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어디에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저 푸른 숲이야. 저것 참 부러워. 미국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게 있다면, 난 저 푸른 숲을 몽땅 가져가고 싶어.”

5.16 직후부터 박정희는 나무심기, 사방사업, 도벌방지를 박력 있게 밀어부쳤다. 도벌을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여 뿌리뽑았고, 아까시나무, 이태리포플러, 은수원사시나무 등을 대대적으로 심는 거국적인 운동을 펼쳤다. 우리의 푸른 숲은 잠자고 있던 80~90%의 팔로워십을 깨워 산림녹화에 앞세운 리더십의 위대한 승리였다(연합뉴스 제공).
5.16 직후부터 박정희는 나무심기, 사방사업, 도벌방지를 박력 있게 밀어부쳤다. 도벌을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여 뿌리뽑았고, 아까시나무, 이태리포플러, 은수원사시나무 등을 대대적으로 심는 거국적인 운동을 펼쳤다. 우리의 푸른 숲은 잠자고 있던 80~90%의 팔로워십을 깨워 산림녹화에 앞세운 리더십의 위대한 승리였다(연합뉴스 제공).

지난번 글에서 문재인 정부의 산불, 박정희 정부의 치산녹화를 소개했는데, 여러 독자들께서 격려를 보내주셨다. 이 글에서 우리가 산림녹화에 성공한 이유로 나무를 열심히 심고, 대체연료 공급 시스템의 확보를 소개한 바 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산림녹화 성공 요인을 꼽는다면 헐벗은 이 나라를 푸르른 숲으로 뒤덮겠다는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전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였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군사정부는 혁명공약 중에서 5대 사회악(惡)으로 밀수·마약·도벌·깡패·사이비 기자로 규정했다. 도벌을 사회악 명단에 포함시킬 만큼 박정희는 산림보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쿠데타 한 달 후인 1961년 6월부터 군사정부는 ‘임산물 단속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도벌을 강력 단속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군사정부가 도벌을 어느 정도나 강력하게 단속했는지는 1961년 10월 28일, 사무엘 버거(Samuel Berger) 주한 미국대사의 보고서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 버거 대사는 “군사정권은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작하여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면서 매점매석 행위, 뇌물, 정경유착, 밀수, 도벌, 군사물자 횡령, 깡패, 경찰과 기자의 공갈 행위에 대한 군사정부의 단속이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전 국민적으로 아까시 나무, 포플러 심기 운동

1961년 12월 27일, 군사정부는 출범 7개월 만에 산림보호와 육성, 산림자원의 증진을 위한 ‘산림법’을 제정했다. 군사정부가 산림법보다 먼저 만든 법은 반공법, 수출조합법, 공업표준화법 세 가지밖에 없었다. 이 법을 통해 마을 단위로 연료림 조성을 위한 산림계가 결성된 것이 큰 의미가 있다.
한 달 후인 1962년 1월 15일, 군사정부는 ‘사방사업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통해 대규모 사방조림을 하기 위한 묘목의 대량생산에 돌입했다. 군사정부는 460명의 양묘전문가를 전국에 배치하고 1인당 연간 아까시 나무(Black Locust) 묘목 100만~150만 본을 산림계를 통해 양묘할 것을 요구했다. 연간 5억 본 이상의 아까시 나무 묘목을 단기간 내에 조직적으로 생산해내는 작전이 추진된 것이다.
군사정부가 이 무렵 여러 수종 중에서 유독 아까시 나무를 골라 대량으로 심은 이유가 있다. 생명력이 강인하여 토사가 흘러내릴 정도로 황폐해진 민둥산에서도 뿌리를 잘 내렸고, 화력이 좋아 땔감으로도 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나무는 수명이 50년에 불과하여 고사(枯死)하고, 그 사이 비옥해진 산에 참나무와 활엽수들이 자라서 오늘과 같은 아름답고 울창한 숲이 조성된 것이다. 
1962년 군사정부는 대대적인 포플러 심기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일보와 한국포플러위원회가 공동으로 전국의 하천과 빈 땅에 거국적으로 포플러 심기 운동을 벌인 것이다. 당시 국토 곳곳에 대량으로 식수된 포플러는 육종학자 현신규 박사가 미루나무와 양버들을 교잡하여 개량한 이태리포플러였다.
버드나뭇과에 속한 낙엽 활엽 교목인 이태리포플러는 미국산 미루나무가 유럽산 포플러와 천연잡종에 의해 캐다다포플러가 생겼는데, 이를 개량한 것이다. 나무 중에서는 가장 빨리 자라는 특성이 있고, 높이 30m 정도까지 자란다. 
한국일보는 포플러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전 국민 모금운동을 벌였고, 기업인들도 이에 적극 동참했다. 1960년 12월 창립된 한국포플러회의 회장을 맡았던 전택보 씨는 수출 왕에 올랐던 천우사의 창업자였다. 전택보 회장은 학계, 재계와 힘을 합쳐 산림녹화에 앞장섰다. 1963년부터 산림조합중앙회는 농가 1호당 이태리포플러 100그루씩 심을 것을 권장하여 집 주변이나 하천 땅, 유수지, 공한지에 집중적으로 심었다. 그 결과 1985년까지 전국의 73만㏊에 포플러가 심어졌다.
군사정부는 포플러 심기 국민운동과 함께 2년 사이에 38만㏊의 민둥산에 조림을 완성한다는 야심찬 사업의 시동을 걸었다. 정부 예산이 부족하여 자재비와 기초공사비만 정부가 부담하고, 노력동원(즉 인건비)은 지역 산림계원들이 담당하는 민관(民官) 합동체제로 대역사를 추진한 것이다. 거국적인 조림사업을 위해 1963~1964년 2년간 연인원 240만 명의 산림계원이 동원되어 37만 4,000㏊에 조림을 완료했다.

기업인들도 산림녹화에 앞장서다

다음해인 1963년 박정희는 육종학자 현신규 박사를 제2대 농촌진흥청장에 임명했다. 임학 전공자를 농촌진흥청장에 임명한 것은 이후부터 전개된 국가 총력전 형태의 산림녹화사업을 예고하는 인사였다. 이와 함께 국토 녹화사업을 위해 필요한 경우 국민에게 부역을 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3년 기한으로 ‘국토녹화촉진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했다.
하지만 아무나 무작위로 녹화사업을 위해 인력을 동원한 것은 아니다. 농촌의 경우 나무를 심은 경험이 풍부한 산림계원이어야 하며, 당시 나이로 29~33세 사이의 출생자로서 현역에 편입되지 않았던 자 등으로 명시했다.
이 법의 지원을 받아 1963~1964년까지 2년 동안 총 29만 5,303㏊에 사방공사가 실시되었다. 1㏊는 1만㎡이고, 평수로는 3,025평이다. 2년에 걸쳐 사방공사를 완료한 면적을 평수로 환산할 경우 무려 8억 9,329만 1,575평, 단군개국 이래 최대 규모의 사방공사를 국민의 노동력 협조로 완료할 수 있었다. 사방공사에 동원된 인력은 대부분이 병역미필자들이었다.
군사정부의 박력 있는 산림녹화 사업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자 민간 차원에서 이를 후원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산림조합이 앞장서서 각 기관, 특히 유흥업소 등을 대상으로 총 6,500만 원의 성금을 모았다. 민간 성금은 전액이 사방사업에 동원되는 근로자들의 노임으로 충당되었다(산림청, 『대한민국 산: 세계는 기적이라 부른다』, 임업신문사 엮음, 2007, 992쪽).
이와 함께 군사정부는 목재 재원을 절약하기 위해 철도 침목과 전신주를 콘크리트로 대체하는 사업도 병행했다. 당시 정부가 대량으로 산림벌채를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철도 침목과 전신주를 생산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원래 이 아이디어의 제안자는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 씨였다. 5·16 직후 박정희는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재계 지도자들과 만나 여러 차례 대화를 햇다. 이때 재일교포 기업가 이원만은 일본에서의 사업 경험을 토대로 약 두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제안을 했다.
그가 박정희 의장에게 제안하여 시행된 것은 ①서울 근교에 수출 전용 공업단지 조성, ②가발 제조 수출, ③전봇대 소재를 나무에서 시멘트로 교체 등 세 가지였다. 이원만의 수출 전용 공업단지 아이디어는 곧바로 실행에 옮겨져 서울 구로동에 한국수출공업단지가 설립되었다. 초대 위원장에 이원만이 취임했다.
이원만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교포 기업가들에게 “고국에 투자하여 조국발전에 기여하자”고 호소했다. 이원만의 한국에서의 성공을 목격한 재일교포 기업가들 중 정규성, 서갑호, 신격호 등이 고국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이후 이원만은 정계에 진출하여 6~7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벌채금지, 산림녹화, 수출 진흥에 앞장섰다. 산림훼손을 막기 위해 도시의 가정연료를 무연탄과 프로판가스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여 가정과 요식업소에 프로판가스가 도입되었다. 이런 노력이 산림녹화로 결실을 맺게 된다(이원만의 산림녹화 관련 부분은 김용삼,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정신』, 2015, 프리이코노미스쿨 참조).

산림부국(富國)=경제부국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 그 해 10월 15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임업인들은 박정희를 적극 지지했다. 과거 정부가 검토는 했으나 수립하지 못했던 정책, 수립하기는 했으나 시행하지 못한 계획, 시행은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산림녹화정책을 군사정부는 단 2년의 기간 동안 확고하게 해치웠기 때문이다.
숲을 갉아먹는 송충이 박멸, ‘인간 송충이’라 불리는 도벌꾼 박멸, 불과 2년 사이에 5억 그루의 아까시 나무 심기, 포플러 심기 국민운동 전개, 임산물 반출 원천봉쇄, 그리고 숙원이던 산림법을 제정하여 국토보존의 길을 열어놓은 것…. 군사정부의 박력 있는 업무추진능력을 보면서 임업인들은 이런 지도자라면 전 국민의 소망인 산림녹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존슨 미 대통령의 공식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한국군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었는데, 마지막 일정은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 방문,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우주선 발사 장면 참관이었다. 그는 김성진 당시 동양통신 기자와 현지에서인터뷰를 했는데, 미국 방문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미국 어디에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저 푸른 숲이야. 저것 참 부러워. 미국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게 있다면, 난 저 푸른 숲을 몽땅 가져가고 싶어.”(김성진, 『박정희를 말하다』, 삶과 꿈, 2006, 308쪽).
그의 머릿속에 산림부국(富國)=경제부국의 철학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서독 및 미국 방문이 가져온 의미 있는 결실이었다. 미국서 귀국한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6월 10일, 권농일 행사에 참석한 후 임목육종연구소를 방문하여 농촌진흥청장 현신규 박사가 개발한 은수원사시나무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유럽 원산의 은백양과 한국 원산의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탄생된 이 나무는 빠른 생장력, 건조한 환경에서도 잘 견디고, 곧게 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범국민운동으로 심은 이태리 포플러는 평지에서만 잘 자라는 한계가 있어 비탈길이나 산지에 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은수원사시나무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획기적인 품종이었다. 이후 은수원사시나무는 전국의 가로수로 보급되었고, 산간벽지의 비탈진 산중턱에까지 대대적으로 심었다. 1973년부터 시작된 치산녹화 10개년계획 중에 대량으로 심어 우리나라 산림녹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이 나무다.
박정희 대통령은 후에 나무 이름을 은사시나무에서 개발자 현신규 박사의 이름을 따서 ‘현사시나무’라고 바꾸었다. 산림녹화에 공헌한 육종학자에 대한 대통령으로서 최고의 예우를 한 것이다(이경준, 『산에 미래를 심다(현신규 박사 전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321쪽).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완벽한 조화

세계적인 육종학자인 현신규 박사는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 토질에 맞는 나무 품종을 개량하고 개발하여 헐벗은 산야를 녹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분이다. 평생에 걸쳐 나무 연구에 몰두해 온 그는 다음과 같은 유고를 남겼다.
“산에서 일하다가 살이 찢어지고 피가 나와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참고 희생하는 일.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박봉에 굶주리는 생활도 나라와 겨레의 먼 앞날을 위하여 참고 봉사하는 일. 이것이 곧 조림과 육림 하는 길이며, 이러한 정신으로 국민 전체가 무장되어 있을 때 그 나라와 그 겨레는 쇠퇴와 몰락이 있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산림녹화는 이처럼 지도자·정부·임업 전문가·국민이 총체적으로 참여한 범국민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박정희 시대는 조선 500년, 그리고 망국과 식민지배 36년, 해방과 건국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양반-상놈의 계급구조로 갈라졌던 국민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국가건설과 발전을 위해 전력투구하도록 만든 18년이었다.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의 로버트 켈리 교수는 리더가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10~20%에 불과하고, 나머지 80~90%는 팔로워의 힘과 역량에 따라 조직 운영이 결정, 좌우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정의다. 박정희는 80~90%의 팔로워들의 힘과 역량을 끌어내 조국 발전을 위해 뛰도록 만드는 최고 전문가였다.
전 국민을 금수저-흙수저로 가르고, 수도권과 지방, 강남과 강북, 영남과 호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찢어 정치적으로 울궈먹고 국민을 선동하는 소재로 이용해 먹는 문재인 정부에게 박정희 시대가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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