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여론 환기나 설득을 넘어 법을 제정하는 권력, 문재인 정부에 위임된 적 없다
누가 더 대중을 잘 선동하느냐로 결정되는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막는다면 이미 자유시민의 존재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정부가 할 수 없다. 그것을 강요한다면 내정간섭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기원은 빼고 유사 이래 문명의 역사를 3천년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더라도, 민주주의의 역사는 대단히 짧다. 그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분해해서 보더라도 과연 民이 主인 경우가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더 줄어든다. 남녀 누구나 선거권을 갖는다는 보통선거권의 정착은 심지어 2차 대전 후 신생국인 대한민국보다 늦은 서구민주국가도 있었다. 말이 민주주의(民主主義)일 뿐, 실제로는 권력집단의 바람몰이로 그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에 불과한 시절도 있었다. 독일 국민은 히틀러와 괴벨스에게 기꺼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신의 판단을 헌납하고 전쟁터로 나아갔다.

전체주의, 파시즘, 인민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장자크 루소는 “국민은 투표하는 날만 주인이고, 투표가 끝나면 노예가 된다”며 직접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주장했지만, 그러한 그도 (만일 그가 히틀러의 편이 아니라면) 히틀러와 괴벨스가 있는 나라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해 황당해할 것임은 분명하다. 매일 여론조사로 모든 것을 결정했을 때 특정 정치집단의 의사와 모두 일치하면 직접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며, 어제의 여론조사가 내일 달라져서 모든 것이 180도로 휙~휙~ 바뀐다면 그것도 이미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더 대중을 잘 선동하고 누가 더 대중을 선동할 매체를 쥐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며 우리는 그것을 인민재판이라 부른다.

대의제라고 불리는 간접민주주의는 국민을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한 제도였다. 선출된 대표는 단지 여론조사의 하수인이 아니고 비록 국민의 한쪽 생각이 일시적으로는 소수일지 몰라도 미래의 잠재적 다수 가능성을 ‘강제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인민민주주의(파시즘)하에서의 일방독재를 막기 위함이었다. 임기가 끝나면 국민의 손에 다시 상대다수가 결정되고 상대적 소수의 국민도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는다. 루소의 말과 달리 그래서 대의제는 “국민은 투표가 끝나도 주인이고 투표하는 날은 더더욱 주인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한편 이런 대의제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결합되어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반대의 생각, 다른 생각을 다양하게 접하지 못하는 대의제는 직접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투표제도는 존재하고 있고 최고인민회의에서 의결도 한다.

미국 수정헌법은 그래서 제1조에서 “국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or abridging the freedom of speech, or of the press; or the right of the people peaceably to assemble, and to petition the Government for a redress of grievances)”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자유민주국가라면 응당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당연한 전제임에도 그것부터 제1조로 규정한 우리 헌법과 달리, 미수정헌법은 첫 한 문장으로 국민이 자유시민이기 위한 ① 의회라는 간접민주주의제도와 ② 표현(언론)의 자유를 절대가치로 천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③ 법치주의(Law)로 보장했다(그 자유의 제한을 법으로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은 법으로 절대적으로 보장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가서,

단지 민주주의란 이렇듯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국민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인민민주주의냐 아니면 그 어떠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유 시민으로 살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냐는 위에서 보듯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막는다면 이미 자유시민의 존재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북전단 살포금지‘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은 단순히 안보적 차원의 대응이나 외교적 융통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정당성이나 효용성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여론 환기나 당사자에 대한 설득을 넘어 ‘법’을 제정하는 권력은 위임된 적이 없다. 더구나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국군을 동원하겠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단 1%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다음은 무엇인가. 중국이 위협하면, 러시아가 위협하면, 일본이 위협하면, 미국이 위협하면 모두 금지법을 만들 것인가.

나는 묻고 싶다.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정부가 할 수 없다. 그것을 강요한다면 내정간섭이다”라는 ‘주체’정부를 갖고 싶어 투표한 것 아니었나?

말을 못하는 국민은 이미 국민이 아니다. 이건 좌우의 문제도 진보-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 문제다.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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