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 70년 세월동안 발전시켜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급격하게 파괴되기 시작
조국 사건, 돈과 추상적 어휘에 속기 쉬웠던 국민들을 최면에서 화들짝 일깨워
윤미향 사건, 수치심과 모욕감, 절망감이 뒤섞여 폐부를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분노
인간과 금수를 가리는 근본 잣대는 수치심을 느낄 줄 아는가 모르는가 하는데 있어
대한민국 국민, 힘이 없더라도 금수가 아닌 사람으로 살려는 노력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

이인호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4.15 총선을 계기로 우리 대한민국은 일당독주의 길로 들어섰다. 이제 공수처가 설치되기만 하면 그 독주는 단순히 일당 독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라 살림 전반에 대한 집권 세력의 어떤 횡포도 막을 길이 없는, 민주주의로 위장한 전체주의 체제로 굳어질 수도 있다. 매우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지는 이미 한참 되었다.

일당 독재가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은 아니고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 결과만을 낳는 것도 아니다. 절대군주 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는 이른바 ‘계몽 군주’의 역할이나 ‘계도적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과도적 형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가까이는 싱가포르가 하나의 성공사례라고 볼 수 있다. 또 이제는 모범적 사회민주주의 부국이 된 핀란드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케코넨 대통령이 25년간 장기 집권을 하며 강권 통치를 했다. 우리도 ‘군사 독재’는 예외로 하더라도 자유당 독주 시절을 길게 겪었으며 일본의 자민당은 그보다 더 긴 권력 독점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성공 사례로 꼽히는 이러한 일당 독주 체제들이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자주 독립의 수호’나 ‘무정부 상태 극복’, ‘절대 가난 퇴치’ 같은, 누구도 거부 못할 긴박한 과제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아울러 독점적 권력행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대체로 국가적 대의 실현을 향한 의지와 희생정신, 교육수준, 경륜 등으로 볼 때 일반인들보다는 월등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인정받는 인물들이었다. 정치 권력은 독점했지만 그들이 내세웠던 목표는 개개인의 기본적 자유, 법 앞의 평등, 정의와 번영을 추구할 권리 등 현대 국가들이 추구하는 인류 보편의 이상 달성을 위해 국익을 극대화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참여권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경우라도 인간의 기본권으로 간주되는 것들, 곧 생명, 재산, 양심과 언론의 자유 등을 임의로 침해 당할 위험으로부터는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일찍이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던 스위스의 경우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1970년대로, 우리보다 30년 가량이 늦었다. 일본에서는 자민당이 오래 독주를 했다 해도 그 나라에 양심과 언론의 자유가 없다거나 경제적 가난 밖의 다른 이유로 시민의 기본권이 침해당한다는 이야기는 극좌의 적군파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주장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부정과 부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정치 세력은 없고 권력 독점 정도가 강할수록 부패의 유혹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사회민주주의 이상에 접근해 간 사회에서는, 적어도 부도덕이나 위법 사례가 발각될 경우에는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시정을 약속할 줄 알았다. 지적, 도덕적 하한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는 실수와 그에 대한 단호한 항거와 시정이 거듭되는 동안에 민주주의 이상과 정신은 제도로서 뿌리를 내리고 특정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의 폐단도 줄어들 수 있었다. 다당제나 연립정부 체제가 성공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나라 상당수가 아직도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고 캐나다나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외국의 여왕을 군주로 인정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재 우리 대한민국에서 가동되기 시작한 일당독재체제는 사람이 사람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성공한 과도적 일당 독재 체제와는 출발점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이미 경제 발전과 민주화 양면에서 상당한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였다. 대다수의 무지한 백성 위에 소수의 특정 계급이나 집단 출신이 군림하는 가난한 무지한 전근대적 독재 국가가 아니었다.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 ‘혁명’, 이른바 ‘촛불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의사 표출을 위한 정상적 통로가 막혀 억눌려 지낼 수 밖에 없었던 다수가 오랜 고통과 차별 끝에 들고 일어난 ‘민중혁명’이 아니었다. 권력 독점을 서두르는 친북, 친중, 반미, 반대한민국 성향의 특정 집단이 대중 매체를 활용한 여론 조작과 선동을 통해 반체제적 쿠데타(정변)에 성공을 거두고 국가권력을 사유화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현상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70년 세월동안 발전시켜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급격하게 파괴되기 시작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목마르듯 외치면서 일당독주를 당연시 하는 문재인 정권 아래서 대한민국 국민이 70년의 세월을 거쳐 발전시켜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급격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국민은 주인이 아니라 우롱과 착취의 대상으로 서서히 전락하고 있지만 국민은 그 것을 감지하지도 못했다. 몇 가지 큰 특징으로 요약되는 국민 길들이기 전략 때문이다.

첫째는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실질적 행동 사이의 불일치는 궤변과 위선을 넘어 아예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솔한 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파괴하고 유린한다는 점이다. 문재인은 ‘제왕적 대통령 권력’ 남용의 폐단을 뿌리 뽑고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겠다는 달콤한 소리로 유권자들의 표를 얻었다. 하지만 대권을 쥐는 순간 그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집기 시작했다. 반공국가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킨 인물 거의 모두를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박해하는가 하면 핵무기까지 갖추고 우리를 넘보고 있는 북한과 무장 해제에 가까운 ‘합의’를 강행하였다. 그 것을 모두 ‘민족공조’와 ‘평화’의 이름으로 포장함으로써 우리 국민이나 국제 사회가 의혹을 품고 항의할 틈도 주지 않았다.

경제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효능과 안정성을 인정받는 우리 원전 산업을 하루 아침에 초토화 시키고 우리 경제 발전의 견인차요 버팀목이었던 대기업들을 모두 죄인 집단으로 몰았다. 또 경제적 약자들을 위해 소득 주도 성장을 추진한다는 구실로 중소기업들까지 격타했다. 모두가 무소불위한 ‘대권’의 발동으로 전광석화 같이 이루어진 일들이다.

두 번째 특징은 국민 통합이 아니라 차별과 분열을 통한 지배 전략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사람’ 중심 정치에서 사람이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왔던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 국회의원들 눈에 대한민국 국민은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 받으면서도 다 함께 자유와 법 앞의 평등을 누려야 할 운명공동체가 아니다. 계급 투쟁을 강조하는 전통적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를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가른다는 것이 상식이며 현재 우리 집권 세력도 부자 때리기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그런 계급투쟁적 언어의 효과를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이미 기득권 세력으로 부자가 된 사람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친문 골수의 국민 길들이기 전략은 조금 다르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동등하게 나라의 주인이 아니다. 과거의 국민은 이제, 저들의 권력장악과 유지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신 귀족으로 특별대우를 받는 몇몇 특수 집단과 전 정권들과의 유대 때문에 적극적 토벌의 대상이 되어야 할 집단, 그리고 나머지 일반 일개미와 세금주머니로 나뉜다. 한 마디로 소수의 신 귀족 집단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한번도 경험한 일이 없던” 새 체제 아래서, 주인이 아니라 독재 권력의 ‘식민지화’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

불과 한두 해 사이에 정신 차릴 여지없이 진행된 그런 변혁 가운데서 각양 각색의 ‘민주화운동’ 명분의 시민단체나 과거 권력에서 소외당했던 전문가 집단 출신이어서 ‘신 귀족’으로 승격한 사람들은 당연히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반면에 이미 ‘적폐’로 낙인 찍혀 “자살을 당할” 정도로 수모를 겪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주인의 위치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심지어 야당 국회의원들까지도, 혹시라도 단순한 무시와 견제 대상에서 적극적 토벌의 대상으로 재분류 되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스스로 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문 모르는 공돈을 받게 된 서민들이야 나라 살림 거덜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수만 치면 되니 영구집권 전략으로 이런 ‘분열과 지배’ 정책처럼 효율적인 것이 없을 듯 보인다. 문제는 앞으로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가 어떤 것인가에 있다.

은근한 공포를 숨겨진 무기로 활용하는 이러한 국민 길들이기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문재인 정권이 동원하는 포괄적 수단이 이른바 ‘역사바로잡기’이다. 지나간 역사를 왜곡 날조하여 이성적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원초적 감성에만 호소함으로써 우리 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배타적 민족주의 정서와 계급 갈등에 기초한 적개심에 불을 붙여 정치 자원화하는 것이다. 스탈린을 필두로 역대 폭군들이 공유했던 이 세 번 째 특징이야말로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가장 범죄적이고 독성이 강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역사에 절대적 진리와 정의라는 것이 있으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규정할 수 있는 특권이 자기들에게 주어졌다는 주장으로 오만과 독선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식구조에 기초한 법들이 미칠 여파로 볼 때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생사 박탈권 독점 주장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역사는 바야흐로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전, 임금이 삼족을 멸할 것을 명할 수 있던 사화당쟁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과거사에 관해 진실이 무엇인가를 규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가정 아래 각종의 역사관련 특별법안들을 상정해도 야권 정치인들도 일반 국민도 강력하게 항의 할 줄을 몰랐다. 공공매체들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는 없다. 그런 마당이니 법이고, 윤리고, 학술이고 맥을 출 수 없고 나라 살림의 어느 영역에서고 창의적 혁신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통치권자들의 시선이 과거로 향해 있는 사이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사태 이후 모든 일에서 예측불가능성이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 될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마당에서 우리 국민의 미래는 아예 암흑으로 뒤 덥히게 되지 않을지 두렵다.

같은 여당 내에서 상층부의 결정과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도 곧바로 처벌이나 불이익의 대상으로 떠오르니 그런 정당이 스스로 창조적 탈바꿈을 할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적진으로 간주되는 야권을 길들이기 위해 저들이 사용하는 방법이 얼마나 간악할지는 짐작 할만한 일이다. 왜 야당이 야당답게 싸우지 못하는가라는 국민들의 애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기에서 간단히 나온다고도 볼 수 있다. 중간 선거에서 역사적 유례가 없고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의 참담한 패배를 안게 된 야당은 점 점 더 거세지는 부정선거 의혹 규명 요구에 대해서 오히려 함구령을 내리다시피 하고 그 참패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영입하는 것을 보면 정신의 타락과 도덕적 용기의 결핍은 이미 집권 세력의 독점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대한민국에서 선거민주주의는 이미 생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사람으로 살아남기를 원하는 일반 국민들은 힘이 없는 가운데서도 서둘러 자구책을 찾아 나설 때이다.

진실을 독점할 권리를 주장하며 일당 독주에 돌입한 집권 세력의 역사 뒤집기 작업은 이제 수세적 방어에서 적극적 공세로, 곧 사실에 대한 편향된 해석과 왜곡에서 사실 날조로 나아가는 듯하다. 대한민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정치범들을 무죄로 만들어 민주화 영웅으로 추대하더니 이제는 일반 형사 재판에까지도 손을 대겠다는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6.25전쟁 당시 북한 전쟁영웅이었던 김원봉을 국군의 원조로 추켜세우더니 보훈처는 이제 6.25전쟁의 대한민국 일등 영웅 백선엽 장군이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힐 권리를 사전에 봉쇄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 뿐더러 무시할 수 없는 뚜렷한 물적 증거 때문에 횡령과 독직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형사범 전직 총리를 무죄로 만드는 작업까지 국회가 해내겠다고 나섰다.

‘촛불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현 집권 세력은 심한 친북, 친중 편향의 좌파 집단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타당성 자체를 공공연하게 부정하는 세력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 장악과 유지에 필요한 정치 일정을 ‘분단국가의 국민’을 넘어선 ‘민족 전체’, ‘권력’이 아닌 ‘사람’을 위한 정치, 동족간의 갈등과 전쟁이 아닌 ‘평화와 협력’의 길, ‘약자를 위한’ ‘강자와 부자 때리기’ 등 달콤한 미사여구로 포장하여 반론의 여지가 없게 선전하는데 귀재들이었다. 반면에 미국과의 동맹 덕분에 비교적 일찍부터 누 릴 수 있었던 정치와 경제 발전의 효과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물질만능주의적 자기도취에 빠져 정치에는 무관심해졌던 대한민국 기득권 세력은 나라의 기둥들이 하나씩 뿌리 뽑혀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구책을 강구할 용기와 희생정신이 없었다. 서민층은 화려한 돈 잔치에 매료되어 나라가 빚더미에 올라앉는 것을 못 본 척했고 설익은 지식인, 문화인층은 불로소득이 늘어나는 것이 마치 복지국가의 정착이요 진보의 표상인 듯 미화만 했다. 그 중에서도 기회주의의 압권은 정권의 시녀가 된 언론계였으며 자산가들은 ‘설마’하는 이기적 자기최면에 빠져 닥쳐오는 위기를 미리 막으려 하지 않았다.

조국 사건, 국민들을 최면에서 화들짝 일깨워...윤미향 사건, 수치심-모욕감-절망감 뒤섞여 폐부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분노

공것으로 생기는 듯한 돈과 추상적 어휘에는 속기 쉬웠던 국민들을 최면에서 화들짝 일깨운 것이 조국 사건이었다. 배운 것이 따로 없는 사람이라도, 법에 대한 전문 지식과 공적 지위를 이용하여 사익을 챙기고 자식 입시 관련 문서를 위조하다가 검찰의 지목을 받게 된 사람을 굳이 법무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고집하는 데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해서는 그처럼 혹독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었던 본인과 그를 옹호하는 대통령의 변명은 위선과 궤변의 극치였고 다행히도 국민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롱의 대상으로 아는 문정권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몇 백만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아직 우리 국민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고 결국 조국의 사퇴를 얻어냈다.

조국의 뻔뻔스런 행태와 그를 ‘수호’한다는 일부 인간군의 정치행동에서 우리는 정치적 맹신과 도덕불감증의 극치를 보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정권의 도덕적 추락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최근에 터진 윤미향 사건은 조국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조국의 장관사퇴 후에도 권력 측의 반성은 없었고 공수처 설치니 검찰 개혁이니 하는 이름으로 법치에 대한 유린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조국이 저지른 일의 피해는 불특정 다수에게 미치는 것이라서 개인적 정서적 충격은 덜 했다. 그 일로 해서 대다수 국민이 느끼는 분노는 아픔보다 경멸과 동정이 뒤섞인 것이었다.

윤미향 사건을 보며 느끼는 분노는 또 다르다. 30년을 함께 일했다는 위안부 출신 노인의 폭로와 고발로 수상학리 짝이 없는 행적이 들어났는데도 그를 국회의원으로 발탁한 집권 여당은 그 를 즉시 내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항의하는 위안부 출신 당사자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라면 문재인 대통령의 오랜 지지자들 까지도 공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분노는 한국인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특히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 그리고 절망감이 뒤섞여 폐부를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그런 분노라고 할 수 있다.

위안부 할머니, 심지어는 성노예라고까지 불리는 이 노인들이 어떤 분들인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참아내야 했던 어려움 가운데서도 가장 치욕스런 고통을 견디며 살아남았던 분들이 아닌가.. 여성인 그 분들의 인간적 본능은 십중팔구 하루 빨리 그 아픈 기억을 묻어버리고 ‘정상적’ 삶을 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윤정옥 교수와 이효재교 수가 정문연을 발족시킨 본래 취지는 그런 아픔을 안고 사는 분들이 만년이라도 인간적으로 떳떳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권리를 찾도록 돕자는데 있었고 폭넓은 호응을 얻었다. 그 분들은, 자기들의 인간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 또 다른 인간들이 자기들처럼 유린당할 위험을 막고 스스로의 명예도 회복하는 길이라는 설득을 받아드려 어쩌면 가족들 까지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게 될 위험까지 무릅쓰고 자기의 위안부 과거를 밝히기로 용감하게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인권운동가들과 우리 역대 정부들의 노력 덕분에 피해자들은 일정 정도의 배상금을 일본 고위층의 개인별 사과와 함께 받을 수 있게 정부간 합의까지 이루어졌던 것을 국민들은 기억한다.

그런데 정문연을 정의연으로 이름까지 바꿔가며 이사장으로 장기 집권한 윤미향은 피해자들이 응당 받을 수 있게 된 배상금을 받지 말고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요에 가깝게 종용했음이 원성 높았던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들어났다. 윤미향의 눈을 피해서야 배상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던 모양이니 주객이 전도되어도 이럴 수가 없다. 아무리 인권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이 중요하다 한들 가장 처절하게 인권을 유린당한 아픈 기억을 이미 지니고 살아온 노인들에게 인생마지막에서 또 다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라는 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권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포주가 되었다는 변명과 별반 다를 것이 있는가? 윤미향과 정의연은 그 불쌍한 여인들의 고통을 미끼로 모금한 돈을 다른 용도로 쓰는 것을 당연시 했을 뿐 아니라 공사 구분 없이 무책임하게 살림을 하면서 사익을 위해 기부금을 유용했을 가능성도 드러났다.

윤미향 사건의 핵심은 사실 개인의 비리와 도덕불감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한 ‘공로’로 국회의원으로 발탁된 것일 터인데 집권여당은 위안부 출신 당사자들 뿐 아니라 국민 70%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를 적극 비호하고 있는 사실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하고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절망감과 공포심마저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윤미향과 그 주변이 저지른 일에 대한 법적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다. 하지만 그를 동료로 크게 환영하며 감싸기에 급급한 민주당 의원들은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가? 국회가 도덕불감증 환자들의 은신처라고 인식되어도 좋고, 시민사회는 모두 정의연 같은 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인가? 촛불 시위 때를 회상해 보자. 법과 도덕의 형평성은 어찌되는 것인가? 국민 모두를 이중인격자로 만들겠다는 것인 것 아니면 윤미향 같은 사람을 국민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동료로 환영하며 감싸는 국회의원 자신들도 도덕적으로 결국 같은 부류에 속한다 함을 자인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오랫동안 우리는 위안부 인권유린 문제가 마치 한일 관계의 핵심이나 되듯이 그 일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었다. 이제 우리 한국인들은 무슨 낯으로 일본인들 앞에 나설 것인가? 선진 사회가 된 듯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하한선조차 지킬 줄 모르는 한국인은 그간의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주인 눈을 속이기만 하면 된다는 노예근성을 청산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배불리 먹고 살수만 있다면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것은 포기해도 된다는 자포자기에 빠진 것인가? 궁지에 몰리게 된 일본의 치한파들이 속으로 중얼거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래도 국민 70% 이상이 윤미향의 국회의원 자격 박탈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치욕스런 사건에서 건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요 매우 의미 있는 고무적 신호이다.

대한민국 국민, 아무리 힘이 없더라도 금수가 아닌 사람으로 살려는 노력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

인간과 금수를 가리는 근본 잣대는 수치심을 느낄 줄 아는가 모르는가 하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권력이 좋고 무섭다 해도 도덕적으로 양심을 저버리고 명분을 상실하면 몰락은 예고되어 있음을 역사는 거듭 보여준다. 일당 독재를 통해 대한민국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주역을 맡겠다고 나선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들, 그리고 언론인들은 이제 자기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민주화 운동의 선대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식과 손자들에게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년의 자기 자신에게는 어떤 자부심이나 후회를 남길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시민사회의 건강, 국회의 위신, 국민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 윤미향 같은 사람은 하루 속히 국회에서 나가거나 강제로라도 퇴출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나 더불어민주당의 일당독주는 결코 타락한 전체주의 체제의 전주곡이 아니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발점임을 온 세계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절대 다수는 아무리 힘이 없더라도 금수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인호 객원 칼럼니스트(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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