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본질은 책임

우리는 자유 체제에 살고 있지만 막상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고, 대개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다. 특히 근대국가가 된 이후 ‘산업사회에서의 자유’에 대해 이것이 예전 르네상스 시대나 중상주의 시대의 자유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개 생각조차 안 하고 있다.

자유의 본질에 관한 질문은 현 정부 초기에 ‘자유’라는 단어를 빼 버린 헌법으로 개정하려 했던 시도를 상기한다면, 이는 아주 중요한 주제임을 알 수 있다. 헌법에서 ‘자유’를 뺌으로써 국가 체제에 어떤 변화를 주려는 것이었을지는, 오늘날 대기업 재벌에 가해지는 다수를 통한 압력이나 토지 공개념에 관한 주장에서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한국이 근대 산업사회에 들어선지 두 세대, 즉 60년쯤 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사이에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비롯하여 성공적인 자유 경제체제를 영위한 결과 현재 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수준의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자유를 토대로 하는 체제가 유지될지에 따라, 이 수준이 두 배로 향할지 반 토막으로 향할지 결정될 것이다.

자유를 논할 때 우리는 한국의 현재라는 이런 선진 산업사회에서의 자유를 논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선 본래 자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근대 산업사회에서의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피터 드러커는 ‘산업인의 미래(1942)’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드러커에 의하면 자유는 재미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 있는 선택이다. 자유의 출발점은 구약성서의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는데,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후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것이 자유의 출발점이다.

자신의 선택이 없는 노예의 안전에 비해,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겁나는 상태’, ‘짐을 지는 것’, ‘벌 받을 수도 있는 상태’다. 내가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을까 후회하면서 자신에게 닥치는 온갖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을 해야 할 때, 인간은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결정할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 본질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의 본뜻을 알려면 창조주 앞에서 완벽하지 못한 미약한 존재로서의 개인, 그러나 끝없이 완벽을 위해 노력하는 개인에 대한 존중과 같은, 비록 기독교 신앙까지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자연법 같은 서구적 가치관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인 가운데 특별히 영국과 미국은 이런 전통 위에 국가가 세워졌고, 그 핵심을 구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고가 사회 제도나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을 엿볼 수 있는 예를 내가 존경하는 한 선배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한국 산업화의 초창기에 체신부 근무를 거쳐 통신 사업을 개척하는 기업체로 옮겼었는데(주: 당시는 정부와 기업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전략적 사업을 개척하던 시절이었다.), 전자교환기 기술과 관련하여 어떤 클레임 사건이 생겨 미국 법정에서 증언해야 했던 이야기다. 그 선배는 미국 법정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증언할 것을 선서하라”라는 말을 듣고는, 약간 기 싸움을 하고 싶었던지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서 성서에 대고 선서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나.”라고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그러자 법정의 판사와 담당관들이 당황하면서 한참 자기들끼리 의논하더니 “그러면 너의 신에게 맹세해라.”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분이 “나는 죄송하지만 종교가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또 한참 의논 후에 “그러면 너희 나라에 유교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유교의 신에 대해 맹세해라.”라는 요구가 내려졌다. 그 선배는 일이 커지는구나 싶었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어서 “유교는 종교가 아니고 일종의 생활 규범이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 법정은 또 한참을 의논한 후에 결국 나온 결론은 “그러면 당신의 양심을 걸고 선서하라.”라는 것이었다.

이 사례는 법정에서의 증언이라는, 자유 체제의 일부인 사법 질서가 형식적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 차원까지 연결된 선악에 대한 윤리 개념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자유는 인간 개인은 불완전하다는 자각, 그러므로 결정에는 기준을 최고의 윤리에 두려는 노력이 요구되며,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이 따른다는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책임’이라는 말은 단지 어떤 법적인 책임을 진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연법적인 도리, 자신의 양심을 걸고 책임을 진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절대적 선이나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태도에서 나올 것인데, 이는 예컨대 다수의 뒤에 숨어 자연법적인 양심과 법치를 파괴하는 결정이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 그리고 이를 강압적으로, 또는 집단 심리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전체주의만이 있을 뿐이다.

자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약함에서 생기는 힘이며, 심오한 신앙에 근거한 회의론이다. 인간으로서 너도나도 틀릴 수 있으며, 어떤 사안에 대해 부분적으로 틀릴 것은 거의 확실하다. 어떤 인간이 자신을 절대자인 것처럼 가장하며 명령하고, 그 명령에 모든 집단이 복종하는 체제에 비해, 자유 체제는 다양성과 창조가 분출하여 사회가 발전한다. 반면에 인간의 이성을 완벽한 것으로 생각하는 전체주의 체제는 지도자라는 개인을 신처럼 완전한 존재로 생각하므로, 그런 체제에서는 다르게 선택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반역이며 당연히 진압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창조나 산업적 경쟁력이 나올 리 없다.

산업사회에서 자유의 핵심 영역

개인의 자유는 자유로운 사회가 있어야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드러커의 ‘사회적으로 핵심적 구성 영역(이하 핵심 영역)’이라는 개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핵심 영역에 자유가 없다면 그런 사회는 자유 체제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사회 속에는 개인의 선택이 책임과 별 관계없는 ‘면허된 영역’이 있다. 개인이 아이스크림 중 바닐라를 선택하든 초코렛을 좋아하든, 이는 그 선택에 아무런 윤리적 책임이 없으므로 자유와 상관없는 영역이다.

현대 산업사회를 사는 우리의 핵심영역은 어디인가? 이 영역은 단연코 대기업(재벌)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역은 정치의 영역에 대비되는 속세의 영역으로서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대기업 법인, 그리고 그 복잡한 자원들을 결합하며 세계에서 경쟁하는 의사결정의 주체인 경영자(한국의 재벌 총수)의 영역이다. 이 영역이 정치의 영역과 나란히 병렬적인 핵심 영역으로 존중되어야 하는 것, 서로를 각기 다른 차원의 전문적인 영역임을 인정하고, 서로 다른 제도 속에 조직화해야 한다는 것은 18세기 말 에드먼드 버크 같은 ‘자유 보수주의’ 사상가들의 위대한 통찰이었다.

이 영역에서의 선택이 산업사회 원리에 맞게 자율적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사회 전체가 자유로운 사회인지 아닌지가 대부분 결정될 것이다. 예를 들어, 30여 년 전, 대기업이 자율적으로 활발하게 성장하던 시절에는 대학을 나온 청년들은 두어 군데 취업 합격을 하고는 자신의 장래에 어느 기업이 더 좋을지 저울질하며 입사했다. 요즘은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하고, 수십 대 일의 고시에 매달리고 있다. 어떤 쪽 시대의 청년이 더 자유로운 체제에서 사는 개인인가? 사회의 구성원에게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는 ‘기능하는 사회(functioning society)’가 아니므로 자유 사회의 필요조건에 미달한다. 대기업 군단이 자율적으로 항해하는 모습 속에는 수십 년 전에 창업한 기업가의 진취적인 기업가정신이 녹아 있다. 슘페터가 말했듯이, 바로 이 기업가정신이야말로 현대 산업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원동력인데, 오늘날 온갖 규제와 압박 속에 몸을 도사려야 하는 기업가에게 기업가정신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기업 재벌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자유 체제로 살아 숨 쉬게 하는 산업 체제를 옥죄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대기업을 옥죄는 것은 자유 체제의 핵심인 재산권의 문제, 계약의 자유, 투자의 근원인 기업가정신 모두를 옥죄는 것이다. 대기업 군단이 계속 더 많은 수로 생겨나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중견기업,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고 생태계를 이루는 모습이야말로 현대 산업사회가 기능하는 모습이고, 이 토대 위에 사회가 자유 체제로 작동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대기업, 재벌을 옥죄는 일을 당연시하면서, 그 당위성으로 중소기업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편 가르기식 이유를 댄다. 이런 논리가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에게서 나오면 그나마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이른바 자유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마저도 대기업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들에게 대기업 재벌의 문제는 어느 특정 재벌 개인을 더 큰 부자로 만드는 문제 정도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근대 산업사회가 자유 체제로 유지되려면 그 핵심 영역인 대기업 법인을 정치의 영향에서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것, 중소기업의 보호가 문제가 아니라 대기업에 자율을 보장하는 것이 자유 체제가 유지되는 선결 조건이라는 것, 즉 산업 사회는 자유 체제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의 문제이다. 대기업 재벌을 지원하지는 못할망정 온갖 규제나 정치적 압력으로 옥죄지 않는 것이 한국 사회를 자유 체제로 유지하는 최우선 과제다.

그러나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느껴지는 감정은, 이 모든 것이 한국의 교육이 바로 서지 못하는 한 다 부질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 것이라는 실망감이다. 역시 근본적인 해법은 자라나는 세대를 근대 시민, 책임 있는 자유인으로 키우는 것에 있다. 우리의 청소년들은 반드시 기업가는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청년들로 키워져야 한다.

문근찬 자유경영원 대표, 전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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