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군이 피로써 지켜낸 화천발전소는 이후 대한민국 산업화의 동력원이 되어 나라의 발전을 이끌어낸 경제의 심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중국 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지우려는 친중 사대주의자들의 무지막지한 폭거는 대한민국 지성사의 붕괴를 의미하는 참사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파로호를 대붕호니 나발이니 하고 앵무새처럼 되뇌는 세력들을 우리는 친중파·친북파·친공산파로 정의하고, 그들 이름을 친중인명사전에 새겨 영원무궁토록 저주하자.

중공군 대공세를 맞받아쳐 2만 5000여 명의 중공군을 몰살시킨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저수지로 불리던 이 호수를 '파로호'라고 명명했다. 이 명칭을 중국 공산당의 압력을 받은 친중 사대주의자들이 엉뚱한 이름으로 바꾸겠다고 나섰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중공군 대공세를 맞받아쳐 2만 5000여 명의 중공군을 몰살시킨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저수지로 불리던 이 호수를 '파로호'라고 명명했다. 이 명칭을 중국 공산당의 압력을 받은 친중 사대주의자들이 엉뚱한 이름으로 바꾸겠다고 나섰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강원도 화천의 호수 개명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제기되었다. ‘파로호(破虜湖)’라 불려온 호수 이름을 ‘대붕호(大鵬湖)’로 뜯어고치려는 작전세력이 나타난 덕분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작전 세력은 중국 정부와 문재인 정부, 그들을 지지하는 국내의 친중(親中)·친좌파 합작세력이라는 특징을 보이는 것이 독특하다.

70년 가까이 불려온 파로호란 지명을 느닷없이 대붕호란 정체불명의 지명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나선 세력의 말단에 서 있는 단체가 ‘남북강원도협력협회’와 화천군 간동면 주민공동체로 알려진 ‘대붕호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난 5월 24일부터 2박 3일간 ‘DMZ 대붕호 평화문화제’라는 행사까지 열었다. 행사의 목적은 “파로호가 아니라 대붕호!”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 문화제의 강사로 초빙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평화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평화를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동족과 나누어야 한다”며 “우리는 퍼주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합당한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평화를 위해서라면 ‘파로호’ 같은 지명 따위는 중국이 원하는 대로 통 크게 바꿔줘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1951년 화천전투 당시 유엔군과 국군에게 사살당해 파로호에 수장 당한 것으로 알려진 중공군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취지에서 문화제 행사 중에 황해도 만신 이해경의 ‘해원상생제’란 굿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1944년 화천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인공호 조성

이제 파로호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1939년 7월 조선총독부는 한강 유역의 전원개발을 위해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가 총 설비용량 10만 8,000㎾, 총 저수량 10억 2,000만㎥의 댐수로식 발전소를 착공, 1944년 5월에 2만 7000㎾ 용량의 제1호기, 같은 해 10월 제2호기가 준공되었다. 제3호기는 기기설치 도중, 제4호기는 기초공사 완료 후 일본의 패망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문제의 파로호는 자연호가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화천수력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의 북한강 협곡의 물길을 가로막아 인공댐을 건설하면서 조성된 인공호다. 조선총독부는 인공댐 이름을 대명제(大䳟堤)로, 댐으로 인해 생겨난 인공 호수를 대명호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에 날개 길이가 삼천리, 하루에 9만 리를 날아간다는 상상 속의 새 대붕(大鵬)이 살았다는 전설을 근거로 하여 인공댐 이름을 대붕제(大鵬堤), 저수지를 대붕호라 불러줄 것을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서 38선 이북 지역이었던 이곳에 북한은 화천저수지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함경도 북쪽에는 해발 1000m가 넘는 광활한 개마고원이 펼쳐져 있다. 이 고원에 모인 물이 장진강, 부전강이란 강줄기를 이루어 압록강으로 흘러간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엔지니어 겸 사업가 노구치 준(野口遵)은 장진강과 부전강의 물줄기를 막아 인공호수를 조성한 다음, 터널을 파서 낙차가 큰 동해 쪽으로 물길을 돌려 수력발전소를 건설했다. 여기서 얻은 전기를 이용하기 위해 1930년 흥남 해안가에 연산 48만 톤, 세계 2위 규모의 대규모 유안비료 공장을 건설했다. 이것이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다.

부전강, 장진강 발전소에서 풍부하고 값싼 전력이 공급되자 연관 산업들이 흥남 일대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석회석과 무연탄을 원료로 하여 카바이드를 만들고, 이 카바이드를 이용하여 석회질소비료를 비롯한 각종 유기화합물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 또 북한에서 생산되는 동, 아연 등의 비철금속을 제련하기 위한 각종 제련소도 건설됐다.

노구치 준은 압록강 물줄기를 막아 수풍발전소도 건설했다. 평북 삭주군 청수읍 수풍동, 신의주 동북쪽 80km 지점 위치한 수풍발전소는 1937년 10월에 완공된 세계적인 규모의 수력발전소다. 물길을 막은 댐의 길이가 900m, 낙차 106.4m, 총설비용량 64만kW, 최대출력 54만kW의 발전을 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절반씩 공급했다. 일본질소비료회사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많은 인력이 한반도를 드나들었는데, 직원들의 한국 출장과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반도호텔을 지었다.

1948년 1월 남한의 전력 소비량은 10만kW였는데, 이 중 7만 1000kW가 북한에서 공급되었고, 국내에서의 발전은 2만 9000kW에 불과했다(임영신, 『재계회고(7)』, 한국일보사, 24쪽).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된 지 나흘 후인 5월 14일, 북한이 사전 통고 없이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 그 결과 생산 활동이 마비되고 일반 가정까지 암흑천지로 변하는 등 혹심한 전력난에 시달려야 했다.

화천전투에서 중공군 2만 5000여 명 섬멸

북한이 예고 없는 단전을 하는 바람에 남한이 아비규환 상태에 빠지자 미 군정청은 미군 발전함인 자코나호(출력 2만㎾)를 부산항에, 일렉트라호(6,900㎾)를 인천항에 배치하여 겨우 버텨나갔다.

북한이 1948년 5.14 단전으로 전력 공급을 중단하자 미군정청은 발전함 자코나호를 부산에 보내 발전을 하여 위기를 넘겼다. 사진은 부산항에서 발전을 하고 있는 자코나호다. 6.25 전쟁 과정에서 남한 지역의 거의 모든 발전소가 부서져 발전함에서 얻는 전기 3~4만kW로 겨우 버텼다.
북한이 1948년 5.14 단전으로 전력 공급을 중단하자 미군정청은 발전함 자코나호를 부산에 보내 발전을 하여 위기를 넘겼다. 사진은 부산항에서 발전을 하고 있는 자코나호다. 6.25 전쟁 과정에서 남한 지역의 거의 모든 발전소가 부서져 발전함에서 얻는 전기 3~4만kW로 겨우 버텼다.

불행하게도 화천수력발전소는 38선 이북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다. 일본이 남겨놓고 간 발전소 덕분에 전기가 남아돌던 북한은 화천수력발전소의 일부 시설만을 가동하여 38선 이북의 강원도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던 중 2호기 발전시설을 장진강발전소로 이전하려 했다.

이 와중에 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유엔군 북진 과정에 화천수력발전소가 대한민국 수중으로 넘어 왔다. 6·25 당시 남한 지역은 거의 모든 발전소가 파괴되어 심각한 전력난에 처했다.

1951년 8월 기획처 조사에 의하면 기존 발전능력의 80%가 전쟁 피해를 입었다. 인천항에 게류되어 있던 발전함 일렉트라호는 적에게 넘어갈 상황이 되자 자폭시켰다.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6월 준공된 목포 중유발전소(5000kW)도 크게 부서졌다. 미군은 부산·마산·목포·장생포·인천항에 5척의 군용 발전함을 띄워 당장 급한 전력을 공급했지만, 발전함 전력을 다 합쳐도 3~4만kW가 전부였다.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1월, 화천발전소의 제1호기 복구를 완료하고 시운전을 시작했으나, 중공군의 대공세로 인해 또 다시 화천발전소를 빼앗겼다. 화천발전소를 확보하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는 뜨거웠다. 그 결과 화천발전소를 둘러싸고 다섯 차례나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화천발전소의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6·25 전쟁사에는 화천발전소를 둘러싼 의미심장한 전투가 두 차례 벌어졌다. 1951년 5월 26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미 제7사단 제17연대,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가 화천 일대의 중공군 10·25·27군 등 3개 군을 포위 섬멸했다. 이것이 화천전투다.

중공군은 대대 단위로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으나 퇴로를 봉쇄한 국군과 유엔군이 사흘간에 걸쳐 중공군을 섬멸하여 화천저수지가 피로 물들었다. 이때 중공군 2만 4,141명을 사살하고 수많은 병력이 포로가 되었다. 중공군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전투로 기록될 만한 대사변이었고, 국군과 유엔군 입장에서는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당시 현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화천저수지에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휘호를 내렸다. 화천발전소를 다시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1952년 복구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제1호기를 복구한 와중에 또 다시 중공군과 국군 간에 대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이 휴전협정 직전 강원도 김화군 근동면, 화천군 간동면 일대에서 벌어진 금성전투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다. 그 결과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마산·대구·영천·논산·광주·부평 등지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 7,000여 명의 포로들이 일시에 석방되었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하자 중공군 동부전선에서 대공세

부평수용소에서는 400여 명의 포로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유엔군 포로 관리병들이 총격을 가해 30명이 사망했다. 6월 21일까지 계속된 반공포로 탈출과정에서 61명의 포로가 사망했고, 1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휴전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에서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을 경악시켰다. 공산측은 탈출한 반공포로의 전원 재수용을 요구하면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휴전은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유엔군과 공산 측에게 분명히 보여주었다. 강대국들의 적당한 타협으로 휴전하고 한반도를 영구 분단하려는 기도를 흔들고,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기 위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자적인 결단에 의해 반공포로가 석방되면서 조인 직전에 와 있던 휴전회담이 중단되자 중공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작전을 준비했다. 중공이 반공포로 석방에 강력 대응한 이유는 6·25 전쟁 당시 불법으로 개입한 중공군은 90% 정도가 장제스(蔣介石) 군대에서 투항해 온 병력들이었다.

이들이 한국전에서 국군·유엔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이들이 중공으로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행을 선택하는 상황이 되자 중공이 큰 충격과 분노를 느껴 시쳇말로 “뚜껑이 열린” 것이다. 중공은 마지막 총공세를 퍼부어 한국군에게 패배를 안기고 휴전협정을 체결하고자 했다. 그것이 1953년 7월 13일부터 시작된 금성전투다.

금성전투는 그 전까지 중공군이 치렀던 전투와는 성격이 달랐다. 곧 체결할 정전협정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유엔군과의 전투는 피하고 오로지 국군만을 목표로 하여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한 금성전투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한 숫자에 해당하는 국군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다는 것이 첫째 목적이요, 둘째는 38선 북쪽으로 크게 치고 올라온 동부지역의 전선을 두들겨 춘천-홍천을 연결하는 38선 라인으로 밀어 내리기 위해서 였다. 

이 작전을 위해 펑더화이는 중공군 4개 군 산하 12개 사단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지역 돌출부에 대한 마지막 총공세를 감행했다. 한국군 18만 명, 중공군 24만 명이 대대적으로 충돌한 것이다. 

초전은 중공군이 국군 전선 돌출부의 어깨에 해당하는 부분을 강타하면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주도권을 쥐었다. 후방 지휘소까지 무너지자 7월 15일 국군 제2군단(5·8·11사단)은 화천발전소를 노리고 진격해오는 중공군을 사력을 다해 저지했다. 폭우가 내려 중공군 진격이 주춤한 사이, 국군 제2군단은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한겨레신문, “일제 지명 바꾸기”로 거짓 보도

중공군은 국군보다 2~3배에 달하는 대병력을 투입하고도 국군의 반격에 밀려 점령했던 금성천 북안의 주요고지 절반을 다시 내주고 패퇴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주요 획득 목표였던 화천발전소도 박태준 전 국무총리가 지휘한 5사단 36연대의 용맹분전으로 확보에 실패하고 엄청난 병력 손실만 기록했다.

우리 국군은 전투 과정에서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까지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간진현-금성천-462고지까지 중공군을 되받아치는 데 성공했다. 1주일간 진행된 금성전투에서 국군이 패했다면 휴전선은 춘천-홍천 라인까지 밀려 내려왔을 것이다.

국군은 전사 1,701명, 부상 7,548명, 그리고 4,136명이 포로가 되거나 실종되었다. 반면에 중공군 2만 7,216명을 사살했고 3만 8,700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으며, 포로 186명을 획득했다. 국군은 3분의 1에 불과한 병력으로 중국의 대공세를 맞받아쳤으나 이 과정에서 금성 전역 약 40km에서 평균 4km씩의 영토를 잃었고, 4,136명의 실종 및 포로를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 정부는 긴급 과제로 떠오른 전력 확보를 위해 화천발전소 수리에 돌입했다. 휴전 직후 제2호기 복구에 성공했고, 3호기 설치공사는 1957년 9월 완료되어 설비용량이 8만 1,000㎾로 증가되었다.

1955년 11월 18일 육군 6사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파로호 명명식을 거행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65년 간 잘 사용되어 오던 호수의 명칭 변경 문제가 불거진 첫 보도는 한겨레신문(2019년 3월 6일자)이다.

이날 한겨레신문은 3·1운동 100돌과 남북 평화시대를 맞아 강원도 화천 ‘파로호’ 이름을 애초 지명인 ‘대붕호’로 바꾸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한겨레 보도에 의하면 강원도가 느닷없이 파로호 명칭 변경을 추진하려는 이유는 “3·1운동 100돌을 맞아 일제가 왜곡했던 지명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한겨레신문은 “주민들은 남북 평화의 시대에 중국과 북한에 대한 적대 의식을 담은 파로호라는 명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또 강원도는 화천군과 함께 주민 여론을 수렴한 뒤, 지명 변경을 위한 행정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겨레신문의 관련 보도는 허위 뉴스라는 사실이 지역 언론인 강원도민일보 보도(4월 12일자)를 통해 밝혀졌다. 문재인 정부가 3·1절 100돌을 맞아 강원도에 “냉전의 상징인 파로호 명칭을 기존의 대붕(大鵬)호로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과 전혀 상의 없이 파로호 명칭 변경을 강행하려 하자 화천문화원 등 화천지역 사회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5월 21일, “지역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파로호를 대붕호로 바꾸려는 시도를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파로호 명칭 변경과 관련된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파로호 명칭 변경은 한겨레신문이 보도한대로 “일제가 왜곡했던 지명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근원지는 중국 정부였고, 노영민 당시 주중대사가 중국 정부의 압력을 받았다. 그가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 불똥이 강원도로 튀었다. 6·25 전쟁 당시 치욕스러운 패배를 두 차례나 당한 중국 정부의 압력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명칭 변경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중국 압력 받자 강원도에 '파로호' 명칭 변경 요구한 문재인 정부

‘DMZ 대붕호 평화문화제’를 주관한 사람들은 남북 화해와 평화의 시대에 적대감을 부추기는 파로호 명칭은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헌수 ㈔남북강원도협력협회 이사장은 언론과의 대화에서 “평화는 우리와 다른 이방인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호혜·친선의 관계를 확장하는 실천을 통해 열린다. 참혹한 전장이었던 바로 이곳 대붕호에서 평화의 문명을 열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진수 문화제 집행위원장도 “파로호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것은 한·중 친선은 물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라면서 “우선 파로호부터 본래 이름인 대붕호로 바꾸는 일에서 그 단초를 찾고자 한다”고 밝혔다.

심지어 한겨레신문은 6·25 전투 당시 중공군의 시신을 파로호에 수장(水葬)한 것을 비난하는 보도를 한 바 있다. 이 신문(2018년 6월 26일자)은 파로호 관련 보도에서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이 중국군의 주검을 일부러 파로호에 수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면서 “제네바협약 17조는 ‘사망한 적을 그의 종교 관례에 따라 매장하고 유해의 송환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이 사람들은 대체 국적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피아 구분이 어려운 상황이다. 또 대붕호란 지명의 어원은 상상 속의 새 대붕(大鵬)에서 기원한 것으로, 그 근거는 중국 고전 『장자(莊子)』다. 이쯤 되면 완연한 친중파라고 비판해도 별 무리는 없겠다.

파로호는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과 체취가 묻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호수 옆에 서 있는 ‘파로호’ 비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 휘호다. 이곳은 6·25 전쟁 당시 두 차례나 중공군에게 대승을 거둔 역사적 현장이요, 휴전선이 오늘의 모습처럼 38선 북쪽으로 크게 치고 올라간 피어란 전투가 벌어졌던 호국의 현장이다.

또 우리 국군이 피로써 지켜낸 화천발전소는 이후 대한민국 산업화의 동력원이 되어 나라의 발전을 이끌어낸 경제의 심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중국 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지우려는 친중 사대주의자들의 무지막지한 폭거는 대한민국 지성사의 붕괴를 의미하는 참사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파로호를 대붕호니 나발이니 하고 앵무새처럼 되뇌는 세력들을 우리는 친중파·친북파·친공산파로 정의하고, 그들 이름을 친중인명사전에 새겨 영원무궁토록 저주하자.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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