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조사위, 과거사위의 조사를 통해 제기된 대부분의 공안사건 재심은 간첩단 사건의 진위 여부보다는, 수사 과정에서 불법성 여부에 치중되어 있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즉 재심 법원은 시국·공안사건 수사 과정에서 강압·고문·구속기간을 어긴 수사 여부 등을 집중 추궁하여 하자가 발견되면 “불법 강압수사를 토대로 한 판결은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시국 공안사건은 고문에 의한 조작이며, 이것은 국가범죄이기 때문에 청산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공안사건 재심은 간첩죄라든가 북한과의 연계 여부보다는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구속기간 어기기 등 불법 수사를 문제삼아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사건의 핵심본질을 가리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연합뉴스 제공)
군사정권 시절 시국 공안사건은 고문에 의한 조작이며, 이것은 국가범죄이기 때문에 청산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공안사건 재심은 간첩죄라든가 북한과의 연계 여부보다는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구속기간 어기기 등 불법 수사를 문제삼아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사건의 핵심본질을 가리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연합뉴스 제공)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3월 6일 희한한 결정문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수령한 배상금을 반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너무 가혹한 처사이니 구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인권위는 “부당이득금 반환 문제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소하고 국가의 국민에 대한 보호책임을 실현할 수 있는 완전하고 효과적인 구제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해 달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이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형집행, 과거사 진상조사의 조사 결과 고문조작, 재심 무죄, 국가 배상금…. 이러한 키워드가 조합되면 일반인의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작동모드에 돌입한다.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가 악랄하게 시국사건을 조작했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우격다짐으로 잡아다 고문하여 없는 죄를 만들어 사형시켰단다. 김대중 정부의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진상조사 결과 고문조작 정황이 밝혀져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네. 그에 대한 사죄 형식으로 국가가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배상금을 주게 되었는데, 이것을 빼앗으려고 하니 국가는 정말 나쁜 놈들이다. 박정희는 인권유린, 고문학살, 민주 타도의 범죄적 군사파쇼 독재정권이고,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인권을 우선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착한 정권구나.”
겉모습만 보면 이런 스토리 라인이 선명하게 그려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인민혁명당 사건에는 우리가 심각하고 의미심장하게 사고해 봐야 할 내용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다. 그렇다면 인민혁명당 사건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본다.
1차 인혁당은 1964년, 2차 인혁당 사건(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974년 발생했다. 1차 인혁당 사건은 2013년 11월 28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2차 인혁당 사건도 2007년 1월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를 근거로 인혁당 피해자 및 유족들은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국가배상금 총액 637억 원

당시 법원은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판결한 배상 기준은 희생자(사형 집행자) 8명에게 1인당 10억 원씩, 배우자 및 부모에게는 6억 원, 자녀에게는 3억 5,000만∼4억 원, 형제들에게는 1억 5,000만 원씩을 제공하라고 결정했다. 관련자들의 배상금은 245억 원에다가 30년간의 지연 이자(5%)와 기타 잡비를 합쳐 지급 총액은 무려 637억 원이었다. 이 결정에 의해 인혁당 사형 집행자 중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2명, 형제가 2명이라고 가정할 경우 국가배상금은 1인 당 27억 원 정도가 책정되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은 손해배상청구소송 1·2심 판결에 따라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가지급 받았다. 그런데 배상금 이자가 과도하게 책정되었다는 이의가 제기되자 대법원은 2011년 1월 27일 지연손해금의 가산일을 변경했다. 당초에는 불법행위가 자행된 날(즉 사형을 집행한 1975년)부터 배상금 이자를 계산했으나, 무죄 판정이 난 이후 (2008~2013년)부터 계산하는 것이 맞다고 정정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및 유족들은 이미 국가로부터 수령한 가지급금 중 1979년부터 2007년까지의 배상액에서 이자 5%분을 반납해야 했다. 그 총액이 무려 211억 원이었다.
이미 가지급금을 받아 사용한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압류·경매처분이 시도되자 관계자들은 2017년 인권위에 진정했고, 인권위가 이날 문재인 대통령에게 “완전하고 효과적인 구제방안을 마련, 시행해 달라”는 결정문을 보낸 것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은 이 사건이 박정희 정권 시절 자행된 대표적인 사법살인이라고 강력 비판해 왔다.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순수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처형했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대법원의 확정판결 바로 다음날 전격적으로 형을 집행한 것은 고문 조작을 은폐하기 위한 고의적 살인이라면서 박정희 정권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런 주장을 해 온 대표적 인사 중의 하나가 김영삼 정부 시절 대통령 교문수석비서관을 역임했던 김정남 씨다. 그는 한겨레신문 기고문(2011년 11월 14일)에서 “1·2차 인혁당 사건은 모두 정권 차원의 조작”이라고 주장다. 1차 사건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자 1964년 6월 3일 계엄령을 선포했고, 8월 14일 검찰총장 신직수가 “북괴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이 학생들을 조종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김정남 씨는 “인혁당 사건 조작과 탄압을 주도한 것은 신직수와 이용택의 중정이었지만, 사법부에 대한 압력과 전격적인 사형집행을 지시한 것은 박정희”라고 주장했다. 과연 이런 주장들이 사실일까?
제1차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부 출범 첫 해인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을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는 등 시국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무렵 남파간첩 김영춘에게 포섭된 도예종·이재문, 빨치산 출신 박현채 등이 조선노동당 강령을 토대로 작성한 정강에 기초하여 1962년 1월 지하당인 인혁당을 결성했다. 
주동자들은 박현채(서울대 상대 강사)를 비롯하여 서울대 정치학과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조직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련) 대표 박범진, 불꽃회 대표 김정강,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표 박한수 등도 주동자들과 접촉했다.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조작했나?

그런데 이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면서 복잡해졌다. 수사 과정에서 중정이 발표한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서울지검 공안부는 “기소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와중에 중정 조사 과정에서 사건 관련자들이 고문을 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검찰의 기소거부라는 파동 끝에 재수사를 벌여 국보법 위반은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공소장이 변경되었다. 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좌파나 좌익세력들은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 반대라는 정치적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혁당 사건을 날조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는 등 어수선한 시국 하에서 제2차 인혁당 사건이 발표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1차 인혁당 사건의 핵심 인물과 2차 인혁당 사건의 핵심 인물이 거의 동일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1973년 재건한 조직이 바로 인혁당 재건위였다.
당시 재판부는 “북한의 통일전선에 영합, 공산국가 수립을 결의해 인혁당을 조직한 뒤 민청학련을 조직해 학생데모·대중봉기를 유발토록 조종하는 등 내란을 모의했다”고 판시했다. 1975년 대법원은 8명에게 사형, 16명에게 무기징역, 징역 20년, 15년형을 확정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인 4월 19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공권력 남용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그 후 김대중 정부의 의문사위,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자체 조사 과정에서 고문 사실이 밝혀졌다.
아무리 험악한 시국·공안사건이라도 공권력에 의한 잔인한 고문은 누가 뭐래도 국가의 잘못이다. 게다가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볼 때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구성된 의문사진상규명위는 2002년 9월 12일,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으며,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 유족들은 이 조사결과를 근거로 그해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자체 조사 결과,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의 자의적 요구에 의해 미리 수사방향이 결정돼 집행되었다고 발표했다. 노무현 정부 하의 국정원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반국가 단체라고 발표된 인혁당은 서클 수준에 불과했으며, 수사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됐고, 2차 인혁당 사건의 중심이었던 ‘인혁당 재건위’는 실재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2006년 1월 23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고, 관련자들의 행동이 민주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민주화운동이라면서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인혁당 재건위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도예종 등 8명을 사형한 ‘무리한 법집행’ 부분을 무효로 판단한 것이다.

김정강 씨, “인혁당은 제1차 사건 때부터 실제로 존재했다”

그렇다면 인혁당 사건은 실체가 없는 가공의 사건이었는지 그 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인혁당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정권 타도 등 국가변란 및 간첩 활동을 했던 사실은 노무현 정권 당시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인정되었다. 또 1차 인혁당 사건에 관련되었던 박범진 전 의원은 2010년 발간한 『박정희 시대를 말하다』에서 인혁당에 실제 입당할 때 문서로 된 당의 규약과 강령을 보았고, 북한산에 올라가 오른손 들고 선서한 뒤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 전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인혁당 강령 내용은 ‘민족 자주적인 정권을 수립해서 북한과의 협상으로 통일을 시도 한다’는 것이었다”며 당시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을 ‘국가 변란을 기도한 지하조직’ 이라고 규정한 것은 맞는 주장이라고 조작설을 반박했다.
인혁당 사건의 실체를 증명하는 또 한 명의 증언자는 박현채 교수의 제자였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다. 안 교수는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란 저서에서 1964년 인혁당 사건을 “4·19 후 첫 자생적 공산주의 혁명운동조직”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1962년 서울대 대학원 재학 당시 인혁당 핵심 연루자인 박현채 교수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자가 됐다고 털어놨다.
인혁당 사건의 주요 인물이었던 도예종과 친한 관계였고, 운동권의 전설적 이론가로 알려진 김정강 씨도 중요한 증언자다. 김정강 씨는 “인혁당은 제1차 사건 때부터 실제로 존재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증거들로 미루어 보면 당시 검찰과 법원은 인혁당 관계자들의 법정투쟁으로 인해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할 확고부동한 증거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혁당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의 조직이었다거나, 국가기관의 조작에 의한 것이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인혁당 관계자였던 박범진 전 의원, 안병직 교수, 김정강 씨의 증언에 의거하면 인혁당은 명백하게 존재했으며,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변란을 시도하던 중 일망타진 되었으며, 결론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위기 타개를 위해 날조한 사기극이 아니었다는 논리적 구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의문사진상조사위, 과거사위의 결정을 토대로 한 재심 과정도 분석의 대상이다. 전임 정부, 특히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 유죄로 판결한 시국·공안사건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의문사위나 과거사위가 “고문 및 조작에 의한 불법 수사를 근거로 한 엉터리 유죄”라는 조사결과 발표→이를 근거로 재심 청구→무죄 판결→손해배상 청구소송→국가의 배상금 지급이라는 프로토콜이 대부분의 사건에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재심 재판은 실체적 진실에 대한 법리적 쟁점을 다투는 재판이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대부분의 공안사건 재심은 간첩단 사건의 진위 여부보다는, 수사 과정에서 불법성 여부에 치중되어 있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즉 재심 법원은 시국·공안사건 수사 과정에서 강압·고문·구속기간을 어긴 수사 여부 등을 집중 추궁하여 하자가 발견되면 “불법 강압수사를 토대로 한 판결은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그 결과 가장 중요한 실체적 진실(즉 인혁당의 존재 여부, 그들의 북한과의 연계)에 대해서는 법리적 판단을 회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낳는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법정투쟁 수법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 공권력에 의한 고문과 지나치게 과도한 법 집행 가능성 여부다. 대부분의 시국·공안사건은 민주화 투쟁과 연관되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민주화 투쟁을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북한의 간첩이나 공작원이 개입했느냐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고도의 비밀유지와 조직 은닉이 생명인 간첩단 사건의 경우 사건 관계자들이 전향을 결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발적으로 조직망을 진술하는 경우는 없다. 때문에 한정된 기일 내에 수사하여 전모를 밝혀야 하는 방첩기관이나 공안기관, 검경의 공안수사 팀은 각종 형태의 위협과 강압, 심지어 인륜을 무시한 고문이 자행되기도 했던 것이 우리의 어두운 과거였다.
박정희 재임 18년을 비롯하여 해방 후 70년 대한민국 현대사는 김일성 공산집단의 격렬한 대남 도발, 적화통일 공작, 대통령 암살 기도 등 직접적인 국가전복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겉으로는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내면에선 사생결단의 격전이 벌어졌던 시대였다. 지도자들은 모둔 가용 수단을 총동원하여 대한민국의 안보, 이념과 체제를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이 과정에서 체제전복세력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인권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나, 좌파·좌익세력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국가반란세력과 체제전복세력, 공산혁명세력들에 대한 수사과정에서까지 모든 강압행위나 고문은 인권을 말살하는 악(惡)이니 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대남도발 및 침략에 맞서 체제를 지키는 책임을 맡았던 공안기관은 국가전복세력을 어떻게 색출하고, 저들의 대공세를 무슨 수로 막아낼 수 있었을까? 
좌익 및 공산 전체주의자들의 수법 중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것이 거짓말과 용어혼란전술이다. 저들은 공안당국에 체포되면 모든 사실을 부인하면서 “공안조작사건”이라고 주장한다. 확고부동한 증거가 제시되면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면서 무죄를 주장한다. 이것이 공산당의 법정투쟁 수법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저들은 법정에서 “나는 공산주의자”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이렇게 되면 형량이 높게 나오니까, 그 후에는 ‘민중민주주의’란 용어가 등장했다. ‘민중민주주의’가 북한이 주장하는 대남적화통일 논리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최근에는 ‘민주주의’로 바꾸었다. 때문에 우리는 북한과 공산당들이 사용하는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이 사용하는 민주주의를 구분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정투쟁에서의 거짓말과 용어혼란전술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수사당국의 법망을 피해가며 지하에서 북의 지령을 받아 적화통일운동을 벌였다. 김정강 씨는 1차 인혁당 사건이 논란이 된 이유는 “인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당이었다는 증거가 검찰 수사 과정이나 재판 과정에서 노출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인혁당은 사건 관계자들이 실체를 부인하는 법정투쟁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한국정신문화 연구원 편,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출판, 90~91쪽).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의 묘에는 ‘통일열사’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안병직 교수는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란 저서에서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의 경우 실체는 있었지만, 당시 학생운동 조직인 민청학련을 지도하려다 실패하는 등 한 일이 거의 없었는데도 가담자 대부분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과도한 처벌이었다고 평했다.

통일열사’가 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
 
국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거나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분들에게는 국가 차원에서 명백하게 사죄하고, 법적인 배상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가지 증언을 토대로 할 때 인혁당이 순수한 민주화 운동이었고, 공권력에 의해 통째로 날조된 사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1982년 모두 석방되었다. 한기홍 씨가 쓴 『진보의 그늘』이란 저서에 의하면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 중 여러 명이 범민련에서 활동한 사실이 밝혀졌다. 범민련은 연방제 통일 지지,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하다가 1997년 5월 16일 대법원으로부터 이적 단체 판결을 받은 대표적인 종북 단체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과연 인혁당 관련자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인지 복잡한 생각이 든다.
박근혜 탄핵, 촛불정권의 등장으로 대한민국과는 다른 이념과 체제의 국가를 건설하려 시도했던 세력들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통일열사’, ‘영웅’이 되었고, 그들과 맞서 씨웠던 박정희는 역사의 감옥에 갇혀 수인(囚人)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건국 70년의 모든 가치관과 질서, 역사적 사실들을 다 뒤집기 위한 시도를 맹렬히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역사를 지우려 해도 이승만·박정희가 자유민주주의와 산업화의 토대를 닦아놓은 대한민국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이것이 진실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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