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사용될 개정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많은 (우파) 단체들이 연일 성토를 하였다. 사실 그런 성토를 보고 있으면 역사교사로서 착잡한 생각이 든다. 이미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학교에서 태연히 한국사 교과서 선정 작업에 동참해서 각 교과서에 평가 점수를 주고는 곧 학교로 오게 될 교과서는 머리 속에서 한켠으로 치워버린 후 분주히 겨울방학 전 업무에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다.

, 차분히 책상에 앉아 생각을 해보면 이 사태의 본질은 단지 개정 교과서 내용에 천안함,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소위 친북 좌익적 기술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교과서는 학생들이 잘 읽지도 않는다. 정작 학생들이 경전처럼 공부하는 EBS 교재의 내용이야 분량이 전근대와 근현대사 내용이 대폭 조정되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별로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예상된다. 시험 공부하는 학생 입장에선 역사가들을 갑론을박하는 역사 내용의 서술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마련이다. 우파 지식인들이 얘기하는 친북좌익적 교과서라고 하는 낙인에 전연 동의하지 않을 절대다수의 대한민국 역사교사들 역시도 전과 변함없이, 교과서에 적힌 내용들보다 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반일 민족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논조로 뜨거운 열정을 불사르며 수업을 해 나갈 것이다.

얼마전 서점에서 최근에 출판된 <일제종족주의>라는 책을 보았다. 이 저자들은 마치 자신들은 개인주의의 철학적 시선으로 한국사를 집필하기도 한 마냥, 그 전부터 한국사회의 집단주의에 대해 경고하며 그 연장선에서 tribalism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이영훈의 고민 따위는 비웃듯이 똑같은 단어를 써서 제목을 삼았다. 물론 내 시선으로 보면 이들은 민족주의를 신성시하는 집단주의자들이다.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지금까지의 한국사 교육지침인 (닫힌 민족주의의 대안이라는) 열린 민족주의로는 성에 안 차 아예 대놓고 ‘저항적 민족주의’를 주된 철학적 프레임으로 삼아 한국사를 연구하며 모름지기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그러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듯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지할 국사학계와 한국 대중의 집단적 파워를 등에 업고, <반일종족주의> 저자들과 같은 ‘부왜노’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학자끼리 상대 학자를 ‘처벌’을 하자니, 사문난적으로 몰아 사약이라도 내려야 한다는 것인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들을 보면 그 잘난 학자 관료들이 주도했던 조선의 정치사에서 왜 그들이 그토록 사이좋게 사약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피비린내나는 정치를 펼쳤는지 잘 이해가 간다. 이들 <일제종족주의>를 펴낸 학자들이 주장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개념이야말로, 그다지 실증적 근거가 부족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에 가깝다. 노골적으로 그들이 주장하듯, 일제의 가혹한 지배에 맞선 20세기전반 한국사의 서사를 위한 목적에 봉사하는 개념인 것이다. 실증적 논리라면 그렇게 다른 주장을 하는 학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공격적인 태도가 나올 수도 없거니와, 해방 후 지금까지 축적된 다양한 연구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얼’이나 ‘혼’과 같은 지극히 인문학적인 개념에 토대를 둔 일제하 민족주의 역사관으로부터 이어지는) 일관된 서사의 틀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렇다. 인간의 현실 역사가 그렇게 도도한 하나의 물결처럼 일이관지(一以貫之)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보는가?

이와 같은 시각은 본질적으로 정과 사, 선과 악, 약자와 강자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기반한 인간의 본질적인 편견과 오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실제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좌파와 우파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가슴 아픈 현실이긴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감안하면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심리적 본성 상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습성과 관계 깊다. 자신의 뇌의 이성의 법정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재판관은 자기자신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 속 이성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자신과 남에게 이중 잣대가 적용되는, 자신에게만 관대한 판사의 판결이다. 자신은 이 모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적이고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화되고 정당화되는 반면, 타인은 선과 악으로 그의 행동이 단순히 재판된다. 가령 춘향전을 읽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사또를 욕하기 바쁘지, ‘어떤 특정한 상황과 조건에서 그러한 사회현상이 나타나게 되는가’를 생각하며 조선후기 탐관오리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다. 경제철학 보다는 소설을 읽는 편이 훨씬 쉬운 것이다.

대중의 감성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이상주의적 명분론을 지지하는 집단은 늘 그 사회의 주류이며, 대중보다 많이 가진 자를 객관적인 경제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집단은 다수로부터 ‘정의롭지 못하거나 따뜻한 마음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격재판 속에 살아가게 된다. 먹고 사느라 바쁜 대중은 후자의 항변을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은 것이다. 우파 개인주의자로서 살고 있는 나 역시, 좌파적 사회관의 매트릭스 안에서 잠자던 20대 대학시절, 무지했지만 뜨거운 열정만으로도 주변의 공감과 지지를 누릴 수 있었던 나날들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한국사를 연구해온 많은 국사학자들의 시각은 사회주의의 갈등론적 (계급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각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다. 내가 <일제종족주의> 저자들과 같은 반일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던 이유도 이들의 생각이 바로 현행 한국사 교과서, 더 나아가 한국의 역사교육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나 인문학적인 시각에 파묻혀 사회과학적 인간 이해를 결여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적 갈등론의 세계관에서 결코 벗어나오지 못한 채 그에 함몰되어 한국사를 바라본다.

사실 개정 역사교과서의 본질적 문제는 그나마 기존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가지고 있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분류사적인 사회과학적 접근법 대신, 전근대사를 대폭 축소하고 근현대사의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의 가치 표방에 할애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인문학적 역사로서 한국사의 이해를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한국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한국사는커녕 지금의 한국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비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고 생활을 해나가게 된다.

지금의 한국처럼, 정치적으로 democracy를,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채택하는 국가의 경우 그 희생양으로 가장 적합한 대상이 바로 자본가들이다. 경제적으로는 당연히 자본가가 갑이겠지만, 대한민국은 18세기 영국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목놓아 외쳐지는 사회에선 다수가 갑이고 소수가 을인 법이다. 가령 다수가 누진세율을 더 가파르게 만드는 법을 지지하는 사회에서 돈은 많지만 투표권이 적은 자본가들이 ‘이론적으로는’ 희생양이 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본가의 돈은 곧 소비자의 돈이자 근로자의 돈이기도 하므로, 그러한 징벌적인 세제의 궁극적인 희생양은 가장 힘 없는 근로 서민이 되고, 정부(정치인, 관료, 공무원)만이 이 먹이사슬의 최종 승자가 된다.

굳이 근현대사가 아니더라도,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사회였던 조선 사회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가령 극심한 재정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 후기 정부는 대동세, 결세 등을 통해 지주 계층을 수취의 주 타겟으로 삼는 수취 개혁안을 시행하였다. 그러한 정책이 도덕적 명분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세는 결국 소작농에게 전가되었으며 농민의 몰락 만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과연 지주는 악당이고, 농민은 선한 양이고 民本主義 명분을 내세운 조선정부는 정의의 사도였을까?

한국교육은 언제까지 사회주의적 갈등론에 바탕한 민족 서사시로서의 한국사를 고집할 것인가? 이런 끝도 없는 한국사 논쟁을 하느니 차라리 한국사가 아닌 세계사를 제대로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이 백번 낫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배민 (서울 숭의여고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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