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조우, 흑백 사진 같은 옛일 떠올라
시대의 아이콘 박정희, 동시대인들 미치게 만들어
선견지명과 솔선수범 없는 지도력은 허구
나라 지킨 전쟁영웅, 경제발전 산업역군 공경할 줄 알아야
지도력 상실과 성급한 화해, 역사관 혼돈 불러와
극명하게 갈린 민심, 극복 불가 수준

김정산 작가

 

내달 계획 중인 김용삼 대기자의 <대한민국 유전자 여행> 프로젝트 답사차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찾았다. 정오가 조금 지나 도착한 생가 입구에 싸리비를 든 관리인이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을 쓸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본 첫인상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건물이며 주차장, 관리소와 꾸며놓은 기념관의 모습들이 몹시도 소박했다. 약간 뜻밖이지만 왠지 그래야 박정희란 이름에 걸맞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얼마 전엔 춘천과 화천의 한국전쟁 격전지도 답사한 터라 더욱 소회가 색달랐다.

주차장에서 기념관과 홍보관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박정희 하면 떠오르는 것들, 새마을 운동 동상, 보릿고개 체험장 등이 생가 주변에 배치돼 있고, 민족중흥관에서는 주로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중심으로 돔영상 상영도 시간대별로 하고 있었다.

고백하거니와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추억 소환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슨 블랙홀로 빨려들 듯 사정없이, 정말 사정없이 50년 전 세상으로 급속히 빨려들고 말았다.

펜앤투어 답사가 아니면 이곳에는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나는 개인적인 이유로 박정희, 또는 박정희 시대에 원한이 있는 사람이다. 실향민인 아버지가 부산 서면에서 20여 년간 제재소를 운영했는데, 당시 여당 지역구 국회의원이 찾아와 정치자금을 요구했다. 일언지하에 거절한 대가는 엄청났고, 그 후로 우리 집은 쫄딱 망해서 식구대로 오래 고생했다. 부모님도 그 바람에 슬프고 가슴 아프게 돌아가셨다.

박정희 시대가 끝나고 다시는 되돌아보지 않은 세월, 그리고 박정희.

생가 전경
생가 전경

생가는 박정희가 태어나서 대구사범학교를 떠날 때까지 20년간 살았던 집이라고 했다. 생가 안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고, 따로 추모관이 한쪽에 있었다. 모든 것이 ‘대통령 박정희’보다는 ‘인간 박정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모습,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 여러 가지 특유의 표정들과 함박웃음, 놀랍게도 한쪽에 틀어놓은 화면에선 그가 유행가도 불렀다. 곡목은 고복수의 짝사랑, 노래를 부르다가 실수해서 겸연쩍게 웃는 모습은 마치 이웃집 아저씨처럼 순박하고 소탈했다. 살아생전엔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결코 보지 못했을 자연인 박정희의 모습들이 생가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줄곧 유년기를 더듬고 있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풍경들, 당시의 말법처럼 <닦고 조이고 기름 치던> 또는 <싸우면서 건설하던> 사람들, 그때 세상은 지금과는 아주 판이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눈만 뜨면 치열한 경쟁, 어떻게든 남보다 앞서려고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일이든 공부든 그 무엇이든 무조건 남보다 잘하고 볼 일이었다. 결과가 나쁘면 나머지는 변명이었고,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용서되는 사회, 어떤 학자가 그 시대를 일컬어 돌관주의(突貫主義)라고 했던가. 불도저처럼 앞으로만 돌진하는 살벌한 무한경쟁, 그 뜨겁고 숨 막히는 열기 속에서 최고의 가치는 오로지 국가였다. 하긴 국가 자체도 북한과 무한경쟁에 몰입해 있었다. 우리가 지켜야 했던 건 민주, 시장, 자본, 그리고 자유였고, 우리가 몰아내야 했던 건 가난과 빨갱이였다. 뭐든 남보다 잘해야 성공하는 사회, 이것이 그 시대의 율법이었다. 그때처럼 말하면 지금은 돌 맞는다. 공부 못하면 다른 재주 있겠지. 공부 못해도 잘사는 재주 있을 거야. 뭐 잘 못살면 어때, 행복하면 되지. 박정희 시대 역시 이렇게 지금 말하듯 하면 돌 맞았을 거다. 그 시대 율법은 아주 단순했다. 공부 잘하면 성공, 성공은 행복. 공부 못하면 실패, 실패는 불행. 공부 아니라 뭐든 남보다 잘하면 성공과 행복, 남보다 못하면 실패와 불행이었다. 마치 흑백 사진 같은 이 단순함과 명료함의 매력이 당시의 민심을 뒤흔들었고, 가난을 내 손으로 뿌리 뽑겠다는 전 국민의 결의로 불타올랐다. 국가 발전과 조국 근대화란 대의명분 앞에서 국민은 일제히 대동단결했다.

박정희 같은 시대의 아이콘들은 동시대인을 미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동시대인을 미치게 만들어 한 시대를 이끌고 나가는 힘, 개인의 힘을 모아 국가의 숙원을 이루는 동력으로 승화시키는 기술, 요즘 내가 찾아다니는 김유신이 그렇고, 김춘추가 그렇다. 이 기술의 핵심 요체는 선견지명과 신념, 그리고 솔선수범이다. 셋 중 하나가 빠져도 지도력은 거품처럼 사라진다. 지도력이 사라진 곳에서 민심이 극명하게 나뉘고, 근신과 측근이 발호하고, 비리와 적폐가 눈처럼 쌓이는 것이다.

너무도 까맣게 잊고 산 박정희 시대를 40년 만에 갑자기 맞닥뜨린 일은 나를 수많은 상념에 젖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많은 이가 박정희 시대의 공과를 논하며 이쪽과 저쪽으로 갈렸지만 나는 어느 쪽으로든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양친도 모두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박정희 시대와 지금은 누가 봐도 명백히 다르다.

많은 가치들이 뒤집혔고, 딴 세상처럼 사회도 변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런 시대는 그 후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동시대인이 모두 열광했던 시대, 전체를 위해 개인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던 시대, 닦고 조이고 기름 치던,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며 싸우던 시대는 지상에서 사라졌다. 아울러 국민 대다수를 미치게 만드는 지도자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생가 주변에 머물렀다.

해묵은 사감(私感)을 가슴에 묻고 돌아서려는데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내가 막 생가를 떠나려 할 때 마침 관광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7,80대로 보였다. 그들은 생가 주차장에서 내려 조금씩들 불편한 걸음걸이로 기념관으로 향했다. 필시는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리라.

한 노인이 생가 입구에 세워둔 박정희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옷소매로 사진 속의 얼굴에 묻은 먼지를 쓱쓱 닦는 게 아닌가. 순간 불현듯 뇌리에 떠오르는 모습, 바로 우리 사무실 근처 탑골공원에서 거의 날마다 보는 노인들이 오버랩되었다.

생가 공원
생가 공원

아, 그렇구나. 저들이야말로 박정희 시대를 함께 일군 전사들, 현장에서 피땀 흘린 산업 역군들, 전쟁의 폐허 위에 세계 10대 교역국의 금자탑을 찬란하게 세운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이 이젠 늙고 불편한 모습으로 만추의 노을 속에 서 있는 것이리. 리더를 잃은 어제의 용사들이 마치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스타크 가문의 잔병들처럼 때론 공원을 어슬렁거리고, 양지에 앉아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옛 리더의 생가를 찾아와 옷소매로 사진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는 것이리라. 알맹이는 자식들 낳아 키우느라 다 써버리고 이젠 쭈글쭈글 빈 껍데기만 남은 그들, 문득 최근 광화문 광고판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글,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라고.

그네들의 눈에 비친 오늘은 어떨까? 발전의 혜택은 다 누리면서도 고마운 줄 모르는 자식들, 손자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할까? 지난달 찾아간 춘천지구 전적비 앞에서도 그런 생각을 한동안 했었다. 소양강에서, 춘천, 화천에서, 용문산 전투에서, 철원 백마고지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정인과 선후배를 잃은 사람들, 지금의 대한민국을 싸워서 지켜내고 일군 장본인들이 탑골공원에서, 광화문에서, 박정희 생가에서 바라보는 오늘은 어떨까? 평화를 내세우며 혼자 함부로 화해하고, 김일성의 손자를 끌어안고, 그러고도 말 한마디 못한 채 국토를 빼앗기고, 안쓰러울 정도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심지어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마저 인민군과 합동 행사를 치르겠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이 철없는 5년짜리, 아니 앞으로 남은 2년 반짜리 정권을 바라보는 그네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사회적인 약자는 이제 그들이다. 벌레 먹은 앙상한 나뭇잎들, 그 나뭇잎을 갉아 먹고 자란 벌레는 나를 포함한 우리 뒷사람들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그 모든 것이 그들이 아니면 우리 눈앞에 하나라도 있겠는가?

저녁을 먹으러 생가 인근의 한 식당에 들어갔다.

텅텅 빈 식당, 후덕하게 생긴 안주인은 물잔을 갖다 주며 어디서 왔느냐고 내게 물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그녀는 다짜고짜 사뭇 격앙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아이고, 서울은 어떻는가 몰라도 우린 여기 다 죽습니데이! 평생 장사하면서 이런 불경기는 보다가 처음이라예. 참말로 우짤라꼬 이라는 기라예? 인자 우리는 우짜면 좋습니꺼? 데모하러 우리도 서울로, 광화문으로 갈까예? 뭘 우짜면 좋을지 말씀 좀 해주이소! 예 슨생님요?”

짧지 않은 길을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양쪽으로 갈린 민심은 국토를 발로 뛰어다니다 보면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파경을 앞으로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어디만큼 와서 기분 전환이나 하려고 이리저리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데 어느 채널에서 아나운서가 청와대 발표라며 전한 말은 나를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다. 임기의 반환점을 넘긴 문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이라고. 저성장 기조와 주력 산업 위기 상황에서 지역의 새로운 발전 기회를 제공한 경제 대통령이라고!

김정산(펜앤투어 대표작가) penntour@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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