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소설 창작하듯 시대착오적으로 창작해내는 인물이 광주광역시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광주광역시의 학생들이 지금 이 순간,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있을 것인지 참으로 한숨만 나오는 세상이다. 이런 쓰레기 사관을 가진 인물을 제7대부터 9대까지 무려 세 차례나 교육감에 당선시킨 광주광역시민들도, 참 대단하시다.

10·26이 탕탕절이란다. 40년 전 김재규가 유신 독재의 심장 다카키 마사오를 탕탕탕… 권총으로 쏴 죽인 날이란다. 다카키 마사오란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개명 이름이다. 이따위 쓰레기만도 못한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인물은 광주광역시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는 현직 교육감 장휘국 씨다.

그가 문제의 글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창씨개명을 한 친일 독재자 박정희는 이토 히로부미 같은 악당이고, 그를 시해한 김재규는 안중근 의사 같은 의인(義人)”이라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1950년생. 광주고-광주교대-조선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 전교조 광주지부 지부장. 전교조 출신답게 장 교육감은 제멋대로 현대사를 날조해 냈다. 자신의 망언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자 문제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내렸다는데,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제멋대로 현대사’ 사관(史觀)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군 군관으로 활동한 친일 행적이 너무 분명한 분”이라며 “그때의 이름(다카끼 마사오)을 쓴 것은 그 이름으로 친일 행적이 있었기에 썼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분석해 본다.

박정희의 그 무엇이 친일 행적인가?

첫째, 일제 강점기란 용어다. 이 말은 해방 전은 일제 강점기, 해방 후를 ‘미제 강점기’라고 정의하기 위해 북한과 좌익들이 날조해낸 용어다. 사학을 전공한 교육감이란 분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용어를 아무 생각도 없이 제멋대로 구사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이념적 스탠스가 어느 쪽을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해 보인다.

둘째, 만주군 군관으로 활동했으면 모두가 친일파인가? 박정희의 그 무엇이 친일 행적인가?

일제치하에서 양반 지주들은 소작료 받아서 잘먹고 잘살았으니 논외로 치자. 땅 한 평 없이 쪼들리며 살아가던 가난한 한국인 입장에서 신분상승의 길은 자기가 노력하여 '고등관'이 되는 것이었다. 일제하에서 고등관이 되는 길은 다음 두 가지였다. 

①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 시험(오늘날의 행정고시나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년 동안 시보 생활을 하는 길. 

②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는 길.

일본인들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 고등관에 오르면 아무리 차별받는 식민지 치하의 한국인이라도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 야망 있는 젊은이들에게 고등문관 시험과 사관학교 진학은 확실한 신분상승의 사다리였다. 워낙 지원자가 많아 수십 대 일의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지만,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숱한 젊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장휘국 교육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10.26 탕탕절 내용(사진 연합뉴스).
장휘국 교육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10.26 탕탕절 내용(사진 연합뉴스).

1931년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후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 입신양명의 기회가 크게 열렸다. 만주국에는 오족협화(五族協和) 정책에 의해 몇 퍼센트 정도는 조선인을 입학시켜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 규정에 의해 한국인들은 일종의 특혜를 받았다. 또 만주국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는 제도가 있어, 이 제도에 의한 일본 유학 혜택을 받은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만주국이라는 것, 오족협화라는 것은 지배 도구였지만, 일본이 한반도만 지배했더라면 출세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만주국이라는 공간을 통해 신분상승이 가능했다. 만주국이 생김으로써 일본이 지배하는 한반도에서는 날개를 펼칠 수 없었던 한국인들이 또 다른 식민지 공간에서 비약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 지음·윤대석 역,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소명출판, 2010, 7쪽).

예를 들면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정교수로 임용되지 못했던 최남선은 만주국의 최고 학부인 건국대학에서는 정교수로 채용되었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한국인들도 능력만 있으면 만주에서 고급 관료로의 지위 상승이 가능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930년대 후반, 조선의 야망 있는 지식인과 청년들이 대거 만주국으로 이동했다.

창씨개명이 문제라고?

식민지 청년들이 도전할 수 있는 문은 대동학원·신경법정대학 등 관료양성기관, 육군군관학교·육군군의학교·중앙경찰학교·헌병학교 등 군경 양성기관, 최고학부인 건국대학·신경공대·봉천의대·하얼빈학원 등 교육기관, 개척총국·만주국 협화회 등이었다(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책과 함께, 2013, 104쪽). 만주국에서 근무한 조선인 관료는 대략 3,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 고등관 이상의 조선인은 200명 안팎이다.

문제의 글을 올린 장휘국 교육감은 전교조 교사 출신으로, 광주광역시에서 7,8,9대 내리 3선 교육감에 당선되었다(사진 연합뉴스)
문제의 글을 올린 장휘국 교육감은 전교조 교사 출신으로, 광주광역시에서 7,8,9대 내리 3선 교육감에 당선되었다(사진 연합뉴스)

최규하는 만주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만주국 관리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강영훈 국무총리와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등은 만주 건국대 출신이다. 만주국에서 육성된 인재들이 훗날 한국 정계와 군부의 주요 인맥을 형성한 것이다. 김대중도 한 시절 자신이 만주 건국대 출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사람들은 후에 대한민국의 건국의 기초를 닦고, 행정의 중추가 되었으며 군의 기간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 때 호의호식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조했다는 죄로 ‘친일파’로 주홍글씨를 새겨 온갖 모욕과 망신을 주고 있다.

셋째,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다카키 마사오라면, 장휘국 교육감이 존경해 마지않는 김대중의 창씨개명은 왜 밝히지 않는가? 일제 시절 김대중의 창씨개명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 김영삼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 이명박은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장면은 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로 알려져 있다.

나무위키의 ‘창씨개명’ 코너에 들어가면 장 교육감 같은 좌익들이 환장하게 흠모하는 학자 강만길은 교다 만키치(姜田萬吉), 시인 고은은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 언론인 장준하는 조안 슌가(張安俊河), 그리고 장휘국 교육감이 영웅처럼 떠받든 김재규는 가네모토 겐이치(金本元一)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장휘국 교육감이 일제 시절에 태어났다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 입신양명이 가능했다고 생각하시는가? 하루빨리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장 교육감의 망언으로 인해 전 국민이 성웅(聖雄)처럼 떠받드는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장휘국 교육감 말처럼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擊殺)”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점이 있다. 일본에서는 한국 병합을 논하는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문관 출신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등으로 상징되는 군부 간에 의견이 대립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느라 자국 정부 1년 예산의 8년 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전비를 해외에서 국채를 발행하여 조달했다. 하지만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한 푼도 받아내지 못했다. 청일전쟁 당시엔 일본정부 1년치 세입의 3~4배에 해당하는 2억 3,000만 냥을 배상금으로 받아낸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다시 말하면, 러일전쟁은 일본이 승리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배상금을 받아 외국 빚을 갚으려 했던 일본은 멘붕 상태에 바졌다. 심각한 재정난에 처한 일본 지도부는 한국 병합과 관련하여 의견이 둘로 갈렸다.

안중근 의사는 누굴 쏘았어야 했나?

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철도, 도로를 깔고 전기를 가설하고 수도를 공급해야 한다. 또 노동력 착취를 위해 식민지 백성들 교육을 시켜야 하고, 전염병을 막기 위해 병원도 짓고, 학교도 지어야 한다. 또 잘못하다가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군대 유지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식민지는 공짜로 뜯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투자를 먼저 해야 착취가 가능한 제도다. 그 당시 일본은 조선에 이처럼 막대한 투자를 할 여력이 부족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0주년을 맞아 광주 북구 중외공원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숭모비(사진 연합뉴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0주년을 맞아 광주 북구 중외공원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숭모비(사진 연합뉴스).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한 문관들은 현실론을 내세웠다. 한국의 외교권·군사권 등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으니 무리수를 두어가면서 병합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한국 황실의 적당한 인물을 선정하여 그들에게 자치를 맡기고, 여유를 가지고 병합을 추진하자는 온건론 내지 신중론 입장이었다.

반면에 군부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을 병합하여 대륙으로의 진출을 주장했다. 국수주의자들과 군부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유약한 인물”이라고 공격하여 1909년 그를 조선통감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09년 4월, 가츠라 다로(桂太郞) 총리,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가 이토 히로부미를 닦달하여 한국 병합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을 박았다.

다시 말하면, 이토는 대한제국 병합에 적극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도 대한제국의 병합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병합하는 것은 일본의 재정상황이나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무리라고 보았다. 때문에 일정 기간 한국인들에게 자치를 맡기고,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병합을 늦추자는 의견이었다.

이런 인물이 조선통감으로 버티고 있었기에 병탄이 계속 늦어졌다. 그 결과 이토 히로부미는 국수주의자들과 강경론을 펴는 군부에 미운털이 박혔고, 조선통감에서 쫓겨나면서 정치적 리더십을 완전 상실했다. 한일 병합을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죄로 그는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는 누구를 쏘았어야 하나? 이왕 의거를 감행할 바에야 온건론자, 혹은 자치론자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가츠라 등 병합 적극론자를 격살했어야 이론상 맞는 것 아닌가? 

엉뚱한 사람을 처단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이토는 당시 조선통감에서 쫓겨나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였다. 이처럼 인기가 바닥이었던 인물이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총을 맞고 죽음으로써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었다. 이토의 죽마고우이자 정적(政敵)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의 죽음 소식을 듣자 “아, 저 친구는 죽음마저 하늘이 도와주는 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진정으로 대한제국의 독립과 안전보장에 도움을 주었는가? 혹시라도 도움은커녕 오히려 병합을 앞당기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는 반일 종족주의의 족쇄에서 벗어나 현실의 역사를 직시할 때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공적을 깎아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의거라도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공과를 따져보자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감성적·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실체를 보다 폭넓게 규명해야 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장휘국 교육감이 그토록 흠모해 마지않는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착각하시지 말기 바란다. 그가 쏘아 죽인 것은 '유신의 심장'이 아니라, 자주국방을 위한 박정희의 핵무기·미사일 개발의 원대한 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핵·미사일 연구개발의 핵심부서인 국방과학연구소(ADD)의 핵심 실무진 30명을 1차로 해고함으로써 한국의 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은 무력화되었다.

1981년 1월 핵연료개발공단을 원자력연구소와 통합하고 명칭을 에너지연구소로 변경했고, 핵연료 개발 연구를 금지시켰다. 1982년 12월에는 2차로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던 3,000여 명의 과학자 중 800여 명이 강제 해직 당했다. 특히 핵과 미사일 관련 연구에 종사했던 과학자들은 남김없이 해직 당해 길거리로 쫓겨났다. 이것이 김재규의 미치광이 행위가 가져온 놀라운 변화다.

진짜 친일파는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덧붙인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10월 28일, 이토 히로부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뛰어난 기질에 세상을 구제할 지략을 지녔으며, 시대의 운수를 만회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자신의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맡아 나섬으로써 단연 동양의 기둥이 되었다”고 말했다.

11월 4일 순종은 백성들에게 “(이토 공작이) 지난번에 우리나라 국경을 벗어나 하얼빈을 지나다가 짐의 고약한 백성의 흉한 손에 상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이제 그의 장사하는 날을 당하고 보니 마음이 더욱 아프다. 그와 같은 고약한 도당이 세계정세에 어두워 매번 일본의 두터운 우의를 무시하자고 하다가 마침내 전에 없던 괴변을 빚어냈으니 이는 바로 짐의 나라와 사직을 헤치는 자이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뿐만이 아니다. 순종은 11월 11일, 이토의 가족에게 거금(巨金) 10만 원의 은사금을 내려주었다. 그 시절 봉화에 위치한 태백산성 사고(史庫)의 재건비가 7200원이었다. 이토에게 내린 10만 원의 부조금이 어느 정도 액수였는지 짐작하시기 바란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한일합방조약의 모든 책임에서 당시 황제 순종은 벗어날 수 없다. 합방 후 그는 ‘이왕가’라는 이름으로 일본 천황가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을 통째로 일본에 넘긴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매년 일본 총리의 몇 배가 넘는 은사금을 받아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다 죽었다.

친일파란 식민지에서 태어나 보다 나은 개인의 삶을 위해, 미래를 위해, 신분상승을 위해 창씨개명까지 해 가면서 아등바등 노력한 박정희 같은 인물에게 함부로 갖다 붙이는 용어가 아니다. 진짜 친일파는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같은 인물에게나  적합한 용어다.

역사를 소설 창작하듯 시대착오적으로 창작해내는 인물이 광주광역시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광주광역시의 학생들이 지금 이 순간,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있을 것인지 참으로 한숨만 나오는 세상이다. 이런 쓰레기 사관을 가진 인물을 제7대부터 8대에 이어 9대까지 무려 세 차례나 교육감에 당선시킨 광주광역시민들도, 참 대단하시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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