가들의 외국 소개 자료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일(the date of state formation)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1948년 8월 15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모든 국민이 인지하고 인정해 왔으며, 세계 각국이 모두 인정한 대한민국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이 좌익혁명세력의 반(反)대한민국적 선전투쟁 및 광복회와 그 주변에 기생하는 한국사 연구자들의 왜곡된 민족주의 감정으로 인한 궤변으로 인해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건국일 vs 분단정권 수립일

좌파들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8월 15일을 분단정권 수립일이라고 부른다. 민족사관을 맹신하고 통일을 지상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로서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분단의 책임을 건국 지도자들에게 지우며 비난한다.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라고 되어 있었다. 1987년 6·29 선언과 민주화 투쟁의 여파로 그때까지 존재했던 5공 헌법을 폐지하고 10월에 제9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그 이전까지의 헌법 전문(前文) 내용을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임시정부 출신의 모 인사가 벌인 개인적 로비가 건국사에 무지한 정치세력을 설득하여 이루어낸 이때의 개정으로 인해 대한민국 건국사는 심각한 왜곡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인은 근대적 인간과 민족으로 바뀌었다. 국가나 자유와 독립의 정신으로 거듭났다. 1948년의 제헌헌법은 그것을 가리켜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이라고 했다.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장차 이루어질 독립에 대비하여 실업, 언론, 교육 등에서 근대문명의 실력을 양성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그에 따른 실력의 축적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성립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했던 민족 소생을 위한 물질적, 정신적 운동을 1987년의 개정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왜소화했다. 이로써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무릅쓰면서 근대적 인간으로 성장해 온, 대한민국 성립의 가장 소중한 문명적 기초가 소거되었다(이영훈, 「건국의 역사적 의의와 현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 자유경제원 e-지식 시리즈 15-32, 자유경제원).

대한민국 현대사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세력들의 주된 공격 목표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산업화 대통령 박정희다. 이 두 지도자의 재임 기간 중 세계사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대한민국의 모든 기초와 국가의 존속과 발전의 기반이 세워졌다. 이 두 지도자의 위상이 흔들리면 대한민국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김충남, 『대통령과 국가경영 2: 노무현과 이명박 리더십의 명암과 교훈』, 도서출판 오름, 2011, 32~33쪽).
그 중에서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거꾸러뜨려야 자신들의 목표가 달성된다.
때문에 이승만이 이룩한 ‘건국혁명’을 ‘분단국가 출범’ 혹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라고 매도하고, 이를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건국이라는 단어 자체를 우리 사회에서 지우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어떤 논리의 외피를 쓰고 있든 좌파들의 공격은 “이승만은 국토를 분단하고 독재를 한 인물이니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로 수렴된다.

대한민국 건국이 축복인가, 분단의 시작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세력과, 건국을 분단의 시작이라고 부정하고, 개인보다는 민족을 앞세워 역사를 통일 지향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통일지상주의 세력들과의 사이에 내전을 방불케 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좌파들에게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반(反)민중, 반(反)민족, 반(反)민주로 점철된 더러운 역사, 다시 써야 할 역사일 뿐이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대학교 1학년 학생도 알 수 있는 일이라며, 통치하고 있는 영토도, 통치 대상인 국민도, 국제적 승인도 없었는데 이것을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다른 의도란 대한민국은 미국이라는 외세의 힘에 의해 탄생한 반면, 임시정부는 외세의 간여 없이 자주적으로 탄생했다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안은 반미와 관련이 있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북한을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성립된 국가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결국 대한민국 전복을 위한 프로파간다일 수밖에 없다(노재봉 특별인터뷰, 「‘1919년 건국’ 주장은 전복을 위한 프로파간다」, 『월간조선』 2018년 8월호).
이와 관련, 노재봉 총리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대한민국은 외세에 의해 탄생했지만, 북한은 자주적으로 성립되었다는 식의 인식대로라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무엇이며, 대통령은 뭐가 되는가? …그런 논리대로라면 북의 체제에 남이 흡수되는 방향으로 통일이 되어야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1948년 건국을 부인하는 이들 중에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하는 좌파와 그 동조세력이 많다. 그들의 주장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수립되었다면 현재 평양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보안법과 관계없이 반역집단이 된다. 해방 직후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등 좌익세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하나의 독립운동단체 이상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그 법통성을 부인했다. 그들은 임정의 법통성을 부인하면서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더럽히는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선진화가 가능하다. 우리 국민들이 살고 있는 국가의 건국일이 언제인가는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대한민국의 건국절 제정과 ‘건국’에 대한 올바른 개념 정립은 그래서 중요하고 필요하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이 원고는 지난 2018년 8월 14일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이승만학당 주최 건국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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