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적개심 속에서도 일본에 객관적 학문적 자세 견지
반일 정서 무서워 시시비비 포기한 요즘 지식인들과 대비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요즘 하늘을 찌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반일(反日) 감정은 임진왜란과 일제의 식민 지배라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시기적으로 가까운 식민 지배에 대한 반감이 임진왜란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7년 침략 전쟁’이었던 임진왜란과 식민 지배를 비교할 때 어느 쪽 피해가 더 컸다고 섣불리 결론 내리기는 힘들다.

식민 지배는 1910년 강제 병합으로 시작하면 2019년 현재 109년이 경과했고 1945년 해방을 기점으로 잡으면 74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한국인 대다수가 식민통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인데도 반일 감정의 강도는 오히려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 사회의 반일 감정은 어떠했을까 궁금해진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을 ‘원수의 나라’로 간주하고 증오심과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부터 160여년이 지난 1763년에 이르러서도 이덕무라는 학자는 ‘임진왜란에 팔도(八道)의 생민(生民, 살아 있는 백성)이 남음이 없었으니 구세(九世)의 원수를 잊기 어렵다’는 글을 남겼다. 그는 또 조선통신사로 일본으로 출발하는 사절에게 ‘눈물이 펑펑 쏟아지려고 하니 임진년을 말하지 마오’라고 한 맺힌 송별시를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 한편에서는 일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던 점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임진왜란으로부터 100여년이 경과한 18세기에 이르면 ‘일본 알기 붐’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지식인사회의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 중에는 이익 안정복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등 오늘날에도 이름이 알려진 학자와 문인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중국에도 명성이 높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추사보다 24년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가토 기요마사에 대해 ‘일본 백성들이 지금까지 원망하고 있다’ ‘미친놈’ 등으로 나무라고 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중국의 원나라가 일본 정벌에 나섰다가 화살촉 하나도 되돌아가지 못했을 만큼 일본의 국방은 견고하다고 보았고,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칭찬했으며, 부산의 왜관에 있는 격자창이 정결하고 밝고 따듯해서 좋다고 일본 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다. 다산은 또 ‘오학론’이라는 글에서는 ‘일본이 나라를 유지해 가는 규모와 기강이 정제되어 문란하지 않고 조리가 있다’고 쓰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조선에 대해 일본의 문물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을 개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그곳에 표류하면 그들은 번번이 새로 배를 만들어 돌려보냈는데 그 배가 절묘했다. 하지만 조선에 도착하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부수어서 그 법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조총(鳥銃)의 제도도 끝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해사견문록’ 발문)

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높은 평가는 요즘 한국의 정서로는 언뜻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의아한 느낌마저 든다. 일본의 근대 유학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강항이 일본 현지에서 주자학을 전수해 시작됐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고, 유학의 수준 자체도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대부분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다산이 강진의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일본에 근래 명유(名儒, 뛰어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지난번 통신사가 다녀오는 길에 사사모토 렌(篠本廉)이라는 사람의 글 3통을 얻어가지고 왔는데 그 문장이 정밀하고 날카로웠다’고 칭찬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일본의 문학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기술했다.

다산은 임진왜란 이후 9차례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통신사를 통해 국내에 다량으로 반입된 일본 서적과 문헌을 많이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일본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한 정보보고서인 ‘왜정고(倭情考)’를 만들었으며 따로 ‘일본론’이라는 글을 남겼을 정도로 일본에 대해 해박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이야기를 추사로 넘어가면 추사 역시 일본 유학에 긍정적 인식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는 과거에 일본 사람들이 지은 문장은 천박하고 어그러졌으나 최근에는 천박하고 어그러진 누습을 완전히 씻어내고 문격(文格)이 빛난다고 평가했다. 추사는 시(詩)를 통해서도 일본 유학을 칭찬했다. ‘경서를 풀이한 것이 어찌 그리 기이한가/이등인재(이토 진사이)와 적생조래(오규 소라이)의 글을 진작에 보았네/뒤에 나온 이 더욱 깊고 정밀하지만 인재가 허술하지는 않더라.’(‘방회인시체’ 중에서) 일본 근대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를 평론한 글이다.

추사는 다산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문화 수준과 역량에 대해서도 부러운 마음을 토로했다. ‘나가사키의 선박이 늘 중국과 왕래하는데 비단과 동(銅) 무역은 오히려 부차적이고 천하의 서적을 산과 바다를 건너 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옛날에는 우리에게 의지해야 했는데 마침내는 우리보다 먼저 보는 것도 있다. 한 가지를 엿보면 천하의 형세를 알 수 있다. 저들이 비단과 동, 서적 이외에 또 중국에서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다산과 추사의 글을 접하면 착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지울 수 없다. 이들에겐 일본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바라보려는 학문적 자세가 돋보인다. 의외로 일본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하고 있었고 일본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들에게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여전히 생생했을 터인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와 함께 현재의 한국 정서에서라면 이런 표현들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따져보게 되는 것이다.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일본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피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하다. 일본 여행을 가는 것, 일본 물건을 사는 것도 괜히 꺼림칙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방식으로 과연 일본을 넘어설 수 있을까 우려하는 이들도 있지만 ‘반일 감정’이라는 거센 물살에 압도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요즘 한국의 일본 이해는 단편적이고 제한적이다. 실상과 괴리된 인식도 적지 않다. 일본에 자주 여행 가는 시대가 됐지만 한국인들의 주된 관심은 쇼핑과 음식이다. 일반 사람들이야 그럴 수도 있다지만 지식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은 어떤가. 역사학자들은 어떤 결론을 내려놓고 거기에 역사를 꿰어 맞춘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고 지식인사회 대부분이 일본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걸 포기한 채 침묵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서 지식인의 사명 운운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다.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면 1811년 마지막 조선통신사가 다녀온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일본 연구는 주춤해지고 사실상 공백기가 되고 말았다. 반면에 일본 쪽은 이른바 국학자들을 중심으로 19세기 들어 조선 연구가 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멸시론과 침략론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조선은 망국으로 치닫게 된다.

요즘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자신감에는 경제적 요인도 작용하고 있다. 2022년이 되면 구매력 기준으로 한국의 국민소득이 일본과 엇비슷하게 된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만약 한국이 일본의 경제력을 능가한다고 해도 문화적 역량에서 일본을 넘을 수 있느냐는 또 다른 과제가 남는다. ‘문화국가’를 지향했던 다산과 추사가 냉철함과 차분함으로 일본을 파악하려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시대 일본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이퇴계의 ‘자성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 같은 우리 책들이 출판되어 널리 읽히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면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학문적 용기와 실리적 눈으로 일본을 바라보게 될까.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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