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가 신문 발행인이나 편집인이 된다면 이상적인 신문을 하나 만들 거예요. ①공정하게 쓰고, ②주관을 개입하지 말고, ③야당인이고 여당인의 편이 아닌 국민의 편에 서고, ④어떤 정치집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위주로 하는 신문을 만들겠어요.”(박정희 대통령)

조국 법무부 장관 사태와 관련하여 주요 언론들이 연일 속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가히 태풍이 몰아칠 기세다. 그 동안 ‘기레기 언론’으로 양식 있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던 조·중·동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좌빨 언론’이니 뭐니 하며 비판당했던 한겨레, KBS 등지에서도 미약하나마 자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좌익 정권에 아부하고, 그들 목소리를 대변해 줌으로써 이 나라의 미래를 악(惡)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던 언론과 기자들이 이제 최면에서 깨어나는 조짐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생각해보라. 지난 2016년 광풍과도 같았던 대한민국 언론들의 박근혜 마녀사냥 보도를! 사실관계를 올바로 보도해야 할 언론들이 “정의사회 구현” 운운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허위·거짓·기만·선동 보도를 폭포수처럼 쏟아내 촛불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그 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 되었나? 당신들 주장대로 정의사회가 구현되었는가? ‘조국 가족 사기단’이 설쳐대고, 대통령이 앞장서서 주적(主敵)인 북한과 9·19 남북 군사합의를 통해 이 나라의 안보를 작살냈다. 대기업 목조이기로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국민을 무슨 봉으로 아는지 법인세·상속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이 자고 일어나면 오른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서고 있고, 3,000명이 넘는 교수들, 1,800명이 넘는 의사들, 500명이 넘는 변호사들이 “조국 해임, 문재인 탄핵”을 외치는 항의 대열에 나섰다. 이것이 ‘기레기 언론’ 당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정의로운 대한민국”인가?

쓰레기 들추기 저널리즘

한국 특파원을 지냈던 한 외국 언론인은 한국 언론의 수준을 머크레이커 저널리즘(Muckraker journalism)이라고 비판한다. 이 용어는 시오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이 용어를 “추문을 폭로하는 재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언론인은 사회악(惡)”이라는 뜻으로 정의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추문 폭로자, 혹은 쓰레기 들추기 저널리즘이란 뜻이 되겠다.

이 나라의 언론이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들이 도처에서 일고 있다. 질풍노도의 현대사에서 우리 언론이 위기가 아닌 세월이 언제 있었던가 싶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권력의 탄압에 의해 위기가 조성됐다면, 좌파 정부에서는 대놓고 KBS·MBC 등 공영방송을 비롯하여 포털 등 언론 유통 루트를 장악하여 여론조작에 나서고 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권력은 없으며, 모든 정부는 감시받아야 한다는 믿음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감시 비판 기능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이러한 감시와 비판을 통해 정당한 권력행사가 되도록 해야만 건강한 민주주의 유지가 가능하다.

언제부터인가 언론 본연의 사명인 감시·비판·견제 기능이 무뎌지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서는 고장이 났다. 일부 언론들은 언론 고유의 기능마저 이데올로기 코드에 맞춰 한쪽으로만 작동하고 있는 현상들이 일상적으로 발견된다. 특히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들마저 국가 공동체의 건전한 유지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좌익·좌파·친북 세력들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 나라의 언론은 대한민국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나가며 희생하는 시대의 등불, 전위대, 향도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코드에 맞춰 애오라지 한 방향만 제시하는 고장 난 나침반 신세가 되었다.

‘펜(언론)’은 ‘칼(권력)’보다 강하지 않다. 하지만 비상한 의지와 용기, 사실을 밝히려는 기자들의 정의감이 살아날 때 펜은 칼보다 훨씬 강해진다. 기자들은 어떤 사건·사안에 대해 그것이 사실(fact)인지 아닌지 확인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는 것이 책무다.

이런 명제만 본다면 “기자, 까짓 거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언론이란 게 별 거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기자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은 담대한 용기, 악의 유혹과 싸워 이가는 정의감, 사회공동체의 지속적인 유지 발전이라는, 무관의 제왕으로서의 사명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용기·정의감·사명감의 바탕 위에서 특종을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겠다는 강렬한 승부욕이 가미되면, 아무리 ‘칼’의 힘이 강해도 ‘펜’이 승리한다.

한국의 정상상태는 문치(文治)

조선조는 문인통치(文治)의 나라였다. 붓을 든 자가 칼을 든 자를 찍어 누르고 권력을 행사하는 문치의 시대는 지구상에서 예외 중의 예외에 해당한다. 인류 보편사는 칼을 든 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무인통치가 정상이었다. 우리의 경우 예외적으로 고려의 무인정권 시대 이후 약 900여 년 문치가 이어져 왔다.

이처럼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하고 특별한 역사적 궤적으로 인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구조가 고착되었고, 붓을 들고, 입(言路)이 살아 있는 문인들이 붕당을 형성하여 당쟁이란 이름의 권력투쟁이 일상화 되었다. 그 결과 붓과 입은 그 무엇과도 겨룰 수 없는 무소불위의 무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오늘날 언론의 힘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문치의 우리 역사가 가져온 업보라고 생각된다.

일본의 한국 전문가 다나카 메이(田中明)는 1992년 무렵 출간한 『한국정치를 투시한다』라는 책에서 “한국의 정치는 드디어 ‘예외’의 시대를 마감하고 ‘정상’의 시대인 1961년 군사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나카 메이가 바라보는 한국 정치의 정상의 시대는 곧 문치의 시대다. 문치의 역사를 이어오던 나라에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의 무인통치(武治) 30년은 예외 중의 예외에 속하는 시대였다.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에서 언론들은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지탄의 대상이 되어 왔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사이비 기자들이 설쳐대는 바람에 원성이 자자했다. 가진 자 뜯어먹기, 부패 눈감아주는 대가로 떡고물 받아 챙기기가 일상화 되다시피 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언론기관의 통폐합 사실을 보도한 한국일보 지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언론기관의 통폐합 사실을 보도한 한국일보 지면.

무인통치의 시대에 군 출신 권력자들은 언론과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였다. 5·16 혁명 이후 군사정부는 사이비 언론기관과 언론인을 대거 정리에 나섰다. 신문은 중앙과 지방을 합쳐 115개 사에서 39개 사로, 통신사는 216개 사를 11개 사로, 주간지는 485개이던 것을 34개로 정리했다.

박정희 정권이 반정부 성향의 언론인을 감시하고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을 자행했다. 언론에 철퇴를 가한 것이다. 군사정권에 대해 억하심정이 쌓였던 언론인들은 1964년 한일회담이 진행되자, 사회적 혼란을 이용하여 국민저항을 폭발시키는 과격한 선동보도를 일삼았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11월 14일, 언론통폐합을 단행하여 28개의 신문사와 29개의 방송, 통신 7개 등 64개 언론사가 신문 14개, 방송 3개, 통신 1개 등 18개 언론사로 통폐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1,000여 명 이상의 언론인이 해직되어 쫓겨났다.

하이에나처럼 뜯어먹기 위해 달려드는 기자들에게 시달리던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를 반긴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런데 권력의 힘을 동원한 강제적 통폐합은 ‘판도라의 상자’를 찍어 누르는 권력의 힘이 소진되었을 때 강력한 반작용 현상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30년간의 예외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 한국은 곧바로 문치의 전형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분석한 다나카 메이의 예언은 적중했다. 김영삼은 집권 직후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선언했고, 전두환·노태우를 비자금 사건, 광주의 책임 등을 물어 감옥에 집어넣었다.

민주화 바람과 함께 언론은 자연스럽게 원래 모습으로 회귀했다. 문민(文民)이란 먹물, 선비, 사(士), 또는 양반으로 통하는데, 그것은 곧 양반정치문화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었다. 양반정치문화의 꽃은 역시 ‘필봉’이 으뜸이다. 그 필봉을 휘두를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만개한 것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언론 소멸 예측한 보고서

통제의 힘이 사라진 언론은 대폭발, 빅뱅을 방불케 했다. 총칼과 대포를 앞세운 군사정권도 막지 못한 언론의 힘을 민주화 된 이 나라에서 어느 누가 질서를 잡을 수 있겠는가.

한 시절 ‘떠오르는 태양’이었던 언론 업종이 이제는 3D 사양산업으로 분류되고 있음을 보며 문명사의 잔인한 ‘진보의 법칙’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시사 잡지의 대명사로 통하던 「뉴스위크(Newsweek)」는 2012년 4월 종이잡지를 폐간하고 디지털 잡지만 발간하고 있다. 1936년 헨리 루이스가 창간한 시사화보 잡지 「라이프(Life)」는 2007년 문을 닫았다.

2012년 말에 나온 『유엔미래보고서 2030』에서는 언론의 소멸을 다음과 같이 예측한 바 있다.

“언론이 소멸된다. 저널리즘은 비언론인들에게 장악되는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약간의 교육만으로 전문적인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법률가, 신경의학자, 우주물리학자 투자가들이 인터넷에 글을 쓰기 때문에 일반 언론인들이 소멸하게 된다.

신시아 G 와그너가 ‘부상하는 직종과 직업 창조’라는 기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전통적인 언론인이 소멸하면서 저널리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뉴스를 생산하고,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적인 답변을 제공하게 된다. 일반인들은 기자보다는 이들 전문가의 글을 더 많이 읽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전문 분야 지식을 정확하게 전달할 분만 아니라 질문이나 상호 의사교환이 가능한 매체를 통해 정확한 답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기자들이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비언론인들에게 밀려나는 현상은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2013년 말에 나온 『유엔미래보고서 2040』는 언론의 몰락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예고했다.

“2017년 언론기업의 추락이 지속되고 대형 미디어 기업 파산이 속출한다. 「뉴욕타임스」 , 「데일리 텔레그래프」마저 온라인 디지털로 옮기면서 선진국의 모든 신문은 소멸하고 인쇄를 중단한다. 미국에서 시작되어 유럽도 같은 트렌드로 가게 된다. 호주의 신문은 2022년에 완전히 소멸할 것이며, 이 추세는 아시아로 넘어가서 2025년에 아시아와 남미의 신문사가 소멸한다. 아프리카는 가장 늦은 2040년에 종이신문이 소멸된다.”

인터넷 온라인 문명의 진보로 인한 언론의 위기는 언론 그 자체의 위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에서 50여 년간 기자와 편집인으로 활약한 로버트 카이저는 ‘미국 언론의 위기,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짚어내고 있다.

언론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

“건강한 민주 사회의 유지에는 호각을 들고 있다가 규칙 위반 사례를 발견될 때 호각을 불어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심판이 꼭 있어야 한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은 대중을 분열(파편화)시키고 전문 언론을 약화시킴으로써 언론이 사회적 책임감을 수호하는 능력을 약화시켰다. 정통 언론이 약화되면 이들의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까?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점점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몇 가지 추세는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즉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좋아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결국 언론도 결국 계급, 지역, 종교적 성향, 세대, 인종, 정치적 성향 등등에 따라 각각 파편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심화되면서 과거 미국을 단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언론이 이제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많은 요인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정치인이나 평론가들은 점점 더 자신의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부합하는 ‘사실’을 기꺼이 만들어내고 있다.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선전에 열중하고 있는 언론도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대중도 이제 이런 상황에 크게 낯선 느낌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주류 언론사는 최고의 언론사로서의 책임감을 지키는 데 필요한 재정적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언론은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감시 언론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민주적 통치 역시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위기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분명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벌어진 많은 변화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미래에도 언론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영토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 하나 뿐이다.

이제 우리는 언론의 위기를 통해 민주주의의 위기까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언론에 관련된 칼럼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언론관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발견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게 신승하여 민선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직후부터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야당 정치인들을 비롯한 지식인·문화인·교수·종교인·학생을 비롯한 전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다. 이 저항의 최일선에 앞장선 것은 언론이었다. 선동적인 언론보도로 인해 한일 수교 반대운동이 폭발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6월 3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하여 시위 진압에 나섰다.

박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20여 일 간 침묵을 지키다가 1964년 6월 26일, 국회 본회의에 자진 출석하여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교서’를 발표했다. 이날 박정희는 작심한 듯 야당 국회의원과 언론, 학생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박정희는 “언론의 자유도 무한정 보장될 수 없다”면서 언론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일 뿐만 아니라 헌법을 초월하는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자유도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무한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헌법에도 언론 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언론의 자유가 ‘과잉된 자유’ 뜻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신문은 지난 18년간 선의이건 악의이건 너무나 많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언사를 써 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경영상 수지는 맞추어 왔었는지는 몰라도 국가사회에 유익한 일만 해 왔다고 단언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신문이 너무 과하다’ 하면서도 아무도 감히 입을 벌려서 큰 소리로 그것을 시정하라고 외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과 언론의 무책임한 자유, 왜곡된 자유, 과잉된 자유를 방치한다는 것과는 스스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자유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면 타인의 자유나 타기관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를 규제할 의무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달 후인 9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언론과의 관계를 수습하기 위해 한격만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초청하여 청와대 집무실에서 언론 문제와 관련하여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담 내용은 「주간한국」 1964년 9월 27호에 게재되었는데, 이중 박정희의 언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소개한다.

▲박 대통령=민주주의의 기본바탕이 언론자유에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언론자유 없이 민주주의가 이룩되겠습니까. 그만큼 언론자유란 소중하고 비중이 큰 것인데, 여기에 따르는 것이 책임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언론이 물론 일제시대엔 민족수난에 대비해서 싸운 업적이라든지 그 후에도 민주주의에 바탕을 이룩하기 위해 투쟁의 선봉에선 공로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로가 있는 반면에 과오도 많았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벗어나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국가 이익에 벗어나는 언론이 많았습니다.

5·16후 최고위원 때 한국 언론의 정화 문제가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혁명정부는 언론자유는 부르짖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측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5·16 혁명이 올바른 민주주의를 위한 거사였다면, 민주주의의 등불인 언론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내 의견으로 규제를 하자는 제의는 좌절되었습니다.

언론인 스스로에게 맡겨보자는 내 의견은 2년 반 동안의 군정에서 완전히 실망을 가져왔습니다. 그래도 계속 강경하게 입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후퇴 시킨 후 참다못해 군정중간에 규제법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회의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언론인 몇 분이 그 사실을 알고 찾아와 우리 일은 우리에게 맡겨라 자중하고 깨달아 자율적으로 하겠다 해서 그러면 맡겨보자고 치워버렸습니다. 1962년 초에 다시 윤리위 강화문제가 논의되었지만, 그땐 선거가 가까워 온 시기였기 때문에 흘려버리고 민정 후에는 전혀 규제법을 논의해본 적이 없습니다.

6·3 사태 이후의 야당의 공격과 군정의 비위사실이 신문에 폭로되고 정부가 두들겨 맞기 시작할 때 나는 내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잡으려던 질서를 못 잡은데 대한 양심의 가책도 받고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신문들은 비판의 도를 지나쳐 학생들의 데모를 선동하고 영웅처럼 선전했습니다. 결국 아무 대책 없이 일부 불순한 학생들의 데모에 신문이 편승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때 나는 신문이 현 정부를 물러서라는 말이냐, 물러선 후엔 어쩌겠다는 것이냐는 것을 묻고 싶었습니다. 부득이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만, 그때 데모한 학생들은 대부분 선량한 학생이었고, 이름만 학교에 걸어놓은 몇몇 불량학생이 교내의 주도권을 잡고 선동을 했던 게 아닙니까.

6·3 사태 때 언론이 지나치게 선동적 보도

그래서 이대로 가다간 누가 집권을 하든지 시정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라의 질서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언론입법을 착상한 것입니다. 이 기회에 언론이 지금까지 지녀온 타성을 버리게 하려면 최소한의 규제는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질서가 잡힌 후는 차츰 들어줄 작정을 하고 시작한 겁니다. 처음엔 당내에서 퍽 강경하게 나오는 것을 깎고 다듬어서 만든 것인데 입법 때 담화에도 있었지만 언론을 위축시키거나 정부의 부정을 감추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한 위원장=신문이 6·3사태 때 지나치게 선동적이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박 대통령=6·3사태 때 학생들의 돌에 어린이가 맞아 머리가 깨어진 것을 경찰 곤봉이 철없는 어린이를 쳤다고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가하면, 그런 것을 마치 3·15 부정선거 당시의 마산에서의 김주열 군 사건같이 선동하며 우발적 기회를 노리는 것을 보고 한심스러웠습니다.

▲한 위원장=만일 대통령께서 신문의 발행인이나 편집인이 되신다면 어떤 신문을 만드시겠습니까.

▲박 대통령=이상적인 신문을 하나 만들 거예요. ①공정하게 쓰고, ②주관을 개입하지 말고, ③야당인이고 여당인의 편이 아닌 국민의 편에 서고, ④어떤 정치집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위주로 하는 신문을 만들겠어요.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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