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교단을 격분시킨 ‘콜론 보고서’가 「사상계」에 게재된 것은 우발적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당시 「사상계」 잡지의 출판 및 운영비용은 미국 공보원이 부담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은 「사상계」에 각종 정보와 자료까지 충분히 제공했다. 한 달 후 5·16이 터지자 「사상계」의 발행인 장준하는 「사상계」 잡지에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라는 권두언에서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정의하며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면서 적극 환영했다.

4.19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통제력을 잃고 헤매자 군이 일어서서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군의 봉기를 선동한 장준하(가운데 안경쓴 이)와 함석헌(왼쪽 한복 입은 이). 미국도 '콜론보고서'를 사상계 잡지에 제공하여 군의 정치 참여를 부추겼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4.19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통제력을 잃고 헤매자 군이 일어서서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군의 봉기를 선동한 장준하(가운데 안경쓴 이)와 함석헌(왼쪽 한복 입은 이). 미국도 '콜론보고서'를 사상계 잡지에 제공하여 군의 정치 참여를 부추겼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한국의 사회적 특성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다. 소위 먹물 먹은 선비들이 가장 우대받는, 아니 권력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나라가 조선이었고, 그 정신적 후예가 대한민국이다. 오죽했으면 김영삼이 스스로를 ‘문민(文民)정부’라고 칭했겠는가.

이 나라에서 기술자나 상인, 장인 등 기술이나 장사로 먹고 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최하층 신분 계급으로서의 수모를 각오해야 한다. 고려 무인정권이 붕괴된 1270년 이후 한반도는 ‘붓’을 든 먹물 세력(文人)들이 ‘칼’을 든 무인(武人) 세력을 찍어 누르고 권력을 행사한, 인류사에서 대단히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문민통치의 완벽한 구현이었다.

오늘날 기를 쓰고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올인 하고 있는 고시(考試)와 공무원 시험이 무엇을 뜻하는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일본의 한국정치 연구가 다나카 메이(田中明)는 『한국정치를 투시한다』라는 책에서 한국의 전통정치는 지배층 먹물 양반의 권력 다툼의 역사였으며, 그 맥은 해방 후 한국민주당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에 반기를 든 세력이 이 땅에 등장한 것은 1961년이다. 양반 지배층이 보기에 상스럽기 짝이 없는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고 사농공상의 신분구조, 문민 우위의 지배구조를 상공농사(商工農士)와 무인통치 시스템으로 뒤엎은 것이다.

한국의 봉건제도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戰死)한 박정희

신분을 앞세운 양반들이 나라가 망하든 말든, 백성들이 굶어죽든 말든 권력 획득을 위해 끊임없는 공리공담과 이합집산으로 대대손손 기득권의 이득을 향유했어야 마땅한데, 미천한 신분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에서 돈 빌려다 고속도로 깔고 제철소 지어 상놈 출신, 종놈 출신, 노비 출신들에게 세 끼 밥 먹이고, 지갑 두둑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상것들이 양반들 지시에 토를 달지를 않나, 툭하면 양반의 기득권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전통질서 파괴의 주범은 누구인가? 군인들이다. 기득권층 양반들 보시기에 군인정권의 두목 박정희는 근본이 미천한 싸가지 없는 인간이었으니, 경멸·타도·멸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박정희 재임 18년은 한국의 전통적인 역사 및 사회, 사상사적 전통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예외의 시대였다. 사농공상이 아닌 상공농사, 공리공담이 아닌 실사구시, 공자 왈 맹자 왈이 아닌 과학과 기술을 중시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박정희는 북한과 미국, 사회 기생세력인 먹물 언론, 그리고 양반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국내의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4면에 걸친 압박 공격을 당했다. 그 거칠고 잔인한 포위 압박 공격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제 갈 길을 갔다.

필자는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한 차례만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박정희는 5·16뿐만 아니라, 그 후 두 차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쿠데타를 더 감행했다. 전 국민이 거국적으로 반대하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돌파하기 위해 6·3 쿠데타(1964)가 그것이요, 농업경제·수공업경제·내수경제를 ‘대중경제’로 포장하여 후진 기어를 넣고 질주하려는 양반 정치세력들의 거센 반대를 격파하고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해 10월 유신 쿠데타(1972)가 그것이다.

이처럼 세 차례의 다단계 쿠데타를 통해 이 나라를 근대화·산업화하다가, 다나카 메이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의 봉건제도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戰死)했다. 

그렇다면 합리적 이성의 눈으로 현대사를 돌아보자. 1961년 군인들의 쿠데타는 왜 일어났으며, 누가 쿠데타를 부추겼는가?

민주당 정권은 ‘혼란정권’

1960년 4월 학생들이 의거를 일으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 들어선 장면 내각은 문자 그대로 ‘혼란 정권’이었다. 집권세력인 민주당의 허약 체질이 문제를 악화시킨 주범(主犯)이었다. 민주당은 자유당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정당이라는 외피를 썼을 뿐, 신파·구파로 완벽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두 가족이었던 셈이다.

지주 세력이 중심이 된 민주당 구파는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참여한 이래 민주국민당(민국당)을 거쳐 민주당을 구성한 인맥으로서, 윤보선과 김도연을 중심으로 한 당내 주류세력이었다.

도시중산층과 영세사업자를 대표한다는 민주당 신파는 1954년 이승만의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개헌안에 반대하여 자유당에서 이탈한 후 민주당에 합류한 인맥으로서 장면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신·구파는 뚜렷한 지도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정치권력의 배분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하고 있었다(김영명, 『대한민국 정치사』, 일조각, 2013, 129쪽).

두 세력은 별도로 당선자 대회를 열 정도로 관계가 험악했다. 이 와중에 대통령은 구파의 윤보선이, 실권을 가진 총리는 신파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장면은 건국 직후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외교를 벌일 때의 주역이었고, 이승만 정부의 초대 주미대사로 재직하며 6·25 때 미군과 유엔군 파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총리 취임과 더불어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우고 민생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1년 3월 국토건설사업을 통해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치 사회 불안이 가중되면서 민생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각제의 성공 여부는 내각이 의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책임 있게 정국을 운영해 나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장면 정부는 행정부와 국회 요직 배분을 둘러싸고 파벌 간에 정쟁(政爭)을 거듭했다. 장면이 제1차 내각을 신파 중심으로 구성하자 구파는 신민당을 창당하여 이탈했다. 장면 총리는 1차 내각을 구성한 지 불과 2주 만인 9월 7일 각료 4명(비서실장, 국방장관, 상공장관, 내무장관)을 바꾸는 등 6개월 동안 세 차례나 개각을 단행했다. 장면 정부 국무위원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두 달에 불과했다.

또 하나 갈등 요인은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의견 차였다. 두 사람은 협력은커녕 신구파 간의 갈등을 부채질함으로써 정권의 리더십을 약화시켰다. 정치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한 장면 총리는 재임 기간 내내 결단력 있는 정책 집행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김영명, 앞의 책, 131쪽).

민주당은 이승만 권위주의에 대한 반작용 때문에 집회, 시위, 정당 결성 등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자유를 무제한 허용했고, 국가보안법을 개정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란 깃발 아래 시위의 대행진이 시작됐다. 민주당 정부 10개월 간 가두데모는 총 2,000건, 데모 참가 연인원은 100만 명. 매일 평균 7~8건의 데모가 서울 거리에서 일어났다.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학생들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파워를 갖게 됐다. 학생들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거리로 나갔다. 덩달아 일반 국민들까지도 시위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풍조가 생겨났다(김충남, 『대통령과 국가경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184쪽).

軍·경찰을 숙청·혁신 대상으로 삼은 민주당

장면은 안보와 치안의 핵심세력인 군과 경찰을 숙청과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다.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았고, 집권 후 감군 정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만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

일제 식민경찰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만 7,000명이 해직됐고, 전체 경찰관의 80%를 근무지를 변경시켰다.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중 네 명은 각각 한 달 간씩 재직했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에서 65%로 낮아졌다.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86쪽).

사회 혼란은 공산혁명의 꽃동산이 된다. 장면 정부가 혼란의 통제에 실패하면서 사회 곳곳에 공산분자들이 대거 침투하여 체제변혁의 드라이브를 강력하게 걸기 시작했다.

1960년 11월 초에 결성된 서울대의 민족통일연맹은 창립대회에서 공산당이 참여하는 전 한국 보통선거를 주장했고, 1961년 5월에는 남북 학생회담을 제안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1961년 1월에는 사회대중당, 혁신당, 사회당, 통일사회당 등 4개의 혁신 정당을 비롯한 16개 정당 사회단체들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반외세 민족주의, 즉각적인 남북협상,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고 나섰다.

장면은 정치력, 행정력, 카리스마 등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이 결여된, 유약하고 소극적인 리더십의 전형이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가치관이 없었다. 제2공화국은 자유민주주의 정부이기 이전에 무능한 정부였다.

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7%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다. 미국 정부는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90~191쪽 참조).

공산혁명 가능성 우려한 미국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1960년 11월 22일 미 행정부가 작성한 「한국의 전망」이라는 보고서가 그 근원지였다.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 향후 몇 년 동안 리더십 변화와 세력재편이 일어날 것인데, 이 경우 현재와 같은 보수정당 우위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세력의 힘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1961년 3월 초에는 「한국의 전망」보다 더 비관적인 「팔리 보고서」가 등장한다. 이 보고서의 작성자는 정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국제협력단(ICA) 한국지부의 기술자문 역인 휴 팔리(Hugh Dfarley)였다.

팔리는 케네디 행정부에 들어와 있던 경제학자 월드 로스토와 가까운 관계였다. 그는 한국의 실상을 미국 조야에 정확하게 알린다는 취지에서 25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 백악관 안보담당관실에 제출했다.

“1961년 한국은 병든 사회다”로 시작되는 이 보고서에서 팔리는 장면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통렬히 비판한 후 “이 정부가 4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사태를 내버려둘 경우 한국에서는 공산혁명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 정부는 하루빨리 특명전권대사를 파견하여 개혁을 단행하도록 적극 개입해야 하며, 최악의 경우 군사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2, 307쪽).

팔리 보고서를 검토한 케네디 대통령은 CIA와 국무부에 “한국 상황에 대해 정밀한 평가보고서를 즉각 제출하고 국가안보회의는 새로운 대한(對韓)정책을 입안하라”고 지시했다. CIA는 3월 21일, 「한국 상황에 대한 단기적 전망」이라는 정보평가서를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했다. 이 평가서는 “4·19 1주년의 시위사태가 극단적인 사태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한국 정부가 장기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고 분석했다. 

이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CIA의 한국지부장 피어 드 실바는 장면 총리에게 “박정희 소장에 의한 쿠데타 음모설”을 알려주는 등 기민하게 움직였다.

국내 분위기도 해외의 분석과 다르지 않았다. 훗날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던 함석헌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잡지 「사상계」 1961년 1월호에 ‘또다시 혁명해야지. 혁명밖에 다른 길 없다. 뱃속에 병이 들었으면… 하다가 죽는대도 배를 가르고 수술해야지 그 길밖에 길이 없다’는 기고문을 실었다(함석헌, 「국민감정과 혁명완수」, 『사상계』 1961년 1월호).

젊고 혁명적인 지도자 갈망한 지식인들

당시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리더십이 완전 붕괴된 장면 정부로는 산적한 국가적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국가개조를 위해서는 국민들을 이끌어 갈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자유민주적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젊고 혁명적인 지도자’를 갈망했다(김상협·부완혁·신상초·한태연, 「좌담회:민주정치 최후의 교두보」, 『사상계』, 1960년 5월호).

1960년 1월, 「사상계」 잡지에 한국에서의 군사쿠데타를 예언한 ‘콜론 보고서(Colon Report)’가 게재되었다. ‘콜론 보고서’는 미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의 요청에 의해 콜론연구소(Colon Associates Institution)가 작성했는데, 스칼라피노 교수가 이 작업에 참여했다.

‘콜론 보고서’는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 중 한국과 관련한 부분을 말하는데,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조만간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지만 당분간은 그 가능성이 낮다”고 예견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젊은 장교들을 격렬하게 자극했다. 그들은 “미국이 한국군 장교를 우습게보고 있다”면서 시쳇말로 ‘뚜껑’이 열렸다. 당시 김포 해병여단장이 김윤근이었는데, 어느 날 부하 대대장 오정근 중령, 부연대장 조남철 중령이 찾아왔다. 그들은 「사상계」에 실린 콜론 보고서를 화제로 꺼내며 “이 암담한 시국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군부가 궐기해서 수습해야 합니다”라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해병대가 박정희의 5·16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콜론 보고서’가 「사상계」 잡지에 실린 이유는?

문제의 ‘콜론 보고서’가 「사상계」에 게재된 것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당시 「사상계」 잡지의 출판 및 운영비용은 미국 공보원이 부담했으며, 「타임」과 「라이프」의 한국어판을 출판할 수 있는 저작권까지 제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은 「사상계」에 각종 정보와 자료까지 충분히 제공했다. 이 내용은 미국의 정치학자 그렉 브라진스키의 저서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00쪽).

‘콜론 보고서’가 「사상계」에 게재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한국 군부의 동향을 탐지, 혹은 자극하려는 미 국무성 또는 CIA 측의 고도로 계산된 행위이며, 미국이 장면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을 간접적으로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사상계」는 한국 사회의 혼미 상태의 주요인을 ‘강력한 지도력의 부재’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서 슐레징거가 쓴 논문 「영웅적 지도자로: 강력한 지도자들과 허약한 인민들의 딜레마에 관하여」의 전문을 1961년 4월호에 게재했다.

한 달 후 5·16이 터졌을 때 「사상계」의 발행인 장준하는 「사상계」 잡지에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라는 권두언(1961년 6월호)에서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정의하며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장준하, 함석헌 같은 지식인뿐만이 아니었다. 신문기자들도 군인들에게 공공연하게 ‘쿠데타’를 선동했던 사실은 5·16의 기획자 역할을 했던 이석제 전 감사원장의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라는 회고록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960~61년 당시 이석제는 육군 중령으로서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민심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무교동 막걸리집을 찾았다.

이 동네 주가(酒家)에는 태평로 일대의 신문사 기자들과 직장의 중견 간부들이 주로 모였는데, 군 장교들이 나타나면 기자들이 “군인은 나라의 운명에 좀 더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면서 노골적으로 쿠데타를 선동했다(이석제,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서적포, 1995, 69~71쪽).

함석헌과 장준하로 대표되는 지식인, 언론인들은 군 장교들의 교양 함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차례 군부대 순회강연을 나가 “당신들은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병영에 앉아서 음풍농월이나 하고 있는가. 나라 구할 주인공은 군인밖에 없다. 혁명 대열에 앞장서라”라고 선동했다.

그러던 지식인과 언론과 미국은 박정희가 불과 3,500여 명의 군이 동원된 5·16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재빨리 안면을 몰수하고 군사정권 비판의 칼을 빼들었다. 5·16을 혁명이라고 미화 찬양하는 데 앞장섰던 장준하는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로의 복귀”라는 글에서 군은 신속치 민주정치로 복귀하라고 촉구했다.

열심히 쿠데타 부추긴 지식인·미국·언론

함석헌도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에서 민중이 침묵하는 것은 총성에 마취되었기 때문이며, 참된 혁명은 학생도 군인도 아니고 민중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열심히 군부 쿠데타를 부추겼던 미국은 어땠을까?

5·16이 발생했을 때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은 월터 매카나기 대사가 이승만을 퇴진시킨 데 따른 공로를 인정받아 1960년 4월 미 국무성의 극동담당 차관보로 영전해 갔고, 마샬 그린 참사관이 대사 직무대리를 맡고 있었다.

5월 16일 오전 10시 18분.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미8군 공보처의 AFKN 방송을 통해 “유엔군사령관 자격으로 나의 지휘계통에 있는 모든 군대가 장면 총리가 이끄는 합법적으로 인정된 한국 정부를 지지하도록 촉구한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거의 비슷한 시각 마샬 그린 주한 미 대리대사도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본인은 자유롭게 선출되고 헌법에 따라 수립된 한국 정부를 지지하는 유엔군 사령관의 입장에 완전히 동의한다. 본인은 미국이 지난 7월과 8월, 한국 국민들에 의한 헌법절차에 따라 선출·수립된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분명히 밝힌다.”

주한미군 사령관(유엔군사령관 겸임)과 주한 미국대사 두 사람이 연이어 “군사 쿠데타는 무효”라고 선언한 것이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매그루더 장군은 자신의 허가 없이 쿠데타군이 병력을 동원하여 서울 요지를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권한이 침해당한 데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미군의 허가 없이 작전지역을 이탈한 쿠데타군의 원대복귀를 촉구하는 성명을 계속 방송했다.

유엔군 사령관과 주한 미 대리대사가 발표한 두 건의 성명서는 국무부의 사전 지시나 훈령이 없었고, 또 승인을 받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매그루더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군부 내 불순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닌지 우려하면서 주한미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또 이한림 1군사령관과 힘을 합쳐 쿠데타군 진압을 위한 4단계작전 수립을 진행했다. 장면 총리의 정치고문인 미국인 도널드 위태커는 장도영 총장을 찾아가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으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강력 항의했다.

매그루더와 그린 두 사람의 성명은 케네디 행정부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앞서 나간 것이었다.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의 성명 발표 소식을 접한 램니처 미 합참의장은 매그루더에게 간접적인 질책과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백악관 회의에서 귀하의 성명은 한국의 내정에 심각하게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나갈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멀리 나건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된 바, 앞으로는 가급적 추가적인 성명발표를 자제하라.”

두 사람의 성명은 케네디 행정부의 의중과는 부합되지 않는 ‘부적절한 조치’로 경고를 받은 것이다.

장면 총리가 잠수를 탄 상황에서 국가 위기를 지도할 인물은 윤보선 대통령이었다. 헌정사상 초유의 군사 쿠데타에 대한 윤보선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총리는 잠적,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 반대

5월 16일 오전 11시 윤보선 대통령의 요청으로 그린 대리대사와 매그루더 사령관이 청와대를 방문하여 3시간 반 동안 요담했다. 매그루더는 이 자리에서 “쿠데타는 군 내부의 소수 그룹에 의해 저질러졌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정부에 충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소수 반란군의 총칼 앞에 정부의 권위가 눌린다면 이것은 한국의 장래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린 대리대사도 “장면 정권이 국민들에 실망을 주고 불만을 사고 있지만 정부 나름대로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치유하는 데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보선 대통령은 두 사람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은 강력한 정부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 장면 씨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능력이 없다”면서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소장, 국방부장관 등을 만나볼 때까지는 쿠데타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말로만 쿠데타 진압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에 나섰다. 5월 17일 오전, 이한림 1군사령관은 윤보선 대통령이 파견한 특사(김남 국방담당 비서관과 김준하 공보담당 비서관)을 통해 윤보선 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 내용은 “북에 공산당을 두고 아군끼리 싸우면 내일의 한국 운명을 장담할 수 없다. 국군끼리 충돌과 출혈을 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오후 2시 50분에는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이 원주의 1군사령부로 날아왔다. 이날 매그루더는 이한림과의 회담에서 “미8군은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를 반대하며, 박정희 소장의 폭거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민주당 정부의 회복을 위한 군의 행동을 찬동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한림은 장면 총리와의 연락이 두절된 데다가 윤보선 대통령의 쿠데타 진압 반대를 지시한 친서를 받은 상황이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결국 쿠데타군 진압을 포기했다. 이한림은 그 이유를 자신의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민주당 정권의 부실 때문이다. 민주당 자체의 파벌 싸움에서부터 같은 배를 탄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불화 및 그들의 결단력 부족에서 오는 통치능력의 회의.

둘째, 지난 30시간여에서 보여준 장면 총리의 도피 행각과 그 정권의 철저한 위기관리 능력의 전무 상태.

셋째, 만약 내가 쿠데타군을 진압하여 민주당 정부의 국권을 회복시켜 준다고 할 때 과연 이를 지탱할 능력이 있겠느냐는 회의.”(이한림 회상록, 『세기의 격랑』, 팔복원, 2005, 361쪽).

이러한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5·16은 박정희와 쿠데타군이 막강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당시 합헌적 정부와 국가지도부의 무능과 의견 차이로 성공시켜 준 셈이다. 장면 총리가 결단을 내려 군의 불온한 움직임을 발본색원했다면, 윤보선 대통령이 단호하게 쿠데타군 진압을 명령했다면 5·16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2공화국은 지도부의 분열로 자멸한 셈이다.

내가 끼지 못하면 물고 뜯고 씹고

미국 정부는 5월 말이 되어서야 「특별국가 정보판단서」에서 5·16이 성공했음을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6월 9일 그린 대리대사는 쿠데타 지도자 박정희 장군과 장도영 장군을 만나 하루 전에 미 국무성으로부터 지시받은 내용을 제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박실,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대사관』, 백양출판사, 1993, 208쪽).

①국가재건최고회의를 우호적이고 신의를 바탕으로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의 정부로 보고 있다.

②혁명공약 6개조를 신의를 바탕으로 환영하고 수락한다.

③한국 국민과 미국의 공동이익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우호관계의 수립을 희망한다.

④머지않아 부임하게 될 사무엘 버거 대사가 경제개혁을 포함한 미국과의 협력방안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⑤미국 정부는 유엔군사령부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공동성명을 환영한다.

미국은 6월 9일이 되어서야 쿠데타의 성공을 인정한 것이다. 5·16을 부추긴 세력은 지식인·언론·미국이었다. 하지만 막상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이들은 반대로 돌아서서 군사정권과 박정희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아무리 구국의 쿠데타라 해도 자기가 낄 자리,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상황이 되면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물고 뜯고 씹는 주인공으로 돌변했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 500년 동안 “아니되옵니다”를 외쳐온 소위 먹물, 문민 양반 유생 후예들의 숨길 수 없는 민낯이었다.

이 글은 박정희기념재단이 2019년 5월 16일 주최한 '대한민국 국가건설과 5·16 특별좌담회'에서 발표한 '5·16을 부추긴 세력은 누구였나?-5·16과 관련한 지식인·언론·미국의 역할' 내용입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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