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서울 정동에 있는 중명전(重明殿)은 원래 덕수궁 안에 있던 전각이었다. 궁궐이 이리저리 찢겨나가던 과정에 중명전은 덕수궁 담장 밖으로 밀려나 지금은 그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중명전은 벽돌로 된 2층 양옥으로, 전통 양식의 다른 궁궐 전각과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외관상으로도 덕수궁과 관련지어 생각하기 어렵다. 중명전은 수옥헌(漱玉軒)이라는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졌지만 1904년 덕수궁의 대화재 이후 고종이 임시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명전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의 현장이다. 입구의 왼쪽에 있는 ‘을사늑약의 방(제2전시실)’에는 당시 상황을 재현한 듯 마네킹들을 설치해두었다. 이는 일본 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한규설 등 대한제국 대신 여덟 명의 모형이다. 벽면 스크린에서는 동영상이 반복적으로 방영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신들 한 명 한 명에게 의견을 물어 협약에 대한 찬성을 얻어내는 내용이다. 이 동영상만 보면 억지 주장을 하여 우리 민족을 식민지로 만든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에게 분노하게 된다. 또 그 옆방에는 “고종, 을사늑약에 반대하다”라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고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를 만난 자리에서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다는 해설이 실려 있다.

정말 고종이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을까? <고종황제실록>을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다. 또 을사늑약 체결의 자초지종을 동영상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동영상의 대화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록에 따르면 1905년 11월 15일 일본 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공사 하야시 곤노스케가 고종을 만나 협약문 초안을 제출하였고 11월 17일 한일협상조약, 이른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실록의 이 날짜에는 어떻게 협약이 맺어졌는지 쓰여 있지 않다. 그러나 협약 체결 다음 날부터 이를 무효로 돌리고 체결에 관여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가 빗발쳤다며 상소문의 내용들을 거의 모두 옮겨 실었다. 그 상소들에 고종은 대략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대체로 경은 노숙한 사람으로서 나라 일을 우려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지성을 가지고 물론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또한 그 일에 어찌 헤아린 점이 없겠는가? 경은 이해하도록 하라"
"그대는 여러 상소문에 대한 비답을 보지 않았는가?"
"이런 말은 하는 게 당연하지만 어찌 짐작하여 헤아린 것이 없겠는가?"
"그대들의 말은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니 거듭 번거롭게 굴 것은 없다."
"너의 충성심을 알겠으니 다시 상소할 필요가 없다."
"간절한 말이 필경 근심과 울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다.”
"이미 여러 번 칙유하였으니 이해해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구는가? 경들의 충성스러운 말을 왜 모르겠는가? 속히 물러가라. … 이미 거듭 타일렀는데도 지루하게 구니, 자못 서로 믿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근심과 울분에 찬 경의 정성으로 본래 이런 말을 할 줄은 알았지만 또한 짐작하여 헤아릴 것도 있다. 대신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면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올린 상소에 진달한 것을 어찌 각성해서 보지 않았겠는가? 전에 내린 비답에 하유한 것 또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추운 날씨에 분주하게 길을 오자니 어찌 몸이 상하지 않았겠는가? 참으로 염려스럽다."

위의 비답들에 보인 고종의 태도로는 그가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던 군주라고 보기 어렵다. 심지어 “당장의 위태로운 형편은 기울어져 엎어지기 쉽게 생긴 물그릇이나 물이 새는 배에 비길 정도가 아닌데”라고 상황을 가볍게 표현하기도 했다. 11월 28일에 이르자 고종은, 대궐 안에 이틀째 머물러 있는 한일협상조약 관련 상소의 소두(疏頭 : 상소의 맨 위에 이름을 올린 사람) 이하를 모두 법부에서 잡아 징계 처분하게 하라는 조령까지 내렸다.

을사늑약 체결의 전말은 12월 16일 이른바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 등이 올린 사직 상소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상소에 의하면 우선 그들은 을사늑약을 “ …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 ”라며 낙관적으로 여겼던 듯하다. 또 “ …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다퉜어야 했고 그래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 ”라며 조약 체결을 죽음으로 반대하지 않는 그 모든 자를 비난했다.

그리고 비로소 조약 체결의 전말을 밝혔다. 중명전에서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실록에서 더 신중하게 봐야 할 것은 동영상에 실린 대화 이전의 상황이다.

“ … 11월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조약의 초안)를 제출하니, 폐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정부에 맡기셨습니다. 이튿날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및 신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은 대사가 급박하게 청하여 한 데 모였고 … 모두 어제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문답을 반복하였으나 신들은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파하고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뵙고 응답하였는데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아뢰었고 이어 아뢰기를, ‘내일 또 일본 대사관에 가서 모여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들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버리겠습니다’라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 ”

이 상소에 의하면 이튿날 17일에도 고종과 대신들 사이에 긴 논의가 이어졌다. 그 중 이완용이 “ … 만일 할 수 없이 허용하게 된다면 이 약관 가운데도 첨삭하거나 개정할 만한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가장 제 때에 잘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코 그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 대사도 말하기를, 이번 약관에 대해서 만일 문구를 첨삭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응당 협상하는 길이 있을 것이지만, 완전히 거절하려고 하면 이웃 나라간의 좋은 관계를 아마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그 약관의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도 있을 듯하니 학부대신(이완용)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라고 거들었다. 그러면서 이 조약 초고 가운데 무엇을 고칠 것인가에 대해 다시 논의하였다.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에는 여덟 사람이 똑같이 말했다.

“이상 아뢴 것은 실로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한규설 등 여덟 대신이 조정에서 물러나온 뒤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접견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번 전하였다. 그런데 고종은 “짐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잘 협상하라”라고 인편으로 전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바로 동영상의 대화이다. 그때 고종이 직접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거부의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동영상 같은 구차한 대화도 없었을 것이고 을사늑약이나 합방을 미루거나 막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의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아쉬움까지 떨칠 수는 없다.

고종의 “잘 협상하라”라는 말에 대해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케는 “귀국은 전제국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또 여러 대신이 반대의 의견을 낸 데 대해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동영상에 소개된 대신들과의 대화 후 이토 히로부미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칙령을 받들어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실제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 속히 조인하기 바란다는 자신의 말을 고종에게 전하게 했다. 한참 후 고종의 답변이 돌아왔다.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법부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이에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 민영기, 이하영은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협의를 했다.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에 갓도 쓰지 않고 지밀한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곧 되돌아왔다. 분분하던 의견이 진정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대신들이 말하는 대로 직접 조약 초고를 고치고 다시 고종에게 보고하여 ‘통촉’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전말을 밝히며 상소를 올린 다섯 명은 자신들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 항변했다. 책임이 있다면 8인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올린 상소에 대해 고종은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라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마는, 혹 부득이한 상황으로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여론이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또한 해명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 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비답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 고종은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을 일본국 보빙대사로 임명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보빙대사는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외교관이다. 그때 일본에 보빙대사를 파견한 고종의 행동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과연 고종이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다는 얘기가 사실이기는 한 걸까?

<고종황제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성한 ‘편찬 경위’에 의하면 <고종황제실록>은 <순종황제실록>과 함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주관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황제실록>은 중명전에 있는 자료 곳곳에 인용되고 있다. 혹시 실록을 참고하는 사람들이 각자 입맛에 맞는 내용만 선별적으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인정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위 <고종황제실록>을 참고하여 한일합방의 책임을 고종에게서 찾는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싶다. 하지만 망국의 책임 소재를 제대로 찾는다면 최소한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 못지않게 더 무섭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우게 될 것이다. 또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교훈으로 오늘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 사족 : 실록이 왜곡되었다고 의심된다면 어디가 어떻게 왜곡된 것인지 밝혀내고 실록을 정사(正史)로서의 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출처도 분명치 않고 객관성도 의심스러운 사료들에서 편자(編者)가 자기 코드에 맞는 내용만 골라 만든 ‘왜곡된’ 역사를 배우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를 우리 스스로 배울 것 없는, 혹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처사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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