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없었다면 우파는 여전히 주류였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위기도 없었다?
탄핵 이전부터 비주류로 전락한 사실 아직도 못 받아들여
1987년 체제는 시작부터 좌파가 주도권 쥐게 된 현대사 일대의 분수령
1990년 3당합당은 우파가 좌파 넘어서기 위해 범좌파 진영인 YS계 끌어들인 사건
박원순에 거액 후원한 박태준과 이명박, 그리고 좌파 포퓰리즘 공약 뒤따랐던 우파 정치
행정부 권력 장악한 우파는 거대한 좌파 세력에게 포위됐던 것...朴탄핵이 피날레
이념적 주도권 좌파에게 내주고도 정확한 문제 파악과 대안 위한 노력 거의 없었어
우파는 완전한 사망선고 받았다...바로 그 현실이 김종인의 통합당 당권 장악
좌파의 정치는 시민단체 정치, 우파의 정치는?...제대로 된 정당정치로 승부 봐야
정당정치의 대전제는 바로 제대로 된 당원들을 발견하는 것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우파 시민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들에게 어떤 공통된 편향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것은 현재 우파 진영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인지부조화 같은 것이다. 유행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우파 시민들 상당수가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심리상태 같다. 특히 이런 편향이 두드러지는 지점이 탄핵에 대한 인식이다.

요즘은 부정선거 논란으로 관심이 옮겨간 느낌이지만, 우파 시민 상당수가 여전히 탄핵의 수용을 놓고 혼란을 느끼고 있다. ‘탄핵이 없었다면 우파는 여전히 주류였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위기도 없었을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우파 시민들 전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완전히 비주류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심리상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착각이다. 탄핵 때문에 우파가 비주류로 전락하고,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다. 우파들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다. 오히려 우파가 비주류로 몰락하고 대한민국의 이념적 근거가 무너졌기 때문에 그 결과 필연적으로 탄핵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시야를 조금 넓혀보면 문제가 분명해진다. 탄핵은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두 우파 대통령이 연속 집권한 결과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대통령제 국가이고,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언론과 지식인들의 단골 화두이다. 이렇게 막강한 대통령직을 우파가 9년 동안이나 장악했는데도 그 결과는 탄핵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상당수 우파들이 탄핵의 원인을 좌파들의 음모에서 찾곤 하는데, 이건 답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좌파들이 탄핵 과정에서 음모를 꾸몄고, 그게 성공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우파 대통령이 좌파들의 음모를 알아차리지도, 저지하지도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의 기원은 일단 19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현재 우파 진영과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의 본질이 1987년 체제, 즉 6공화국의 헌정 질서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987년은 직선제개헌을 내세운 좌파 진영, 특히 NL주사파 그룹이 최초로 정치적인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해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 논의 중단과 함께 기존 체육관 선거에 의한 후임 대통령 선임, 개헌 논의의 88올림픽 이후 연기 등을 발표했다. 이른바 4.13호헌 조치였다.

하지만 이 조치는 기대했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반발 시위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4.13호헌 조치 발표 이후 약 두 달 동안 대한민국 주요 도시는 NL운동권이 주도하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서울에서 주로 대학생 중심으로 전개됐던 시위가 전국 도시로 확산됐다. 특히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과 함께 서울 중심부의 ‘넥타이 부대’가 시위에 참가한 것은 사태 전개의 분수령이었다. 이른바 6월항쟁이었다.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였던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이 하루만에 특별담화를 통해 이를 수용하면서 5공화국 체제는 종언을 고하고 6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16일 대선이 치러져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사태 전개는 직선제 개헌을 내세운 좌파의 정치적 승리였다. 그 좌파 승리의 배경에는 1980년 5.18이 놓여 있다. 하지만 우파는 1987년 연말 대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6.29선언을 중심으로 한 정치공학의 결과물이었다. 좌파의 정치적 승리를 우파가 정치공학적으로 저지해낸 것이 1987년 체제의 정치적 본질이다.

이런 정치적 본질은 좌·우파의 동거 및 타협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될 수 있으면 좌우가 사이좋게 권력을 분점하자는 것이 1987년 체제의 핵심 도그마이다. 그 단적인 표현이 대통령 5년 단임제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대통령 할 만한 사람은 누구나 한 번씩은 하도록 하자’는 합의사항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좌·우파의 동거 및 타협이라는 현상에도 불구하고 1987년 체제가 좌파의 정치적 승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우파는 정치공학적 기획으로 행정부 권력과 경제, 군부 등 실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명분, 즉 상징성이 강한 인권, 복지, 노동, 환경, 여성 등 분야의 담론 주도권은 좌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좌파들은 과거 수십 년 동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을 전매특허처럼 사용해왔다. 대한민국의 언론이나 권력 지형 등이 철저하게 기득권 우파 위주여서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한다는 불만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정치적 승리자로서 담론 영역의 주도권을 장악한 좌파 진영이 문화와 언론 등 상징자산을 다투는 영역의 우위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권력을 야금야금 잠식해온 것이 1987년 체제의 진행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최종 귀결이 2017년의 탄핵과 문재인의 집권이었다. 즉 1987년 체제는 처음부터 좌파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정치적 정당성 영역에서 좌파가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90년 벽두부터 대한민국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던 3당합당이다. 보수대연합이라고 표현되는 이 사건으로 김대중과 호남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한 좌파 진영은 소수로 전락했고, 보수는 압도적인 우세로 김영삼을 대선에서 당선시켜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이 사건은 보수의 정치적 승리로 보인다. 압도적인 국회 의석을 확보했고, 정권도 안정적으로 재창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정반대였다.

우선 노태우 정권이 3당합당을 추진하게 된 배경 자체가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의 결과였다. 민주정의당이 125석으로 제1당이 됐지만, 과반에는 한참 못미치는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졌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59석)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70석) 등 좌파 진영의 의석은 합계 129석으로 민주정의당을 앞섰다. 같은 보수 진영인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이었지만, 이들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는 확실한 당근을 제시해야 했다.

3당합당 자체는 바로 좌파의 정치적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우파 진영이 고심 끝에 마련한 위기탈출 전략이었다. 우파는 그 대가로 범좌파 진영인 김영삼계에 적지 않은 지분을 양보해야 했고 그 결과 김영삼이 집권할 수 있었다. 김영삼계를 통해 보수 진영에 좌파 성향의 인물들이 상당수 유입됐고, 이들은 이후 보수진영의 주류를 차지했다. 김영삼의 집권이 김대중의 집권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좌파의 정치적 주도권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현상이 우파 정치인들의 정치철학이다. 좌파 포퓰리즘의 상징과도 같은 박원순에게 이명박이 서울시장 시절부터 거액을 후원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박태준 전 포철회장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아 40여년 거주했던 자택을 팔아 그 돈을 박원순에게 기증했다.

이런 일들은 지금 보면 코메디 같지만, 과거에는 아름다운 미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걸 단순히 우파 지도자들이 좌파의 공갈협박에 굴복한 결과라고만 이해할 수는 없다. 우파 정치인들은 실제로 박원순이 훌륭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믿었고, 그런 가치에 자신들도 동의하고 동참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좌파의 이념적 정당성 장악이 낳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지난 대선의 이슈였던 최저임금 문제만 보더라도 좌파의 시급 1만원 공약을 홍준표와 유승민, 안철수 등 범보수 후보들이 모두 뒤따라갔다. 현실화 시기만 1~2년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좌파가 담론 주도권을 쥐고 숙제(?)를 내면, 우파 정치인들이 열심히 답안지를 제출하는 모양새가 1987년 체제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좌파의 이념적 주도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역이 언론과 문화계이다. 언론계에서 특정 지역 고교 출신들이 마피아를 형성해 밀어주고 당겨준다는 소문이 무성하거니와, 문화계 역시 좌파들이 거대한 기득권을 형성해 이제는 우파들이 거의 축출당한 상태이다. 1987년 체제 이전에는 아무 관심도 끌지 못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갑자기 전국민의 감성을 자극하게 된 것도 1987년 체제에서 좌파의 상징자산 장악을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담론과 상징자산 지형에서 우파는 물에 뜬 기름처럼 점차 소수화됐다. 이념적 주도권을 좌파에게 내줬지만 그 사실 자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도 못했고 따라서 대안을 만들려는 노력도 거의 없었다.

우파는 행정부 권력을 장악했지만 사실상 거대한 좌파 세력에게 포위된 형세였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광우병 사기 난동에 사실상 무릎을 꿇고 정국 주도권을 내준 것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소동에 무기력하게 당했던 것도 좌파 진영의 거대한 이념적 주도권, 상징자산의 영향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즉 현재 우파 진영의 몰락이나 대한민국의 위기는 탄핵 등 한 두 가지 사안에 대한 대응 실패의 결과가 아니다. 1987년 체제의 좌파 이념 주도권이 필연적으로 귀결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탄핵은 박근혜 대통령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우파 진영 전체에 대한 탄핵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1987년 체제는 헌정상으로 아직 유효하지만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사실상 종결됐다. 2016년 총선과 문재인의 집권,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의 결과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좌우 정치세력의 동거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핵심으로 하는 1987년 체제는 이제 정치적으로 유효하지 않다. 좌파가 대한민국 권력의 99.99%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좌파는 이제 우파와 권력을 나눌 필요가 없다. 국회 상임위원장의 민주당 독식과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국정 운영이 그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좌파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의 교체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무효화하는, 즉 대한민국의 체제 자체를 바꾸는 작업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개헌 논의가 그 물꼬를 트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기존 우파 정치세력은 완전한 사망선고를 받았다. 좌파적 경제이념의 푯대인 경제민주화를 주창한 김종인이 보수세력의 본진인 미래통합당의 당권을 장악한 사실이 그 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김종인은 미래통합당에서 보수 이념의 색깔을 빼는 작업을 노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 우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영으로서 우파가 몰락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우파 진영이 오랜 세월 기득권을 누리면서, 적폐 세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행태를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파 진영이 거듭나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몰락을 피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파는 건국과 산업화의 주역이었지만, 딱 하나 하지 않은 게 있다. 그게 바로 정치이다. 반면, 좌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정치만 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이제 우파는 새롭게 정치를 시작해야 하고, 그 정치는 좌파보다 뛰어난 정치여야 한다.

좌파의 정치는 시민단체 정치이다. 1987년 정치적 승리의 주역들이 대거 시민운동에 진출한 결과이다. 이 시민단체 정치는 장점도 많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우파가 좌파보다 뛰어난 정치를 하려면 시민단체 정치로 좌파를 흉내낼 게 아니라, 근대적 정치 진화의 산물인 정당정치를 제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정당정치의 대전제는 바로 제대로 된 당원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파 정치와 대한민국 부활의 관건이 걸려 있다고 본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고에 이어서 할 것을 약속드린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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