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에 출간되어 지금도 베스트셀러 상위목록에 랭크 되어 있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은 주인공 김지영의 삶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처받은 에피소드 중심으로 보여준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동창의 괴롭힘에서 자신을 맘충이라 경멸하는 주변의 비아냥까지, 김지영은 수많은 상처를 받다가 정신질환에 이른다.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그녀는 사회를 향해 분노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 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서평은 ‘서민들의 일상 속 비극을 사실적이면서 공감대 높은 스토리로 표현했다.’다. 그러나 개인적인 독후감을 거칠게 말하자면 ‘그래서 어쩌라고?’다. 상처를 받고 이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때로는 불가피하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살아내는 게 삶 아니던가? 그 정도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나는 반대로 그녀에게 여자에게 상처받은 남자를 본 적은 없는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의 보살핌이나 혜택을 받은 적은 없었는지 되묻고 싶다. 혹시 동성에게 상처받은 기억은 없었는지, 타인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었는지도 묻고 싶다. 평범한 아버지와 이해심 있는 남편을 두고도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라면 위압적이고 적대적인 아버지나 남편을 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순결한 김지영씨에게 꼭 묻고 싶다. 

‘관심을 가져달라, 도와달라, 차별하지 말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라, 함부로 비난하지 마라’ 등은 김지영씨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외치는 주장이며 넓은 의미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속한다. 표현 그대로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존중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렇게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변하지 않는 세상의 이치는 일견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당연하다. 자신을 최우선에 두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세상의 모든 밥그릇 싸움을 바라보듯 여성들의 밥그릇싸움에도 따듯한 시선을 보낸다. 문제삼고자 하는 건 김지영씨의 억울함이나 주장 자체가 아니다. 밥그릇싸움을 밥그릇싸움이 아닌 것으로 위장하는 교묘하고 위선적인 태도다. 그리고 정신병리학적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국문학 주류의 비틀린 세계관 그리고 소통이라는 명목과 외피를 쓴 피해자 코스프레와 어리광이 용인되고 장려되는 우리 사회의 정서다. 매사를 약자와 강자, 착취자와 피해자의 대립구도로 보는 데도 지쳤다. 

‘82년생 김지영’뿐 아니라 현대 한국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은 상처로 가득하다. 이들 허약한 비극중독 환자들은 순결하고 감성 충만해 마치 누가 누가 더 감성적이고 더 많이 상처받았는지 경쟁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쉬지 않고 엄살부리고 변명하고 남 탓 한다. 그들은 원숭이가 자신의 털을 고르듯 내면의 상처만 바라보고 바라본다. 모두 죄 없이 고통 받는 피해자들이다. 적어도 본인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 피해의식의 밑바닥에는 거대한 자기연민이 자리잡고 있다. 결국 그들이 내세우는 가해자는 주인공이 못 가진 것을 가진 자이거나 억압적이고 모순에 찬 사회 자체다. 대부분의 이야기와 주장은 사회 탓으로 마무리된다. 

소통과 연대라는 위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은 동정을 구하는 유약한 어리광, 연약한 넋두리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화려하게 포장하더라도 그들의 결론은 결국 ‘나는 소중하니까’라는 상업적 슬로건의 기만적이고 유약한 버전일 뿐이다.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왜 삶이 쉬워야 하나? 작은 시련에 쉽게 굴복한다면 더 큰 시련에는 어찌하려는가?

밥그릇싸움은 밥그릇싸움답게 구체적 이익을 앞에 두고 의지와 이성을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문제를 고쳐나가면 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문제만 바라보며 문제를 키운다. 스스로를 약자로, 피해자로 또 거대한 악과 마주한 비둘기같이 순결한 선(善)으로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문제해결을 막는다. 남는 건 화해할 수 없는 증오뿐이다. 더 나쁜 건 남 탓, 사회 탓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자립하지 못하는 의존적 인간으로 만들어 즉 그들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비화시켜 그 문제에 기생한다. 그들은 사실 사회가 심각한 문제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족속들이다. 심층에 존재하는 사회와의 의존적 관계를 숨기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큰 문제다. 문제는 그들이다.

그 누구도 사회를 대표하지 못하며 그 누구도 사회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회문제란 누구도 신경 안 쓰고 책임 안 지는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사회문제로 환원하는 건 사실 문제해결 자체를 떠넘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과 결말은 언제나 공허하다. 

영국의 대처 총리 말처럼 사회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나와 너 같은 개인뿐이다. 사회가 가해자란 말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무수한 피해자들에 둘러 쌓여 있지만 가해자는 대부분 보이지 않는다. 법률이 다루는 좁은 범위를 제외하면 가해자를 판별할 자격과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개인적 고통이 주는 주관적 정당성을 객관적인 것으로 공인해 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너의 운명이 평탄하기를 바라지 말고 오히려 가혹하기를 바라라”,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길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나 위로 대신 운명과 대결하라는, 자신을 고양시키는 패기를 키우라는 니체의 목소리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강건함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빈 자리를 대신 채우는 건 공무원 열풍과 같은 실체도 없는 안정에 대한 희구뿐이다. 우리 사회의 주류는 강건한 성장을 장려하는 대신 정신이 정체된 응석받이 어린 아이로 퇴행하라고 속삭이는 사악한 목소리들이다. 

모든 물리적, 정신적 타격은 통각을 만든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통각이 통증으로 발현하는 양상은 저마다 다르다. 격투기 선수처럼 맞서 싸우는 사람은 뼈가 으스러져도 통증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반면 무한정 약해지기로 결심한 듯 보이는 그래서 타인의 지지 없이는 홀로 서지 못하는 김지영씨 같은 사람은 통증회로의 증폭과정을 통해 주어진 통각 10배 이상의 과잉활성화된 통증을 느낀다. 심지어 통각이 없는데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끼는 뇌기능장애마저 겪는다. 과도한 고통회피심리가 피해망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근대사에 대한 한국인의 공통적 피해의식이나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착취당하는 민중으로 여기는 귀족노조원들이 대표적인 예다. 

무조건 고통을 감내하라거나 자책하라는 말이 아니다. 주어진 처지가 불우하다면 의지와 이성으로 분투해야 한다. 그러라고 자연이 준 무기가 의지와 이성이다. 상처를 무릅쓰고 타인과 부대끼며, 의지를 가지고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이 삶이다. 억울하고 상처받았다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강인하게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 82년 생 김지영씨에게도 감성뿐 아니라 의지와 이성이 있을 것이다. 김지영씨가 제대로 싸우려면 상처타령, 남탓타령 대신 자신부터 강건하게 믿어야 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김규나 작가의 외침처럼 ‘트러스트 미(Trust Me)’다. 그래야 ‘트러스트 유(Trust You)’도 가능해진다. 

만일 주변에 김지영씨가 있다면 나는 피할 것이다. 동료로 삼기도 싫다. 그녀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피해의식에 가득 찬 사람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이 큰 사람이 가장 무례하고 또 주변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처가 그녀에게 중요하듯 타인도 그녀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1982년 생이면 이제 36살, 아이도 소녀도 아니다. 철이 들 나이가 지나고도 지났다. 성인이면서도 자신을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로 여긴다면 그녀는 위로로 포장된 달콤한 목소리에 낚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은 한국사회 도처에 널려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지옥이 있다. 김지영씨가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동기 시민기자(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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