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국민들의 지식의 총합이요, 한 나라의 GDP는 그 나라 국민들 소득의 총합이다. 좌익 수구꼴통 세력들은 박정희가 그토록 공부 열심히 하라고 신신당부할 때 열심히 데모했고 북으로부터 내려온 수령님 지령문 외느라 세월을 축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까마득히 앞서가는 일본을 저주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며 정신적 위안을 삼기로 작정했다. 애국세력을 친일로 몰아 모욕주기,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 세우기, 일본군을 색욕(色慾)의 마왕으로 만들기 등등은 그 적나라한 현실적 방법론이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수상관저에서 열린 한일협정 조인식 장면.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학자, 지식인, 언론, 학생을 향해 "패배주의, 열등의식을 버려라" "일본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일본을 앞지르자"고 외쳤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1965년 6월 22일 일본 수상관저에서 열린 한일협정 조인식 장면.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학자, 지식인, 언론, 학생을 향해 "패배주의, 열등의식을 버려라" "일본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일본을 앞지르자"고 외쳤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요즘 김원봉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다.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군이 국군의 모체라는 등 도무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주장들이 대통령의 입에서 무시로 튀어나와 납세자와 유권자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김원봉 문제를 띄우는 배경은 ‘항일 무장투쟁’을 선명하게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김원봉은 아나키스트로서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본 식민통치자는 물론, 그에 협조하는 세력들을 폭력·암살·파괴·테러 등의 방법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때문에 일제 치하에서 화끈한 무장투쟁을 오매불망 선호하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를 띄우면 띄울수록 항일 무장투쟁은 도덕적 권위가 더더욱 커진다.

그러한 권위를 통해 외교독립론이니, 실력양성론이니 하며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보이는 세력들을 손쉽게 역사의 절벽 아래로 떠밀어 압살할 수 있다. 김원봉이 비록 소련공산당의 돈을 받아 의열단 활동을 했다거나, 중국 국민당의 자금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운영했고, 해방공간에서 월북하여 북한 정권 창출의 일등 공신 역할을 한 것은 띠끌 만도 못한 사소한 오류에 불과하다.

좌익 수구꼴통주의자들의 법률에 의하면 애오라지 화끈한 ‘항일 무장투쟁’이면 모든 죄는 사면 내지 방면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의열단 김원봉처럼 화끈한 ‘항일 무장투쟁 이미지’를 선명하게 보유하고 있는 인물은 김성주(후에 김일성)인데, 아직은 국민감정 상 그를 띄우는 데는 애로사항이 많다. 따라서 꿩 대신 닭으로 내세운 것이 김원봉이다.

만약 그를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려놓는 일에 성공할 경우 다음 수순은 뻔하다. 대한민국에 반기를 들고 북한 정권 수립에 공헌한 김원봉도 독립유공자로 만들었으니 일제 하 중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건 아나키스트건 뭐건 어느 누구인들 독립유공자로 만들지 못하겠는가.

김원봉 띄우기의 다음 수순은?

김일성이라 불린 북한 수령 김성주도 소위 ‘보천보 전투’ 등 어느 누구 못지않게 화끈한 항일 무장투쟁을 했으니 그도 독립유공자로 표창하고 서훈해야 마땅하다는 소용돌이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 수령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 참여했는지 아닌지도 확인이 안될 뿐 더러, 보천보가 무슨 전투인가? 그저 마적떼들의 식량약탈과 방화사건, 일본인 음식점 주인과 두 살 짜리 젖먹이가 마적들이 쏜 유탄에 맞아 죽은 것이 전부인 소동이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는 역사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박정희?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를 나왔으며, 만주군 중위 경력자니 영락없는 친일파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후 가장 먼저 한일 수교를 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비상계엄까지 선포했다. 일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국민의 뜻을 찍어 누르고 강제로 국교를 정상화했으니 제2의 이완용, 제2의 경술국치의 주범임에 틀림없다. 

항일 무장투쟁의 성스러운 민족감정으로 볼 때 이 정도 경력은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너무나도 완전무결한 친일분자 아닌가. 이런 적폐의 원흉을 지워내는 것이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역사적 소명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원봉 소동의 핵심 본질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좌파·좌익·공산전체주의자들이 박정희 친일 매국 행각의 정점으로 공격하는 것이 국민감정을 무시한 채 계엄을 선포하고 강제한 한일 국교 수교다. 6월 22일은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된 지 54주년 되는 날이다. 이날 이후 국회 비준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족세력’으로 포지셔닝 했던 이 땅의 좌익 수구꼴통 세력들이 한일협정 비준을 끝까지 반대하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박정희는 그런 꼴통세력들에게 어떻게 맞서 한일협정을 성사시켰는지를 알아보자. 

1965년 6월 22일 한일 외무장관들은 일본 도쿄에서 한일협정문서에 서명함으로써 1951년 10월 20일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한일 대표가 예비교섭을 시작한 지 13년 8개월 만에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다음날인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담화문을 발표하여 한일 국교 정상화의 필요성과 당위성, 앞으로 우리 국민들이 견지해야 할 정신자세 등 한일 관계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이날 박 대통령은 한 민족 한 나라가 그의 운명을 개척하고 전진해 나가려면 무엇보다 국제정세와 세계조류에 적응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한일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거나, 심지어 매국 행위라고 극언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발언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정부가 하는 교섭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 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 하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가겠다는 우월감을 왜 가져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패배주의, 열등의식을 버려라!

박정희는 한일 국교정상화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냐 하는 것은 우리의 주체의식, 우리의 자세, 우리의 각오가 얼마나 건재하고 바르고 확고하냐에 달려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가장 암적인 요소는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패배주의 열등의식, 그리고 퇴영적인 소극주의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생산적인 사이비행세 이것들입니다. 또 있습니다. 속은 텅텅 비고도 겉치레만 번지레 꾸미려 하는 권위주의, 명분주의, 그리고 언행불일치주의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과감하게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가진 국민이 됩시다.”

한일 수교협정이 조인되면서 남은 관문은 국회 비준이었다. 대통령이 특별담화문까지 발표하여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을 극복하자, 미래를 위해 뛰자고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한일협정 조인 반대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7월 1일 개신교 목사 100여 명이 “굴욕적인 조약 폐기하라”고 주장하며 한일협정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7월 5일 야당은 효창공원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국민의 정당한 반대를 총검으로 위협하는 경찰탄압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7월 22일 교수단 등 10여개 단체가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위한 연합전선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당시 한국 최고지성으로 알려진 시인 조지훈은 이런 시를 발표하여 국민들을 선동했다.

<(중략)…가부가 무엇이냐 비준이 무엇이냐/ 이 더러운 종이쪽지를 의정의 자리에/ 내어 거는 것조차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엿한 배상금을 청구권은 무엇이며 독립 축하금은 무엇이냐/ 무상이고 유상이고 이것은 먹을 수 없는 미끼!/ 이 더러운 돈으로 나라의 피폐한 경제가 되살아나리라고―/ 웃기지 말아라, 그 철없는 도박은 우리가 믿고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굴욕의 흥정을 강권하고 충동이는 모든 우방인의/ 남의 속도 모르는 당치 않은 발언을 우리는 분노할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식민주의의 노예가 되진 않을 것이다/ 더러운 이 조약을 우리 손으로 찢고 말 것이다/ 차라리 배상금을 깨끗이 포기하고 평화선을 지키며/ 간악한 자의 해적행위를 만천하에 증거할 것이다/ 민족의 긍지를 수호할 것이다/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이 돕는다는 진리를 믿으리라/ 우리는 죽어도 이 더러운 돈을 받지 않으리라/ 나라를 잡히고 얻은 빚으로 나라를 구원한 역사가 없음을 깨우치리라/ 민족의 양심의 소리, 이것을 들으라/ 무저항주의는 힘센 나라에서 소용되는 것/ 생명의 마즈막 관두에 선 연악한 나라에서는/ 힘의 항쟁이 있을 뿐이다/ ‘외적’을 물리치자 아아 우리는 이 한마디 부르짖음밖엔 다시 없다.>

8월 14일 여당 단독으로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키자 야당, 재야 반정부세력, 운동권 학생들이 비준 반대를 위해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날 제주대학에서 횃불성토대회가 열렸고, 8월 20일에는 부산 동아대 학생들이 국회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8월 21일 서울시내 대학생 2,000여 명이 매국문서, 매국국회, 매국정권 화형식을 갖고 “매국협정 무효화하라”는 현수막을 걸고 거리 시위를 했다.

무책임한 기회주의 학자들을 질타한 박정희

8월 24일 서울시내 10개 대학에서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무장군인을 출동시켜 경찰과 함께 시위를 저지했다. 8월 25일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거리시위를 벌였고, 고려대 학생들은 “독재정권 해산하고 총선거 실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야당 정치인들은 “학생들 아니면 누가 정의를 부르짖겠는가”, “학생들은 순수하다”면서 학생 시위를 부추겼다. 참다못한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8월 25일 학생시위에 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학생들에게 아부하는 기회주의 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학생 데모를 영웅시하고 그들을 선동함으로써 자기가 입신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기회주의 학자, 학생의 주장에 아부하고 그 감정에 영합하여 값싼 인기를 얻지 않고서는 자기의 무식과 무능을 감출 수 없는 사이비 학자, 신분이 보장됨을 기화로 삼아 책임도지지 못할 망언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무책임한 학자, 이러한 엉터리 학자가 제거되지 않는 한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민주화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어 그는 학생시위에 힘입어 정권을 탈취하려는 정치인들을 질타했다.

“정당해체를 주장하고 국회해산을 공공연히 부르짖으면서도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고, 애국하는 길이요, 구국하는 길이라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억지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이 나라 일부 정치인들의 실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국가의 진로와 민족의 활로는 아랑곳없이 공부시켜야 할 학생을 오직 당리당략의 제물로 희생시켜 학생데모에 힘입어 정권의 횡재를 망상하는 반동정객이 민주정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박 대통령은 학생들에게는 일본을 경계하여 또 다시 침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내가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당하고 만 인적, 물적 손실이 아니라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당하게 될 우리의 손실입니다. 10년, 20년 후의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될 학생들이 내일의 주인공으로서의 실력과 자질을 연마하는 데 소홀히 함으로써 생기게 될 지도자의 빈곤을 나는 무엇보다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중략)

지금 우리 학생들과 같은 세대의 일본의 학생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를 하고 실력을 닦고 있는데, 우리 학생들은 날마다 데모나 하고 시간을 낭비하면 공부는 언제 하고 실력은 언제 양성하는 것입니까? 일본을 경계하여 또 다시 침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본 학생보다도 더 많이 공부하고 실력을 배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구절이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 그 시절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날을 지샜던 6·3세대는 언제 공부할 시간이나 있었을까? 박 대통령 말대로 일본 학생들보다 더 많이 공부했는가?

종속이론은 오류라는 사실을 입증한 박정희

당시 한일회담을 반대한 좌익 수구꼴통 세력들은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 매판자본론, 신제국주의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종속론의 원조는 아르헨티나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시(R. Prebisch)였다.

프레비시는 저개발국이 자급적 발전 경로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무역에 어느 정도의 보호주의를 도입해야 하며, 수출주도형 산업화가 아니라 수입대체 산업화(Import-substitution Industrialisation)가 저개발국의 최선의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종속 이론은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이 주장한 이전의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 이론들과 유사한 관점을 가졌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심을 꾸준히 받았다.

종속론자들은 국제경제 체제를 중심국(선진국)과 주변부(후진국)으로 구분하고 양자를 착취와 피착취 관계로 본다. 주변국 경제는 중심국 경제의 영향으로 인해 저발전의 악순환에 빠져 종속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종속론자들은 이러한 종속관계의 원인은 외국자본과 기술도입에 있다고 파악하고, 외국자본 도입을 극력 반대해야만 경제 종속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결말은 자본주의 체제보다는 사회주의 체제를, 국제협력을 위한 개방체제보다는 민족적이며 배타적인 폐쇄체제, 시장경제 원리보다는 계획통제 원리를 경제개발의 기본전략으로 선택하고 사회주의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 타도와 자력갱생의 자급자족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 탈종속과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심융택, 『실록·박정희 경제강국 굴기(崛起) 18년-(5)개방 개혁 도전』, 동서문화사, 2015, 201쪽). 이것이 바로 김대중이 주장했던 ‘대중경제론’의 핵심 이데올로기였다.

한국의 야당과 운동권 학생들은 이러한 종속이론과 매판자본론을 우리나라에 대입시켜 미국이나 일본 자본 도입은 한국경제를 그들에게 종속시킴으로써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나라 문 닫아걸고 자력갱생의 길로 나갔어야 한다. 이런 주장은 선명한 프로파간다로는 더없이 좋은 소재이긴 하나, 전 국민을 거렁뱅이로 만드는 위험천만한 선동이다.

1960년대 한국의 총자본 형성에서 외국자본 비율은 약 40%였다. 그 후 1970년, 1975년에는 35%, 1977년에는 22%까지 줄었다. 외국자본은 초기에는 증여에서 공공차관→상업차관→민간기업 직접투자로 바뀌었다.

종속이론이나 매판자본론에 의하면 외국자본 도입이 계속되었던 1·2·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 동안 한국경제는 선진 자본국에 종속이 심화되었어야 맞는다. 그런데 공업화 초기에 나타났던 구조적 종속 현상은 우리의 공업화가 심화되면서 해소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경제의 자립도는 해마다 높아졌다. 또 상당기간 동안 상당량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종속론자들이 말하는 반민족적, 반국가적 매판자본가는 생겨나지 않았다.

이제 박정희의 한일 수교의 진면목을 들여다본다. 박정희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하고 모험적인 행동이다. 박정희가 공업화를 위해 외국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외국의 민간 기업을 유치하기로 한 것은 위험하고 모험적인 결정이었다. 왜냐! 개발도상국이 선진 공업국의 자본·기술·노하우를 도입하여 공업화를 추진할 경우 경제적, 정치적 종속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국민 지식의 총합

박정희는 공업화 초기단계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종속현상을 감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 선진국의 자본·기술·노하우를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킴으로써 경제자립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종속론이나 매판자본론은 한국에서는 전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이었음을 박정희는 현실로 밝혀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속론·매판자본론을 앞세워 한일회담을 극렬 반대했던 정치인·학자·언론·운동권 학생들은 반성 한 마디 없다. 오히려 김대중 류의 ‘대중경제론’으로 나갔어야 한다면서 반체제, 반정부의 길로 질주하며 박정희를 능멸했다.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6·3세대의 세례를 받은 또 다른 수구꼴통 세력들은 위수김동(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을 외치며 북한의 대남 단파방송을 통해 지령되는 수령님의 주체사상, 주체경제 교시를 달달 외느라 세월 다 보냈다. 지금 그들이 국가의 경영자가 되면서 온갖 비참한 지식의 빈곤, 무지의 극치가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다.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국민들의 지식의 총합이요, 한 나라의 GDP는 그 나라 국민들 소득의 총합이다. 좌익 수구꼴통 세력들은 박정희가 그토록 공부 열심히 하라고 신신당부할 때 열심히 데모했고 북으로부터 내려온 수령님 지령문 외느라 세월을 축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까마득히 앞서가는 일본을 저주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며 정신적 위안을 삼기로 작정했다. 애국세력을 친일로 몰아 모욕주기,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 세우기, 일본군을 색욕(色慾)의 마왕으로 만들기 등등은 그 적나라한 현실적 방법론이다. 그것은 마치 인조, 효종 시절 자신들이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여진족들이 청나라를 세우자 황당무계한 북벌론을 외치고, 만동묘와 대보단을 지어 망해 없어진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면서 "우리는 소중화"라고 마스터베이션을 하던 조선의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의 판박이 행위나 다름없다.

급기야 코민테른의 똘마니요, 중국 국민당의 조종을 받던 조선의용대와 김원봉까지 역사의 무덤 속에서 끌어내 가짜 영웅을 만들어 박정희 욕보이기, 일본 모욕주기 운동에 대통령과 청와대, 대한민국 정부 부처들이 앞장서고 있다. 이 나라의 운명을 쥔 좌익 수구꼴통 인사들이여. 박정희를 비난하고 욕하기 이전에 그가 그토록 외쳤던 극일의 방법론부터 깨닫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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