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가 다수이기만 하면 정의로운가
공짜점심은 없음을 배우자
절차적 정의와 토론의 기본 배우기
기계적 갑을 구도 벗어나야 현상이 제대로 보인다

조윤희 부산 금성고 교사
조윤희 부산 금성고 교사

학년이 새로 시작되고 1년 같은 한 달이 지났다.

그 한달은 여러 가지 일들이 자리를 잡아야 하고, 학생들은 교과 선생님 혹은 담임 선생님들과 새로 만나 ‘밀당(?)’을 하기도 하는 시기이다. 알아서 복종해야 할 선생님일까, 아니면 조금 버텨도(?) 되는 선생님일까. 아이들의 ‘줄 당기기’에 곤혹을 치르는 교사들도 없지는 않다.

물론 아이들이 당기는 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지긋이 바라보는 나이든 교사들도 있지만.

● “다수가 동의한 연판장입니다!”

학기 초 ‘방과 후 수업’의 향방은 학생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학교밖에서 나름 자신들의 일정에 따라 공부를 하는 아이들도 있고 또는 신나게 놀려는 아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지난 2018년엔 희망하는 학생들만 수업에 참여한 전력(?) 때문에 학생들은 올해에도 희망자만 하게 될 거란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새로 취임하신 교장선생님 방침은 전교생이 방과 후 학교 수업을 하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렇게 결론이 통보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멘붕에 빠져서 야단들이었다. 왜 학생들의 의사는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학생들은 원하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학교의 갑질이요 횡포이고, 명백히 교장선생님의 독재라고 했다. 

학생들은 방과 후 수업을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견을 보여주겠다며 교실마다 ‘연판장’을 돌렸다. 필자의 학급에도 교실에 들어가자 교탁 위에 연판장이 놓여 있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이들은 ‘삼학년 형님이요.’ 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모르는 체하고 교실을 나섰다.

다수가 원하면 그 결정에 모두가 따라야 한다는 것인지 불편했다. 학생들에게 방과 후 수업을 시작하려는 취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밀어붙이시려는 교장 선생님의 결정도, 자신들이 무시당했으므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겠다는 학생들의 연판장도 필자가 보기엔 도긴개긴이었다. 서로의 입장을 내려 놓고 서로 대화하고 조율하고 타협하고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연판장을 제안한 학생이 누군 줄 알고 있는 터라 그 교실에 들어가서 그 아이와 토론이 시작되었다.

먼저 충분히 설명과 설득을 하지 않으시고 방과 후 수업을 강행한 교장선생님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왜 지난해엔 하지 않던 획일적 방과 후 수업이 올해 느닷없이 시작되어야 했는지 알고 있는 바대로 설명했다. 작년에 소수의 희망자 외에 방과 후 수업을 하지 않은 결과, 주위의 학부형들이 교장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그 학교는 왜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느냐는 항의가 쇄도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은 학부모들의 불만도 일소시키고 학생들의 입시 성적도 떨어진 것을 만회할 겸 올 해 부터는 일제식 방과 후 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한바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그 학생은 그 주장에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방과 후 수업을 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는 것 이었다. 필자는 다시 이어서 말했다. 그러면 방과 후 수업을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 교장선생님의 의견에 반박을 하려면 선택형 방과 후 수업을 하던 2학년 때 성적이나, 획일적 방과 후 수업을 했던 1학년 때의 성적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증거자료라도 제시하며 교장 선생님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자신들은 애당초 어떠한 통계자료도 접근할 수 없으므로 교장 선생님의 ‘갑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학교에서 너희들에겐 불리한 통계를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너희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정독실에 있는 상위권 아이들이라도 방과 후 수업의 전 후 성적표들을 취합해서 근거로 제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장 선생님의 주장을 반박하고 설득하기 위해선 객관적 근거자료가 필요 했지, ‘우리는 거부한다’라는 식으로 다수의 힘만 들이대는 ‘폭력’이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게다가 너희들이 서명을 받았다고 하는 그 종이에 모든 학생의 서명이 들어 있지 않았으며, 2학년 교실에서 돌고 있던 연판장엔 그냥 반장이 ‘야! 3학년 행님들이 이름 적으란다! 방과 후 수업 안 하려면!’ 이런 식으로 돌고 있었다고 말했다.

충분히 그 취지와 내용도 설명되지 않은 채 ‘강요’당하는 것이라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말했다. 교장 선생님과 대화할 생각은 왜 하지 못했으며 학생회에서 학생의 대표 자격으로 학생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충분이 한 번쯤 다시 고려해 달라고 교장 선생님께 정중하게 대화를 요청할 수 있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게다가 연판장이 돌고 난후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 학년부장 선생님들과 회의실로 들어가는 학생회 임원들은 이미 화가 잔뜩 나 있는 듯 했고 회의실 밖으로도 무례하진 않았지만 제법 격앙된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감정적 대응으로는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까지 덧붙였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더니 대체로 수긍했다. 토론을 위한 기본자세 부족, 그리고 자신들이 상대적 약자이므로 약자들의 다수 의견이면 다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대해서도. 교장선생님의 일방적 통보가 못마땅했다고 주장하는 자신들도 실은 똑같이 일방적 선택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깨달았다고 시인했다.

다수가 옳다고 믿는 것이 언제나 옳지 않을 수 있으며 그 역시 1인독재나 다름없이 다수에 의한 독재, 즉 ‘대중의 독재’로, 이것 또한 또 다른 독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대화와 설득과 타협이라는 절차가 무시된 채, 절차적 정의가 묵살된 일방적 강요는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건, 혹은 다수이건 어떤 쪽이든 독재의 위험이 도사릴 수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였다. 징글징글한 ‘갑을 구도’ 이야기였다. 늘 학생들은 교장이나 교사, 학교 측을 ‘갑’으로 규정하고 상대적으로 학생들이 ‘을’이라고 여기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학부모님들의 전화를 받고 학교 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면 교장 선생님과 학부모, 그 둘 중에 누가 갑이냐고 물었다. ‘갑과 을’이라는 것이 언제나 기계적이고 획일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항상 학교 방침에 끌려가야만 하는 학생들이 을이라는 생각을 갖지만, 학교 역시 결국은 학부모의 결정에 따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을의 입장일수도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언제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으니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연판장 사건 이후, 교장 선생님과 학생 대표들과 선생님들이 모여 충분히 그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가진 다음 다시 한 번 학생들의 찬반 여부를 묻는 과정을 거쳤다. 연판장사건 이전에 비해서는 많은 학생들이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끝까지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아이들은 대체로 결과를 수긍하고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휴대폰으로 배우는 ‘자유 지키기’

본교 교칙에는 학생들이 등교하면 휴대폰을 제출하게 되어 있다. 사실 이 휴대폰은 학교마다 뜨거운 감자다. 걷자니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고, 안 걷자니 아이들을 유혹에 방치(?)하는 셈이 되어 학업에 방해가 된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으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요즘 아이들 중에는 중독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에겐 어떻든 휴대폰이 ‘最愛 아이템’인 셈이다. 게다가 가장 소중한 자신의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을 자신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자신이 아끼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책임이 반드시 따라야 함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통해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러자니 휴대폰만한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학교 방침과 교칙이 ‘등교 시 휴대폰 일제수거’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학급경영방침으로써 ‘자유와 자율정신 함양’이란 매우 소중하고도 중요한 목표를 위해 필자는 휴대폰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본교는 춘계방학부터 등교를 시작했고, 새로운 반에서 자습을 시작하던 첫 날 다른 반은 휴대폰을 걷었지만 우리 반은 걷지 않았다.

아이들은 담임선생이 까먹어 주길 바라며 서로 입 밖에도 내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 날, 조례시간에 말문을 열었다.

“휴대폰 안 걷으니 좋은가요?” “헉! 예! 선생님이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선생님이 잊어버려서 걷지 않은 것이 아니에요. 교내 학칙에는 반드시 걷게 되어 있음을 잘 알거에요.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강제로 뺏기면서 자율을 배우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서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뭔가 갑자기 뭔가 툭! 끊어지는 듯한 해방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선뜻 좋아하지도 못한 채 그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분들에게 휴대폰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요. 하지만 왜 학교에선 강제로 수거를 할까요?”

“우리들이 절제하지 못해서요. 수업시간이나 공부해야할 자습시간에도 몰래 가지고 놀아서요.”

소견이 멀쩡한 녀석들이었다. 가지고 놀고 싶은 강렬한 욕망만큼이나 체념의 이유도 분명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제재만 없다면 휴대폰은 당연히 편리하다. 쉬는 시간에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스케줄 확인도 할 수 있고 셀카도 찍을 수 있고, 일일이 기록할 것들을 사진으로 찍어 적을 필요 없이 캡쳐해도 되고, 동영상도 볼 수 ,검색도 할 수 있고, 간혹은 게임도 할 수 있으니까. 사실 아이들에게 휴대폰은 항상 다른 세계로 열린 출구 같은 것이고, 멀쩡한 친구 같은 것이나 다름이 없을테다. 그런 편리한 친구를 늘 학교에 오면 빼앗기(?)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대신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학교에서 왜 휴대폰을 일제히 수거했는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 반은 여러분들의 휴대폰을 여러분들의 손에 쥐고 학교 대신 스스로 통제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얻을 때보다 더 어려운 시험을 치르게 되는 겁니다. 선생님도 어려운 시험을 함께 치르는 거지요. 왜 잘난 척하고 학생들을 유혹에 내몰았느냐는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우리반의 여러분을 믿고 싶은 거구요.

강제로 빼앗기면서 ‘자유와 자율’을 배울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그러니 이제부터 다음과 같이 지켜주세요. 자신 없으면 미리 말하고.”

▲ 수업시간과 자습시간엔 반드시 전원을 끄고 가방 속이나 사물함에 넣어둔다.
▲ 수업시간에 몰래 사용하다가 걸리면 그날부로 우리 학급 전체의 자유는 끝이다.
▲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으며, 단 한명이라도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는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 운좋게 걸리지 않았다고 해도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지 다른 친구 중 누군가는 볼 수 있고 누구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당당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자율에 위배된다.
▲ 만일 거기서 눈속임이 있거나 거짓이 끼어들면 그땐 다른 반과 마찬가지로 압수이고 벌칙이 따른다.

엄격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따박따박 힘주어 이야기 했다. 아이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뭔가 중요한 일의 참여자가 되는 듯한 결연함도 느껴졌다.

담임의 학급 경영 방침이 ‘자유와 책임’이므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반드시 호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 포인트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짐을 받기위해 말문을 열었다.

“자율과 자유는 자기 선택이며, 소중하면 소중한 만큼 책임지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에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아이들은 답했다. 자신들이 해보겠다고. 먼저 기회를 주시면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특히 ‘단 한 번의 실수도, 단 한 명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연대감과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1년 동안 여러분 모두가 자신과의 약속을 성실히 지킨다면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당당함과 뿌듯한 만족감을 상으로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었다. 그 후 제법 약속이 잘 지켜지는듯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약속했던 ‘자유 지키기’는 43일 만에 막을 내렸다. 자유의 달콤함을 ‘즐기’는 17명이 있었으나, 방종을 자유로 ‘착각’한 1명 탓이다. 자신들이 누리고 싶었던 ‘소중한 것 지킬 자유’는 그만큼 자신들이 참아야 하고 절제해야 하고 순간의 즐거움을 반납할 줄 아는 책임감이 필요했었다.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꺼내어 보다가 한 학생이 들켰고, 종례시간에 이실직고 후 그날부로 태산처럼 무거운 책임을 지고 휴대폰을 소지할 자유는 막을 내린 것이었다.

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이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자신들의 피부와 뼈에 새기는 좋은 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요소요소마다 무엇을 배워야 할지 ‘친절한’ 가이드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아이들은 이 사건들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대로 선택할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절차적 정의가 지켜져야 하고, 단순히 숫자가 의사결정의 관건이 아님을 그리고 충분히 서로를 설득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대화의 장이 선행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유를 위해 아이들은 남의 손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유가 정말 소중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여러 가지 불편함이나 때로 자신의 희생이 따라야 하고 기꺼이 비용을 지불해야만 함을 배울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 

조윤희(부산 금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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