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철과 박정희는 여러 가지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초기 단계에서 독점을 허용하여 하루속히 공장 규모를 국제규모로 성장하도록 유도했다. 그 기업이 충분히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면 경쟁체제로 들어가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독점기업 육성, 정경협력, 경제독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국제경쟁 단위의 중화학공업 건설 작전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사나이들의 세계에선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는 주군(主君)에게 목숨을 바친다. 오원철과 박정희 대통령의 관계가 그럴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스스럼없이 “국보(國寶)”라고 불렀던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이 5월 30일 눈을 감았다. 향년 91세.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오원철을 빼놓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화학공업의 큰 물꼬를 터 주었고, 농업국가 한국에 세계 최고 수준의 중화학공업을 건설한 주인공이 오원철이기 때문이다. 

1969년 닉슨 독트린에 의하여 주한미군 제7사단이 철수하면서 안보위기가 도래했다. 미국은 “이제 아시아 국가들은 당신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라”라고 선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독자적인 능력으로 이 나라를 지킨다는 자주국방을 결심하고 250만 향토예비군을 조직했다.

그 많은 예비군을 무장시킬 무기가 필요했다. 당시 한국의 공업 수준은 소총은 물론이요 총탄 한 발 못 만드는, 그저 의류봉제를 중심으로 한 경공업 제품 수출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는 수준이었다.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정도를 만들던 나라가 어떻게 M1 소총과 박격포, 105㎜ 야포를 생산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국가 최대의 관심사로 등장한다. 

1970년대 초,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과 남한의 군사력 격차는 3 대 1이라고 평했다. 북한은 총기류는 물론 각종 야포와 탱크, 군함과 잠수함에 이르기까지 북한 내에서 대량생산하고 있을 때 우리는 소총 한 자루 제대로 못 만드는 수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백척간두에 선 국가안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때 그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오원철 당시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차관보였다. 오원철의 지론에 의하면 무기 개발을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과제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간단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1971년 11월 10일 방위산업 추진을 위한 구상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의 보고 내용을 오원철의 저서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

“여하한 병기도 분해하면 부품상태가 됩니다. 이 부품은 규정된 소재를 사용해서 설계도면대로 가공하면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제작된 부품을 조립하면 병기는 완성됩니다. 각 부품을 가공하는 공장이 몇 개, 몇십 개가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결합된 병기의 성능은 완벽한 것이 됩니다. 

문제는 병기의 정밀도가 100분의 1㎜인데, 현재 우리나라의 가공수준은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병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100분의 1㎜를 가공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선결 문제입니다. 그 방법으로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유관 민수공장을 선정해서 부품별 또는 뭉치별로 분담 생산시키자는 것입니다. 각 업체는 모든 노력을 다해 할당된 부품을 정밀가공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생산된 부품은 한국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정밀검사를 실시해서 합격한 것만 선정해서 조립하면 병기는 완성됩니다. 이런 방식을 채택하면 당장이라도 병기개발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날 오원철 차관보는 우리나라처럼 없는 살림에 무기만을 만드는 전용 공장을 만드는 것은 낭비라는 사실, 따라서 무기 전용 공장이 아니라 민수용 기계부품을 만드는 기계공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 이 공장들은 평소에는 산업용 자재를 생산 수출하고, 전시에는 병기 부품을 생산하는 민수·군수 겸용으로 건설되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오원철은 무기만 만드는 병기 전용공장이 아니라 민수용 기계공업 공장을 건설하여 여기서 부품을 깎아 조립하는 방식으로 병기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아이디어는 기계공업 분야에서는 거의 불모지였던 한국 상황에서 볼 때 충격적일 정도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오원철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심사숙고 방위산업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박정희는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 즉시 병기개발을 시작하라고 전하시오. 대통령 명령이라고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유사시에는 병기를 생산하고, 평화시에는 민수부문으로 전용하여 수출산업화 함으로써 병기 생산능력을 극대화하는 오원철의 방법론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다음날인 11월 10일, 오원철을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여 국산 무기 개발에 돌입했다. 1972년 1년 간 군 당국과 민간기업의 노력을 통해 개발된 기초화기의 시제품 생산에 착수했다. 그런데 시제품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소재의 부적합, 가공시설의 정밀도와 가공기술 미흡 등으로 성능이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습니다”

1972년 5월 30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무역확대진흥회의가 끝난 후 오원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을 보고했다. 오원철의 저서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에는 당시 보고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정과 같습니다. 그 뒤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했을 때,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도입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일본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수출의 주력 상품이 되었습니다.” 

며칠 후 또 다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간 오원철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소재나 부품, 중간제품의 국산화를 위해 종합제철, 석유화학, 조선, 전자, 방위산업과 자동차공업 건설을 건의했다. 오원청의 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 건설과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 건설계획 작성을 지시했다.  

1973년 1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하게 된다. 오원철의 아이디어에 의해 10년의 세월과 80억~100억 달러의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는 대역사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은 최고의 정책이었다.

당시 한국의 수준은 민간 경제 부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를 아는 사람이 없는 후진국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정부뿐이었다. 때문에 정부, 즉 오원철과 박정희는 지어야 할 공장을 선정하고, 우선 순위를 정했으며, 공장을 지을 때 들어갈 자금도 지원해주고, 공장이 지어진 후에는 어떻게 보호를 하겠다는 계획까지 미리 알려준 다음 민간 기업에 그 임무를 맡겼다. 

국제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려는 후진국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수요가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 기업에게 독점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공업화 초기 단계에서 독점기업을 만들어, 이 기업을 적극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독점 시비, 재벌 육성, 정경유착 같은 비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개발도상에 있는 후진국 상황에서 경쟁이 만능은 아니란 사실을 오원철과 박정희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정부 역할은 각 분야 공업이 국제규모로 성장하여 국제경쟁력이 생길 때까지만 도와주고, 그 후에는 민간주도 형태로 전환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도저히 산업화 추진이 불가능했다. 

오원철과 박정희는 여러 가지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초기 단계에서 독점을 허용하여 하루속히 공장 규모를 국제규모로 성장하도록 유도했다. 그 기업이 충분히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면 경쟁체제로 들어가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독점기업 육성, 정경협력, 경제독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국제경쟁 단위의 중화학공업 건설 작전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비판을 하든 말든…

오원철을 비롯한 국가의 핵심 인재들이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국산 무기 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있을 때 야당 일각에서는 “국가안보를 정권 연장 수단으로 이용한다”면서 예비군 폐지 운동을 벌였다. 

예비군을 폐지하라는 야당의 주장이 제기되자 박 대통령은 “예비군 폐지 발언은 김일성 환영대회를 여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강력 비판했다. 1972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비장한 심정으로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그의 자주국방 철학은 간단했다. 자기 집에 불이 나면 무조건 그 집 식구들이 먼저 불을 꺼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 산업이란 특성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후진국에서 한국과 같은 규모의 거대하고 종합적인 중화학공업을 추진한 나라는 한국이 처음이었고, 성공한 사례도 없는 전무후무한 시도였다. 계획 자체가 워낙 대담했고, 요구되는 기술과 노하우, 투자자본도 충분치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해외의 전문가들은 “현실을 무시한, 장밋빛 환상에 젖은 탁상 계획”이라고 비판했다. 대중경제론에 심취해 있던 국내 정치인·학자·언론들도 ‘무모한 발상’이니 ‘나라 망해먹을 짓’이라는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 추진된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비교우위에 따른 시장의 산업특화 기능에 역행하는 반(反)시장 정책이며, 특정산업을 육성하는 산업 정책은 정부가 해서는 안 되는 정책이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세계무역기구(WTO)는 정부 주도의 육성정책은 “불공정 교역을 조장하는 관행”이라며 금지하고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들이 뭐라고 비판을 하든 말든 오원철을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고, 대업을 맡겼다. 이때부터 오원철은 박 대통령의 태스크포스(task force)로서 1971년 11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인 방위산업 육성을 첫 임무로 맡았다. 그 후 박 대통령의 중점 사업인 중화학공업 육성, 원자핵개발 연구, 기술인력 양성, 연구개발 계획, 임시 행정수도 건설계획 등을 담당했다.

오늘 우리는 오원철 수석과 박정희 대통령이 터를 닦은 그 혜택을 무한히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아 왔다. 하지만 그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들이 오원철과 박정희를 향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무책임한, 때로는 사기극이나 다름없는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가 항상 가장 가혹한 비판자 노릇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호암자전』에 나오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말이다. 고(故) 오원철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원 없이 일을 했고, 국가발전의 기틀을 다졌으니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즐거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존재를 알아주는 ‘박정희’ 같은 거목이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하신 '국보' 오원철 수석에게 머리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 분의 명복을 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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