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에서 박정희 시대를 지우려는 사람들의 주장이 점점 더 해괴한 논리로 진화하고 있다. 손호철 교수는 '한강의 기적' 박정희 덕분이 아니라 해방공간에서 농민투쟁으로 비롯된 농지개혁 덕분이며, 미국의 냉전 분단정책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박정희 덕분에 경제가 퇴보했으며, 박근혜 탄핵은 박정희 시대 청산의 마침표라는 주장까지 하고 나섰다.

 

우리 현대사에서 박정희 시대를 지우려는 사람들의 주장이 점점 더 해괴한 논리로 진화하고 있다. 손호철 교수는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덕분이 아니라 해방공간에서 농민투쟁으로 비롯된 농지개혁 덕분이며, 미국의 냉전 분단정책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박정희 덕분에 경제가 퇴보했으며, 박근혜 탄핵은 박정희 시대 청산의 마침표라는 주장까지 하고 나섰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박정희 지우기에 앞장선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누가 집권했어도 그보다는 잘 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소위 ‘진보적 학자’로 불리는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박근혜 탄핵을 몰고 온 광화문 일대의 촛불시위를 ‘11월 시민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시민들이 단순히 박근혜 퇴진을 넘어 헬조선 탈피 등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항쟁이 아니라 ‘시민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박근혜를 ‘최악의 대통령’으로,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천오백만 촛불이 상징하는 최고의 시민’이라고 자리매김했다. 아직까지는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된 나라이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그의 논조가 박정희 지우기에 이르면 매우 심각한 논리의 비약과 왜곡, 자가당착, 주관적 해석이 발견된다.
위의 책에서 손 교수는 열심히 박정희 깎아내리기, 박정희 지우기, 박정희 죽이기에 몰입한다.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민주주의를 짓밟고 영구집권을 했던 박정희가 비극이라면, 루이 보나파르트처럼 아버지의 명성에 힘입어 대통령에 오른 박근혜는 희극”이라는 식이다.
손 교수는 박근혜가 박정희 신화 덕에 대통령에 올랐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로부터 재벌과의 유착, 공작정치, 공권력의 사유화 등이 보여주듯 철저하게 아버지 박정희의 유신적 통치에 기반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박근혜 탄핵은 해방 70년사를 상징하는 박정희 신화, 박정희 체제의 탄핵이라는 것이다.
손호철 교수가 말하는 박근혜 게이트와 '촛불혁명'은 해방 70년사와 민주화 30년, 신자유주의 20년을 비판하기 위한 공격 무기다. 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극우반공체제, 국가주도형 경제, 정치적 독재의 얼룩진 70년으로 간단히 격하된다.
손호철 교수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 좌파·좌익세력들이 주장하는 ‘박정희 신화 무너뜨리기’의 핵심 본질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리더십 덕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누가 그 시대를 이끌었어도 한강의 기적은 달성되었을 것이며, 박정희가 장기집권하여 독재 철권정치를 자행했기에 이 정도 발전밖에 못했고, 숱한 사회적 모순과 왜곡, 헬조선과 금수저 흙수저 계급으로 얼룩져 있다는 식의 주장이다.
손호철 교수는 한국에서 경제발전, 즉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는 농지개혁, 아니 지주계급의 몰락 내지 부재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에 나와 있는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경제발전은 산업화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를 위해서는 산업자본가 계급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장애는 선진국과 결탁한 지주계급이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지주가 부재했고, 한국과 대만은 성공적인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을 분쇄함으로써 다른 신생국들과 달리 산업자본가들이 주도권을 쥘 수 있었고, 그 결과가 산업화다.”

‘한강의 기적’이 냉전·분단 덕이라고?

따라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박정희의 리더십 덕분이 아니라 농지개혁 덕분이란다. 국내의 좌파·좌익세력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승만의 유상물수-유상분배 농지개혁은 크게 잘못된 정책이라고 물고 뜯고 씹어 왔다.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을 도입한 북한 토지개혁이 진정한 개혁이었다는 것이다. 손호철 교수는 이처럼 막가파 식 좌파·좌익세력과는 결이 다르게 농지개혁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 핵심 요인이라고 쿨하게 인정한다. 그런데 그 농지개혁의 주인공은 이승만이 아니라 해방공간에서 농지개혁을 가능케 한 농민투쟁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잠시 후 따져보겠다.
손호철 교수가 말하는 한강의 기적의 진짜 이유 두 번째는 냉전 및 분단이다. 즉 미국이 소련,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정도의 자율적 성장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경제력을 갖는 것이 필요하여 라틴아메리카 등과 달리 동아시아에는 자율적 발전을 허용했고, 그 때문에 다른 지역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고도성장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한국과 대만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경쟁의 쇼 케이스가 된 만큼 미국으로부터 다른 나라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특혜를 받았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다는 것이 손호철 교수의 설명이다.
따라서 박정희 신화는 없으며, 경제발전은 박정희 리더십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라는 독재자, 경제운영 실패자의 18년 깽판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자신의 저서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에서 주장한다. 심지어 박정희 모델은 스탈린주의 모델을 모방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손호철 교수의 분석 및 주장에 의하면 ‘한강의 기적’의 진짜 이유는 해방정국의 농민투쟁으로 인한 농지개혁, 그리고 냉전과 분단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지원 덕분이다. 박정희가 고도성장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극우적 언론이나 파시즘 학자의 망언이며, 박정희 모델을 지지하는 것은 사실상 스탈린 모델을 지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지나가던 개가 웃다 뒤로 자빠져 졸도할 일이다. 우선 농지개혁의 본질부터 따져보자. 이승만 대통령이 지주 계급이 중심이 된 한민당의 지연 및 방해 책동을 물리치고 시행령이 준비되기도 전에 거의 강압적으로 농지분배 실시를 단행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란 사실은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1948년 11월 22일 농림부의 농지개혁법 시안이 발표됐고, 이 안이 1949년 국무회의에 상정되어 2월 4일 통과됐다. 법안은 3월 10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일부 조항에 대한 이의 때문에 개정안이 마련되어 1950년 3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의 서명으로 법률로 확정됐다(로버트 올리버, 『신화에 가려진 인물 이승만』, 건국대학교 출판부, 303쪽).
농지개혁법이 최종 확정된 1950년 3월 10일 이후, 동법 시행령(3월 25일)과 시행규칙(4월 28일) 및 농지분배 점수제 규정(6월 23일)이 제정됐다. 당시 국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한민당은 관련법 논의 과정에서 계속 시간을 끌었다. 농지개혁법이 예정보다 속도를 내지 못하는 원인이 한민당의 지연술책 때문임을 간파한 이승만은 농림부에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 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농지개혁 시행은 이승만 덕분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농림부는 농지개혁법 확정 이전인 1950년 1월에 ‘매수농지 평가요령 제정에 관한 건’(1950년 1월 21일)에 근거해 지가(地價)조사에 착수했고, ‘농지소표(農地小表) 작성에 관한 건’(1950년 2월 3일)에 의해 매수농지의 지번과 지목, 지적, 소유자, 소작인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농가별 분배농지 일람표 정리에 관한 건’(1950년 2월 3일)에 의해 일람표를 열흘 간 공람시켜 이의가 없으면 소유권이 확정되도록 했다.
이 절차를 3월 15일부터 3월 24일까지 완료토록 시달했고, 4월 10일부터 농지분배 통지서가 발급되어 1950년 4월 15일에 농지개혁은 실질적으로 완료됐다(김성호, 「땅으로 본 한국 현대사」, 월간조선 2000년 8월호). 이승만의 정치 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도 김성호와 마찬가지로 6·25 남침 두 달 전인 4월 15일, 약 68만 4000정보의 소작 농지가 123만 6558명의 소작농에게 매각될 준비를 마쳤으며, 매도가는 해당 토지의 연간 소출의 3분의 1 가격으로 소작료와 같았다고 한다. 정부는 농지 소유주에게 평균 소출금액의 150%에 해당하는 매각증서를 발행했다(로버트 올리버, 앞의 책, 303~04쪽).
농지개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과정을 복기해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시행법령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집행됐기 때문에, 엄격히 따지면 대통령의 월권행위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월권행위가 없었다면 농지개혁은 6·25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한다. 농지개혁은 해방정국에서 농민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승만의 초법적이고 월권적인 드라이브 덕분에 성공한 것이다.
6·25 남침 이전에 이미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농민들이 ‘내 소유의 땅’을 갖게 된 덕분에  남한 각 지역에서 인민혁명을 기대했던 공산주의자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만약 6·25 전에 농지개혁이 시행되지 못했다면 공산군 점령치하의 대다수 남한 농민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한반도가 적화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당시 농지개혁을 연구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은 안중에도 없이 손호철 교수는 민중민주주의 관점에서 농민들의 투쟁이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이라고 자리매김 한다. 손 교수의 주장에서 또 한 가지 따져봐야 할 부분은 해방정국에서 농민들이 주장했던 농지분배 방식이다. 그들은 북한 방식의 급진적인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다. 일부 좌파·좌익계열 학자들과 운동권 철부지들은 북한식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농지개혁만이 진정한 개혁이라 주장했고,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추진된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실패한 정책"이라고 깔아뭉갰다.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은 지주들에게 강제로 빼앗은 농지를 땅 없는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지만,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은 채 경작권만을 주었다. 그 대가로 고율의 현물세를 농민들로부터 갈취해 갔다. 결국 북한의 모든 농지는 완벽하게 국유화됐고, 지주의 땅을 빼앗아 공산당이 지주로 들어앉은 꼴이 됐다. 농민들은 고율의 현물세를 새로운 지주인 공산당에게 소작료로 납부해야 하는 기구한 형태의 지주-소작 관계에 빠져든 것이 북한판 농지개혁의 본질이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전 농민이 국가의 농노가 된 집단농장화를 가속화시켰다. 오늘날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은 집단농장의 저열한 생산성에서 그 원인이 발견된다. 손호철 교수 주장대로 해방정국의 농민들 주장대로 급진적인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단행했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것인가. 그 사실을 알면서 이런 주장을 한 것이라면 혹세무민이고, 이런 사실을 모르고 주장한 것이라면 무지의 극치다.

김대중, “농업 위주, 퍠쇄경제, 자급자족체제, 공장 건설 반대” 주장

이제 박정희 신화는 거짓이며, 경제발전은 박정희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라는 독재자의 경제실패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손호철 교수의 주장을 검증할 차례다. ‘한강의 기적’이 박정희의 리더십 덕분이 아니라 냉전과 분단 덕분이라는 주장에는 어느 누가 집권했어도 박정희보다 더 잘했을 것이라는 논리가 잠복해 있다. 과연 그럴까?
1971년 4월 실시된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대결했다.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가 주도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 성장 위주의 개발 정책을 비판하고 대중경제론을 제시했다. 박현채 교수의 도움을 받아 체계화 된 대중경제론은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개발정책과는 비전이나 철학이 180도로 다른 극단적인 경제정책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해외 수출시장이 아니라 국내시장을 무대로, 대기업이 아니라 농업과 중소기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농민과 서민, 자영업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자는 필요악이며, 개방정책을 지양하고 상대적인 자급자족체제를 주장했다. 정유·화학섬유·자동차조립·전자공업 등 외자에 기초한 대기업 중심의 공업육성은 사치적 낭비적 공업이니 더 이상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논지를 펼쳤다. 특히 노동조합의 직접적인 경영참여를 위한 노자(勞資)공동위원회 구상은 ‘노조 천국’의 암시나 다름없는 내용으로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당시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은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고 착취적인 외국 자본의 유입을 막아 대외의존도를 낮춰서 독자적 경제를 구축한다는 후진국 발전 이념을 따르고 있었다. 후진국 경제발전론의 공통된 기조는 후진국은 전통적인 농업국이기 때문에 농업부터 먼저 발전시킨 다음 여기서 얻어지는 저축으로 공업화를 이룩하는 것이 합리적인 경제발전이 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후보의 주장처럼 내수 위주, 농업 우선, 중소기업 위주, 폐쇄적 자급자족 시스템, 대기업 중심의 공업 육성 반대, 노조의 경영 참여는 바로 북한이 채택했다가 폭망한 경제발전방식이다. 오늘날 북한의 경제와 살림살이 형편을 보면 “어느 누가 국가 지도자가 되었더라도 박정희 정도의 성과는 충분히 거둘 수 있었을 것”이란 주장은 설득 근거가 대단히 빈약한, 역사적 사실과는 180도 다른 황당한 논지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①확고하고 안정적이며 비전 있는 리더십, ②잘 짜인 경제발전계획, ③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유능한 정부 관료집단, ④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확보가 요구된다(최중경, 『청개구리 성공신화』, 매일경제신문사, 2012, 14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후진국에서 풀 세트 중화학공업을 본격적으로 건설한 것은 한국이 세계 역사상 최초였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자면 국가 원수가 직접 나서서 상황파악과 분석을 해야 하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즉각 수정·보완·지원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이끌고, 중단 없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10년 이상의 세월과 10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설비와 고가의 장비가 투입되는 자본집약형 장치산업이 중화학공업이다. 선진국에서는 정치 사회적 안정을 비롯한 모든 인프라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만 한국은 위에서 열거한 거의 모든 조건들이 총체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을 획기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낳았다

박정희가 단 기간 내에 근대화, 중화학공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압축적 국가건설’(short-cut nation-building)이었다. 이를 위해 국가가 민간부문과 시장을 통제하고 이끄는 지도받는 자본주의, 즉 계도자본주의(guided capitalism), 혹은 발전국가체제를 지향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하는 미국식 자유방임적 경제운영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유사하게 정부가 시장과 민간부문에 개입하여 통제하고 선도하는 경제운영방식이었다. 정부가 계획을 수립하고, 한정된 자원을 전략적 부문에 우선적으로 투입함으로써 산출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손호철 교수나 좌파·좌익계열 학자들이 주장하는 개발독재, 스탈린 식 경제발전 모델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발전경제학자 앨리스 암스덴은 “한국이 채택했던 강력한 경제정책이 과연 민주적 정부 하에서도 가능했을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후진국의 경우 강력한 중앙권력은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며, 이것 없이는 공업화를 거의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앨리스 암스덴 지음·이근달 옮김, 『아시아의 다음 거인: 한국의 후발공업화』, 시사영어사, 1990, 20쪽).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으로 임기를 12년으로 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975년 6월이면 퇴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박정희가 3선 임기가 끝나 은퇴하여 안락한 노후생활을 즐겼다면 ‘대중경제론’을 주장하는 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농업 위주, 내수 위주, 자급자족형 폐쇄경제, 공장 건설 없는 노조 천국의 한국이 현실화 되었을 것이란 뜻이다.
이 나라의 정치 현실이 그 길로 나갔다면 오늘의 한국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손호철 교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이성적이고 학문적 판단을 해 주시기 바란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각 나라가 국민소득 4,000달러에서 7,000달러 사이에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었다고 분석한다. 즉, 참다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되려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산업적 기반과,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탄탄한 중상층의 형성, 그리고 국민들의 민주시민 의식이 필수적이란 뜻이다.
한국에서 로버트 달이 지적한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가능할 정도의 경제적·산업적 기반,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된 것은 전두환 정부 말기에서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이 시기에 6·29 선언을 통해 민주화로 이행한 모습을 보면 로버트 달의 지적은 설득력을 가진다.

“정 억울하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정희는 결코 민주주의를 잘 하기 위해 한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밥 굶은 국민들 세 끼 밥이라도 먹이기 위해 쿠데타를 했다. 그런데 그가 쿠데타를 통해 한국을 산업화하는 데 성공하여 역설적으로 민주화가 가능하게 되었으니, 박정희는 결국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 한강을 건넜다는 논리적 구도가 완성된다. 이 부분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의 평을 소개한다.
“박정희 정권은 비록 민주화 운동을 억압했지만 경제발전을 통해서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한국 다원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을 창출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에 크게 기여했다.”(조이제, 「한국의 근대화」, 조이제·카터 에커트 편저, 『한국 근대화, 기적의 과정』, 월간조선사, 2005, 47쪽)
워싱턴포스트 지의 보도에 의하면, 1950년대 이후 2016년까지 전 세계에서 총 475회의 쿠데타가 시도되어 그 중 236회가 성공했다. 지구상에서 일어난 쿠데타들은 예외 없이 정치 불안정 해소와 경제 침체 타개를 명분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발생했던 쿠데타 중 5·16만큼의 번영과 기적을 가져다 준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쿠데타를 연구한 학자들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발생한 쿠데타 중에서 1923년 터키에서 일어난 케말 파샤의 쿠데타,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쿠데타, 1961년 한국의 박정희 쿠데타를 성공한 3대 쿠데타로 꼽는다.
송복 전 연세대 교수의 평가에 의하면 케말 파샤와 나세르는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정을 건설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산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송복, 「5·16의 역사적 평가」, 송복 외 지음, 『한국현대사』,  세종연구원, 2013, 205~206쪽). 반면에 5·16은 국가개조와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차원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쿠데타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한 시절 좌파 논리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도배질했던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위대한 성공이고, 한국의 독립 선언이었다”고 축복했다. 그는 또 “중국에 보급된 한국적 모델은 발전의 모형으로서의 스탈린주의를 북한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깨 버렸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한 차례만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 아니다. 1964년 전 국민이 반대하는 한일 수교를 성공시키기 위해 6․3 쿠데타를 감행했고, 1972년에는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10․17 유신 쿠데타를 저질렀다. 전 국민이 반대하는 한일 국교 정상화, 경부고속도로, 중화학공업, 방위산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는 민주적 절차가 아닌, 무력을 택했다.
이처럼 세 차례에 걸친 다단계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종족적 민족주의에 미치고, 대중경제를 오매불망 짝사랑하며, 일본을 사탄 마귀보다 더 악질 족속으로 매도하는 국민들이 오늘과 같은 물질적 혜택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박정희는 “정 억울하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말했다. 박정희를 비판하려거든 공부 제대로 하고 비판하시기 바란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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