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 계열에 '네다바이' 당한 한국 저항운동...한국 현대사의 최악의 귀결
'진보'를 하더라도 자유정신만은 놓지 않았던 선배세대의 참담한 실패
"절대로 정권 빼앗기지 않겠다"는 현 집권세력 발언은 反민주적 망발
저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죽이려 한다.자유인들은 죽음을 의식할 시국
가만히 앉아서 두 눈 멀건히 뜬 채 죽임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류근일 언론인
류근일 언론인

셸리가 쓴 시에 ‘학살의 마스크’라는 게 있다. 영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이지만 감히 번역해보았다.

촘촘하고 말 없는 수풀처럼/그대들 조용히, 꾸준히 서 있으라/팔짱 낀 모습이 그대들의 질 수 없는 싸움의 무기일지니/폭군들이 감히 그대들 사이로 말을 달려 들어와/베고 찌르고 망가뜨리고 자른다 해도/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라/팔짱 낀 채 의연한 눈빛으로/조금은 공포를 느끼되 경악하진 말라/저들의 광분이 스러질 때까지/살육 현장을 고즈넉이 바라보라/저들은 마침내 수치심을 가지고/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리/그때 비로소 흘려진 핏방울들이 뜨거운 홍조를 띠며 외치리라/불패의 백만대군으로 일어서라/잠에서 깬 사자처럼/그대들이 잠든 사이 채워진 족쇄를 이슬처럼 땅에 깨버려라/그대들은 다수, 저들은 소수!

‘학살의 마스크’는 1819년 8월 16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있었던 ‘피털루 학살’을 주제로 한 것이다. 흔히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효시를 미국의 헨리 데이빗 쏘로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그런 운둥은 많았다. 피털루 집회가 그랬다. 당시 빈민층이 자기들의 요구가 의회에 반영되지 않자 국회법을 개정하라고 일으킨 평화적 항의집회였다. 맨체스터 당국이 이걸 말발굽으로 짓밟아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는 다수 사상자를 냈다.

“조용히, 꾸준히 권력의 폭압을 비폭력적으로 견디고 이겨내라”고 한 셸리의 비폭력 시민 불복종 저항정신은 훗날 마하트마 간디의 반영(反英) 독립운동과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운동으로 장렬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히틀러의 독일이나 스탈린의 소련에서 일어났다면 아마 거사를 모의하는 순간 이미 적발돼 도륙을 당했을 것이다. 오늘의 북한 사정도 그럴 것이다. 비폭력 시민 불복종 저항운동도 그래서 ‘폭군 복(?)’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4. 19 혁명이 비폭력 시민 불복종 저항운동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후 6. 3 굴욕외교반대 운동, 3선개헌 반대 운동, 유신반대 운동, 신군부 반대 운동 등, 한국의 저항운동은 하나의 관성처럼 만성화했다. 이 과정에서 운동은 점차 NL(민족해방) 계열의 수중으로 ‘네다바이’ 당했다. 우리 현대사의 최악의 귀결이었다. 운동 초기부터 ‘진보’를 하더라도 자유 정신만은 놓지 않으려 했던 필자를 포함한 선배 세대의 참담한 실패였다.

이를 제어하지 못한 우리 선배 세대는 그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성한다. NL은 대한민국 건국과 자유민주의 체제 그리고 세계시장의 정당성을 100% 부정하고 나섰다. 우리 선배 세대는 그들의 그런 일탈적 폭주를 막지 못한 업보에서 쉽게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조국 청문회’ 때 그는 사회주의를 공공연히 끼고 돌았다. 여러 가지 사정을 돌아볼 때 그가 말한 사회주의가 우리 헌법이 수용할 수 있는 중도적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사회주의일 가능성이 있을지는 매우 의문이다.

비폭력 시민 불복종 저항운동이 한국에선 이처럼 막판에 자유주의를 떠나, 그것을 오히려 적대하는 전체주의 혁명 꾼들의 전유물인 양 변질한 것은 비폭력 시민 불복종 저항운동의 자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비폭력 시민 불복종 저항운동은 일체의 압제, 폭정, 전체주의, 전제(專制)와 독재, 부패한 기득권에 대한 개인의 존엄성, 기본적 자유권, 기회의 균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586 혁명 꾼들의 작태는 그런 덕목과 가치를 훼손한 신판 적폐이자 위선으로 치달았다.

그들은 이젠 저항하는 자가 아니라 저항의 대상으로 바뀌어 있다. 586 혁명 꾼들이 비폭력 시민 불복종 저항운동의 대상으로 바뀐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이 집권하자마자 ‘영구집권 같은 소리’를 한 게 바로 그것이다. 이건 명백한 1당 독재적 발상이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열어놓지 앟고 20년, 50년, 100년 집권을 호언한다는 것 자체가 전체주의적 사고이고, 따라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저항운동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절대로 정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발언은 선거민주주의의 기본을 건드리는 망발이다. “정권을 재창출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공언은 반(反)민주적이다. 반민주적, 그렇다면 왕년의 그들이 ‘민주’를 내세워 반정부-반체제 운동을 한 것을 이제는 고스란히 그들에게 되돌려주어도 된다는 뜻이 되겠다.

그들은 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정권이 ‘촛불 혁명’의 산물이라며 뻐겨댔다. 촛불만 들면 혁명이 정당화된다는 자인이었다. 그들은 혁명을 한껏 합법화시켜 놓았다. 그것이 설마 자신들을 옥죄는 족쇄가 될 줄은 몰랐겠지? 누가 촛불 들고 “너희 정권 하야하라”고 말할 때 저들은 그걸 불법-부당이라고 낙인 찍을 수가 없게 된 셈이다.

‘조국 임명 강행’은 이 나라의 정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토론의 정치를 “밀리면 죽는다”는 사생 결단의 문제로 바꿔놓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의 과욕과 우매함과 강포함으로 인해. 그렇다면 싸워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가만히 앉아서 두 눈 멀건히 뜬 채 죽임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근엔 그들 자신이 오랜 기간 숙성시켜 왔던 진짜 이념적 속내를 과감하게 드러낸 바 있다. 그들은 소위 민족주의자도 아니었고 소위 ‘진보적’도 아니었다. 그들의 몇몇 발언들은 그들이 한쪽 끝의 ‘갈 데까지 간’ 것이었음을 노골적으로 시인한 커밍아웃이었다.

지금 자유 진영에선 범국민적 저항대열을 짜려는 움직임들이 일고 있다. 기독교계의 움직임도 활발하고 비종교계 활동가들의 협의도 진행되고 있다. 10월 3일을 기해 거국적 시민 불복종 운동을 일으킬 계획도 무르익어 있다. 문제는 국민 대중이다. 정보화 사회의 선동적 미디어들의 ‘거짓말’에 많은 대중이 놀아나고 있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필부도 책임이 있다고 한다. 정치인들만 문제인 게 아니라 ’놀아나는 대중‘이 정작 큰 문제다. 대학 나왔다고 으쓱대며 자기는 ’대가리가 깨져도‘ 그들 편이란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동네 아저씨 같아서 좋다”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충분히, 제대로 싸울 정신이 돼 있느냐?”는 물음이다. 투쟁의 선두에 서야 할 원내 야당이 과연 얼마나 해줄지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삭발을 하는 전사들, 특히 여성 전사들의 비장한 모습을 보면 눈물이 고인다. 아, 이 땅엔 아직 의로운 의병들이 살아있구나 하는 희망이 절망을 꿰뚫고 솟아오른다.

작정하면 살길이 생길 터. 한국의 자유 국민들은 그동안 너무나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태평스럽게만 살았다. 그러나 더는 안 되게 되었다. 저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혁명하려(죽이려) 한다. 자유인들이 죽음을 의식해야 할 시국이다. 선택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이길지, 비겁하게 연명하다가 죽임을 당할지. 2019~2020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또 한 번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류근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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