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투표 당일개표’ 원칙 무너지면서 선거제도 불신 싹텄다
오염 가능성 높은 사전투표율 높아질수록 선거 신뢰성 하락
민주주의 게임의 룰을 위해 선거제도 이대로 놔둬서는 안돼

이호선 객원 칼럼니스트

전 세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질서를 털고 신대륙으로 나간 시민들이 자치적으로 세웠던 민주공화정의 모범 국가 미국이 선거와 관련하여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반목과 갈등, 분열 속에 있다.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이 넘도록 대통령 당선자가 결정되지 못하고 대규모 법정 소송에 따라 판가름이 날 수도 있는 이 상황의 본질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 제도의 오염 여부에 대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전 투표의 오염인데, 한 쪽에서는 이미 오염되었다고 보고 그 오염된 표를 제외한 표를 ‘합법적 투표’로 보아 그것만 계수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모든 표’를 계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오염된 표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정확하게 진실이 가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법원의 결정은 분쟁의 종결이 아니라, 분쟁의 시작일 수 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요, 위기이고,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4.15 총선 선거부정 의혹을 둘러싼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당일투표 당일개표’라는 투・개표의 현장성의 원칙이 무너지면서 일찌감치 예고된 것이었다.

투표와 개표 사이에 시・공간의 간극이 개입되고, 더구나 이것이 통제와 검증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점에서 사전투표, 특히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공히 더욱 문제되는 우편을 통해 배달되는 투표는 그 배회 과정에서 오염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 오염 가능성이 실제로 오염으로 이어졌는지 여부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지만, 현장에서 투표가 이뤄지고, 그 현장에서 개표가 이뤄지는 것에 비하여 ‘사전 배회표’들은 그만큼 오염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우리의 논의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2009년 3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민주 사회에서 제대로 된 투・개표란 어떤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위 재판소는 전자투표기기를 사용하여 실시한 연방하원의원선거가 기본법에 합치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사건에서 전자투표기기가 오・작동 되었다거나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하면서도, 연방전자투표기기에 관한 명령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시하였다.

선거의 공공성 원칙이라는 헌법적 요구조건을 충족하는 전자투표기기만이 이용된다는 점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기에서의 선거의 공공성 원칙이란 헌법적으로 달리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 한 선거의 전 과정은 공공의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전자투표기기의 사용이 정당화되려면 투・개표에 이르는 전산처리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하여 특별한 어떤 전문적 지식이 없는 시민이라도 그 신뢰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유권자들이 선거의 본질적 절차에 대한 검증에 복종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보통의 유권자들이 자신의 투표가 조작됨이 없이 투표절차에서 그대로 산정되는지 여부를 유권자 자신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투표기기에 대하여 공적 기관이 기술적 규격을 설정하고 이를 인가하였다거나 견본 시험에 합격하였다거나 하는 사실만으로 투개표의 각 단계별 검증 결여의 가능성을 대체할 수 없다는 입장도 분명히 하였다.

독일 헌재의 결정에서 또 하나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원래 독일 하원에서 일차적으로 다루어졌다가 기각된 사건을 다시 헌법재판소가 수리하여 심리하면서 당사자들이 주장하였던 기술적 불완전성을 넘어 일반 대중적 수준에서의 접근성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적극 설정하여 민주성의 원리와 헌법 합치 여부를 따졌다는 것이다. 선거의 오염 가능성에 대하여는 당사자들의 주장에 구애받지 않고 적극적 사법실천의 면모를 보인 법관의 양심에 존경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헌재의 결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원칙은 극히 간명하다. 유권자들의 표는 투명하게, 쉽게 검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선거부정을 말하지 않았다. 선거 과정에 오염이 있었다는 증거도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오염 가능성만으로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기엔 충분하다고 하였다.

보험은 왜 드는가. 일어날 확률이 낮아도 그 확률이 아주 없지 않은 까닭에 우리는 위험을 대비한다. 10년 무사고가 아니라 20년, 30년 무사고 운전자라도 책임보험을 강제하는 것은 세상에는 누구나 장담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막상 이 위험이 현실화되었을 때 그 피해의 회복은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렵고 결국 공동체의 피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통제되지 않은 시・공간에서 배회하는 표들이 있다면 누가 봐도 오염의 개연성은 있다. 거기에 이런 표들에 대한 사후 검증도 불가능하다면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당장 우리의 경우 ‘묻지마 식’의 사전투표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정하여 과거의 부재자 투표 형태로 최소화에 그치게 하고, 통합선거인 명부 등을 공개하는 등으로 사후 투명한 검증 절차에 노출되게 하여야 한다.

지금의 패자나, 미래의 패자 모두 선거 과정의 오염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은 상존할 수밖에 없다. 오염의 가능성이 있고, 상대방은 ‘능히 그것을 활용하고도 남을 자들’이라는 불신이 거기에 가세하면 남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분열과 대립이다.

누가 이기고 지고를 떠나 지금의 선거제도를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 게임의 룰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당일투표 당일개표’가 원칙이라는 기본부터 확인하자. 그 예외를 방치하며 즐기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대한민국에 하루라도 있어서는 안 될 민주주의의 파괴자요, 공공의 적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보여준 선거의 공공성 원칙은 정상적 민주국가의 정파라면 진영을 떠나 다 같이 따라야 할 지침이다. 국회가 미적거리면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독일 헌재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것도 시민들이었다.

이호선 객원 칼럼니스트(국민대 법학과 교수)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