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민 숭의여고 교사

역사관념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현재의 정치와 사회, 경제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을 형성하며, 한 사회가 미래에 나아갈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국가 외교와 재정, 의료 정책 등에서 나타나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관념의 폭주를 멈추지 못하는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은 한국인의 역사 관념을 들여다볼 때 당연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한국사회에 대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사 이해에 있어 정치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 있다. 설령 그러한 인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에 대한 관념조차 비현실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결과 나타나는 모습은 역사를 자신의 편협한 주관으로 성급히 재판하려 들게 되며 진영논리에 자신도 모르게 매몰된다. 가령 ‘민족의 정기’, ‘역사의 진보’, ‘민중의 개혁 요구’ 등의 용어(사실상 정치적 구호라고 봐야할 단어들)를 쉽게 내뱉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편협하고 피상적으로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한 개인의 역사 관념은 청소년기에서 형성되기 시작해 청년기, 중장년기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변화, 성숙해 나간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역사 관념 자체가 청소년기에, 혹은 청년기(특히 대학 시절)에 고착되어 더 이상 발전이나 성숙을 거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가령 청소년기는 역사 관념이 싹트고 성장해 나가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하지만,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 보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역사관념을 논할 만한 생각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역사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은 누가, 무엇을 언제 했는지를 암기하는 것보다, 왜 그 사실이 역사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중요한지, 그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사실 요소들이 그와 영향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부분을 학생들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학생들은 이미 내용이 요약되어 있는 참고서에 줄 치고 외울 생각부터 하며 서둘러 문제집을 풀어 댈 생각만 한다는 점이다. 입시 위주의 제도 문제이기 이전에 교육철학에 있어 정도(正道)를 어겨온 기존 공교육의 책임이 큰 부분이다.

그러면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어른들은 이들과 얼마나 다를까? 대부분이 학창 시절 역사를 암기 과목으로 인식했을 뿐이었기에 그들의 역사 관념이 비판적이고 열린 사고를 지향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딱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 전문서적을 찾아 읽어보지 않는 한 (사실 읽어본다 하더라도) 대개 역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역사에 관한 대중 서적, TV 드라마나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끄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그러한 저작물에 담겨 있는 자못 진지해 보이는 문제 의식 역시도 ‘주관적인 해석의 공유’라는 측면을 강하게 담고 있기에, 주장이 강할수록 오히려 포퓰리즘적 대중 선동의 성격을 가지기 쉽다. 대중매체의 소비자로서의 대중은 객관적으로 현상을 분석할 시간과 에너지가 여유롭지 않은 탓에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감정 위주로 바라보기 마련인데, 그러한 대중 역사물에 담긴 주관적 메시지들이 너무 강렬하게 표출될 경우 역사에 대한 편파적인 이해에 일조하게 된다.

분명한 사실은 (그런 대중적 역사 컨텐츠를 통해) 자신의 역사적 시각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시각 (one view)이지 옳은 시각 (right view)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역사에 대한 그 어떤 서술과 해석도 정치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가령 조선시대의 모든 역사 서술은, 그것이 왕조실록과 같은 관찬사서든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과 같은 개인 저작이든 왕과 신하의 수직적 상하관계를 본질로 하는 ‘군신의 도 (君臣之道)’ 혹은 문벌 사대부 중심의 사회 질서라는 유교 정치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는 당대 역사 서술의 한계이자 당대인들의 역사 관념의 한계이다. 이렇듯 정치적 시각으로 버무려지는 역사 서술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역사가들의 시도는 근대에 와서 실증 사학의 성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름 인문학에 사회과학적 요소를 차용하고자 하는 시도였지만 결국 실증사학 역시도 정치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실 사료의 철저한 고증 자체가 실증적 역사 연구의 본질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역사 이해에 있어 실증적 태도란 과거의 선택과 결정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을 내려 놓고) 그것이 유효적절하였는지를 고찰해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보다 나은 의사결정에 참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령 조선 사회는 고려에 비해 농경 사회적 성격이 보다 강화되고 이와 함께 집단적이고 협력적 사회 유지에 보다 효과적인 (남송 시대에 만들어진 성리학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조선의 선택에 사회적 비용(social cost)이 바로, 군신 사이뿐 아니라 인간 사이, 국가 사이의 모든 관계를 수직적 질서로 이해하는 유학적 프레임의 정신적 노예 상태로 잠들어 지낸 기나긴 시간이라 볼 수 있다. 선택에는 비용이 따르는 법이다.

이와 같은 실증적인 역사적 고찰에 ‘애국’이나 ‘민족’, ‘민중’ 등의 정치사회적 관념을 앞세운 역사 감정이 개입할 공간은 별로 없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역사 이해의 주된 의미는 과거에 그러한 특정한 선택과 결정이 이루어진 배경 요인들을 분석해서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라는 구성체는 어떠한 조건에서 특정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되는지’, 즉 인간 사회의 특정 경향성(tendency)을 좀더 입체적으로 잘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식의 기저에 존재하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는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근본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다. 그저 재미 삼아 역사책을 읽는 거라면 별 상관없겠지만,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어떤 역사 서술을 대하든 차라리 아니 읽는 만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정치적 시각의 노예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슨 역사책 한 권 읽고 자신이 개명 진보한 시민(소위 깨시민)이 된 듯 완장 차고 과거 역사의 시시비비를 논하려는 모습은 그 결과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역사 관념이라는 측면에서 북한 사회와 별 차이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가령 북한의 역사 교과서 서술은 여전히 가진자와 못가진자 간의 갈등(억압과 저항)을 중요하게 다루고, 억압에 맞서 저항을 성공시키는 ‘진보’의 역사관에 빠져 있다. 당연히 (이 역사적 진보의 장애물인) 자본가들의 사회인 미국과 일본 등을 제국주의 야욕에 휩싸인 악당으로 묘사한다. 낭만주의와 집단주의의 광풍 속에 있던 19세기 사회주의의 철학적 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물론 역사교사로서 나는 이 역시 그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 않다. 그러한 역사 관념에 대한 사회적 비용으로 북한 주민들은 노동자와 농민이 자본가를 몰아내는 데 지지하여 세워진 그들 만의 인민 ‘민주주의’ 정권 치하에서 현재까지 정신적 노예 상태로 긴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북한 사회는 옳지 못한 사회라기 보다 (‘소유’와 ‘자본’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한 사회로서 후대에 큰 교훈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많이 달라 보이는가? 가령 북한처럼 남한도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 속의 왕과 지배 계층은 민본주의(民本主義)와 같은 명분을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했었는데,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이러한 민본주의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려 한다. 동아시아 사회의 관념 속에 주(主)는 종(從)이나 객(客)과 대칭되는 개념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비로소 주인이 되었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라고 착각하며 민주주의 자체가 거룩하고 존엄한 민의를 실현하는 장치라는, 매우 숭고한 착각을 한다. 하지만 (삼권분립을 통한 법치와 개인의 사적 자치권을 보장하는 헌법 조항 등의) 자유주의의 철학 원리가 거세된 민주주의는 잘해야 선거(투표)를 통한 다수결이 그 본질일 수밖에 없다. 그에 더해 정치사의 본질은 결국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이라는 기본 인식을 결여한 한국인들을 많이 보게된다.

뭔가 도덕 군자가 선의를 가지고 백성을 자식처럼 돌봐주어야 한다는 유교적 망상에 더해, 민중은 부유한 지배계층에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회주의적 피해 망상이 결합한, 유치하고 편파적인 역사 관념이 한국인의 생각을 유령처럼 계속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권력을 지향하는 동물일 수 있음을, 즉 사회과학적 탐구 의식을, 거부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선한 영웅과 탐욕스런 악당을 열심히 그려온 것이다. 사실 북한이나 남한이나 이런 유아적 역사 관념이 팽배해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 언제 즘 한국 사회에 보다 현실적이고 성숙한 역사인식이 자리 잡을수 있을까? 요원해 보이는 요즘이다.

배민 (서울 숭의여고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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