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체제에서만 자유가 살아 숨 쉬어
경제체제야말로 자유의 실질적인 모습
한국 보수주의, 경제와 안보 직결시켜야
경제가 망가지면 절망한 국민 전체주의로 향해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트럼프와 김정은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만난다고 하니 한국의 보수층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듯하다. 한국의 보수주의자에게 오늘날의 한반도 정세는 김정은의 핵 위협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안보 문제는 한국 보수층의 핵심 이슈라 할 만하다. 그러나 지정학적 급변 사태에 대한 대비만이 안보가 아니라 경제 자체가 안보임을 인식해야 한다. 경제 체제가 점진적으로 사회주의화 하는 것 역시 국가 안보의 문제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는 체질적으로 안보를 강조하지만, 경제는 안보와 별개라거나 또는 안보보다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것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경제 체제는 별 관심 없고 안보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안보는 중요하지만, 경제는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적이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마저도 자신은 중도라거나 보수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몰가치적이고 완전 오류다. 시장경제 체제에서만이 자유가 살아 숨 쉬고, 사람들은 전통을 지키면서 품위 있게 살 수 있다. 경제가 사회주의면 실질적인 자유는 없는 것이고, 사람들은 관료적으로 된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그토록 강조했던 안보에 실패한 것이다. 경제를 소홀히 하는 보수주의자란 한마디로 자유의 가치 개념 없이 맹목적으로 한쪽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이므로 ‘수구’라는 소리를 듣는 보수주의자라 할 만하다.

안보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키는 것, 즉 자유주의 국가 체제를 전체주의 침략자로부터 지켜내는 것임을 생각하면, 안보는 곧 경제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제 체제야말로 자유의 실질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흔히 경제적 자유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참정권이니 언론의 자유니 하는 시민적 자유도 경제가 국가에 의해 장악되는 체제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임을 생각하면 자유로운 경제야말로 자유의 본질에 가깝다.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늘 강조하는 안보란 자유롭게 열심히 기업을 경영하고, 그 결과 모든 개인은 다양한 조직체에 고용되어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며 일할 수 있고, 그런 가운데 스스로 성장하는 체제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국가에서 일자리와 사는 곳도 정해주지만 혁신과 생산성은 없고, 결과적으로 할 일도 없는 매스게임 같은 체제에서 살 것인지의 문제다.

미국의 트럼프 정부의 홈페이지를 보면 그들은 안보와 경제가 동전의 양면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자유로운 경제에 의해 경제적 풍요를 지켜야만 미국이 자유 진영의 안보를 지켜낼 수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자유로운 경제를 위해 실시한 감세 정책의 효과로 지난 2월 중에 31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고, 노동 인력은 80만 명이 더 늘었으며, 실업률은 지난 17년 이래 최저 수준인 4.1 퍼센트라고 공시하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경제정책으로 경영 환경이 개선됨으로써 해외로 나갔던 공장이 다시 돌아오고, 기업체가 새로운 투자에 나서면서 생긴 효과에 대해 국민들에게 연일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일본도 사상 최고수준의 기업 수익과 사실상의 완전고용 수준인 실업률 2.4%라는 경제 성적표를 발표하며 디플레이션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이는 지난 2012년에 출범한 아베 정부의 법인세율 인하와 각종 규제 철폐 등 친기업 정책으로 기업 환경이 좋아졌고, 이런 가운데 일본 기업들이 핵심 역량에 집중하면서 사업을 재편한 덕에 나온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반면에 한국은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이 연달아 시행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서민 생활이 개선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층 중에는 없을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법정 근로시간을 줄이며, 더욱 정치 세력화하는 노조의 영향력 속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자유는 점점 움츠러들고 있다. 기업이란 원래 자유로운 경영과 기업인의 자율 속에서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실체인데, 한국의 기업들은 촘촘한 규제 속에서 점점 자율을 속박 당하고 있다. 그 결과 청년실업은 심화하고 있고 ‘헬조선’이라는 청년들의 울분도 계속되고 있다. 절대적인 지표만 본다면 ‘헬조선’이란 단어는 말이 안 된다. 세계 10여 위 권에 드는 교역국, GDP 3만 불 가까운 나라에 살면서 이런 단어를 쓴다는 것이, 수십 년 전 세계 최빈국을 거쳐 오늘의 번영을 일군 세대가 보기에는 요즘 젊은이들의 철없는 투정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이 단어로써 표현하는 것은 자신들이 느끼는 좌절감이다. 청년실업이라는 고용 없는 성장은 실상 노조에 의해 제기된 임금 왜곡과 고용의 경직성, 그리고 정부의 기업 친화적이지 않은 규제 남발의 환경 속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신규 채용을 억제한 결과로 야기된 것이다. 이런 형편에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는 투자에 과감하게 나서리라는 기대는 그야말로 언감생심일 것이다.

오랫동안 자기 직업을 찾지 못한 젊은이들에 있어서 사회란 비정한 존재일 뿐이고, 자신은 사회 속에서 아무 의미 없이 떠도는 존재일 뿐이다. 이들에게 최대의 자유는 직업을 주는 것이다. 이들에게 정부가 인심 쓰듯이 주는 청년수당 같은 돈은 그들의 자긍심을 떨어뜨릴 뿐이다. 대학 공부까지 마친 젊은이들이 할 만한 양질의 일자리를 지속해서 창출할 수 있는 경제주체는 오직 기업체뿐이고, 기업체의 부 창출이 뒷받침되지 않는 공공 일자리 같은 것은 사회 전체로 볼 때는 결코 지속될 수 없는 허상이다. 그런 점에서 한 세대 전에는 따분한 것으로 여겨서 젊은이들은 지원조차 안 했던 말단 공무원 일자리에 오늘날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보이는 것도 한국의 경제적 자유가 악화된 결과 생긴 병증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기업이 떨쳐 일어나서 새로운 투자를 하고 성장해야 할 세계적인 활황 국면에, 한국 기업들은 신규 투자를 망설이고, 규제 많은 대기업으로 성장하기보다는 보호받는 중소기업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한 청년들의 좌절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이는 정부가 지자체가 나서서 창업 경진대회나 열고, 청년의 도전을 부추기는 표어를 여기저기 붙인다고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또 다른 차원에서 경제는 안보의 주제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전문성도 갖추었고, 열심히 살아온 젊은이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못 찾는 사회는 ‘기능하는 사회’가 아니고 오작동하는 사회다. 한국이 걸어온 길을 보면 청년들의 일자리를 해결할 기업체가 빠른 세월 안에 자유를 되찾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급격한 경기 후퇴로 실업의 문제가 청년층뿐 아니라 전체 구성원으로 퍼질 가능성마저 커 보인다. 이런 사태가 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성적 판단으로는 기업활동의 자유를 대폭 보장하여 경제를 성장시키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경험을 보면 그 반대로 갈 가능성이 더 크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20%를 웃도는 실업에 좌절한 유럽의 대중은 자발적으로 히틀러라는 전체주의자를 선택했다. 허황된 선동이었지만 평등을 보장한다는 선전에 유럽의 대중은 급속히 자유를 포기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경제를 안보와 직결시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의 자유를 심하게 훼손하여 경제를 망가뜨리면 절망한 대중을 양산하게 되고, 그 결과 대중은 전체주의자의 선동에 넘어갈 수 있다. 안보가 꼭 외부 적의 공격에 의해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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