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정권, 무너진 국방, 폭증하는 세금, 고통받는 백성…. 만가지 악의 근원, 이것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도자, 매국노 고종의 진면목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죽었는데, 그 상을 치를 돈조차 없는 나라. 철종이 죽고 새 왕이 등극한 사실을 청나라 황실에 알려야 하는데, 그 사신을 보낼 경비조차 없어 쩔쩔 매는 나라. 부국(富國) 대신 자기 금고를 채우기 바쁘고, 강병 대신 그에 써야 할 국가 자원을 국왕 개인의 호기심과 탐욕을 채우는 데 소모한 나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살벌한 제국주의 시대에 이런 왕조, 이런 국가가 존재했다면 모진 세상의 풍파에 생존이 가능했을까?

지금까지 국뽕 역사학자들의 선동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고종은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스러진 선하고 가련한 황제이자 자주독립을 기원한 개혁군주, 비운의 망국 군주 이미지다. 그의 아내 명성황후는 “나는 조선의 국모(國母)다”를 외치며 일제에 저항하다 처참한 최후를 맞은 위대한 근대형의 여성정치가요, 가련한 왕비로 추앙받는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았다고? 

불행하게도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면 그와는 정 반대의 고종 모습이 나타난다. 그 충격적 결과물을 담은 무시무시한 책이 드디어 세상에 등장했다. 『매국노 고종』이란 책 제목부터다 도전적이고 파격적이다. 저자는 조선일보 기자로서 조선일보에 「땅의 역사」를 연재 중인 박종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고종이 매국노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조작된 신화가 신앙으로 변하고, 종교로 변해 사실로 굳어지기 전에 조작을 폭로하기 위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가 나라를 팔아먹은 고종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파헤친 화제의 역작 "매국노 고종" 표지.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가 나라를 팔아먹은 고종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파헤친 화제의 역작 "매국노 고종" 표지.

 

그가 밝혀낸 고종의 모습은 전율에 가깝다. 구한말에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고, 근대화에 뒤쳐진 것도 고종 때문이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혀를 찰 정도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것도 고종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저자 박종인이 말하는 고종은 ‘만악의 근원’이요,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자다. 진짜 ‘매국노’는 이완용이 아니라 고종이라는 것이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일 풍경을 담 너머로 자세히 지켜본 사람이 주한 미국공사관 부영사 윌라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의 명령권자가 고종이며, 자신이 명령한 사실을 속이고 또 속이고 있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관을 쓴 자들 가운데 최악으로 비겁하고 최하급인 황제(고종)는 국전 속에 움츠리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황제는 외부대신에게 조약에 서명하라고 지시하고서는 자기가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또 지시했다. 그래서 외부대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

일본 지시에 따라 을사조약 반대한 한규설 파면한 고종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참정대신 한규설이었다. 조약 체결 후 고종이 내린 첫 조치는 한규설이 “황제의 지척에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면서 파면한 조치였다. 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이 인사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충고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황제 고종이 고분고분하게 일제의 명령을 따라 조약 체결에 반대한 사람을 파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조약 체결 6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기밀비 10만 원을 내탕금(황실 자금)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10만 엔 중 2만 엔이 황제 수중에 납입되었다. 당시 2만 엔이면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25억 원이다.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조선 전역을 군사부지로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협정이었다. 3월 20일, 일본국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했다. 이날 이토 대사는 고종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제공했고,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 보장 및 향후 경의선 지분 보장을 확약을 했다. 경부선은 건설 당시 일본 로비스트인 다케우치 츠나(竹內網)가 경부철도회사 주식 1,000주와 5만 원을 황실에 헌납하고 진행한 공사였다. 그 지분을 보장한 것이다. 이래도 나라를 팔아먹은 원흉이 이완용과 을사오적이라고 우기겠는가?

이것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후 일본이 주는 세비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노후생활을 즐겼던 고종의 얼굴이다.
이것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후 일본이 주는 세비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노후생활을 즐겼던 고종의 얼굴이다.

 

고종, 무당과 박수에 의지해 나라를 통치하다

1882년 이태원과 왕십리의 가난한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켰을 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불러 난을 진압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반란을 진압해야 했을까? 군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없었는가? 고종이 없애버렸다. 군인이란 군인은 국왕과 왕비가 살고 있는 창덕궁과 덕수궁 호위부대로 돌려버렸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졌을 때 대한제국의 나라 빚이 1,300만 원이었다. 그 해 나라 예산이 1,310만 원이었다. 한 나라 예산에 맞먹는 빚은 어쩌다 생겼을까? 국왕 고종이 돈을 물 쓰듯 했기 때문이다. 어디에 썼는가? 독일제 철모 사고, 박력 있게 포성 내지르는 개틀링 기관총 사고, 자기 생일날 예포를 쏠 고물 상선을 순양함이라고 속아서 사고, 생일상에 올릴 프랑스제 식기를 사는 데 썼다. 돈이 모자라는 줄 모르고 무당굿을 하고, 한강의 용왕에게 먹이기 위해 몇백 석 밥을 지어 물고기 먹이로 내던졌다. 무당과 박수에 의지해 통치한 국왕이 바로 고종이었다.

군사가 사라지고 곳간은 텅 비고, 썩은 내 팔도에 진동하는 그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외국 공관으로 일곱 번이나 도망갈 궁리를 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해 살던 1년 동안 주요 국가 재산 다 팔아치우고 자기 왕좌를 보전한 사람이 고종이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의 주인공은 매국노 이완용과 을사오적이 아니라 명령자인 고종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월계관을 써야 할 자는 고종인데, 이완용이 그 오물을 다 뒤집어 쓴 것은 훌륭하신 국뽕 역사학자들의 역사 사기극 덕분이다.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망국 과정을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한 사람은 구한말 이 땅에 주재했던 서양 외교관들이다.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열강 외교관들은 대한제국 망국의 제1원인으로 고종의 무능한 통치, 부패한 정부를 꼽았다. 무능 부패한 황제와 정부로 인해 독립·자치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1896년 10월 주한 영국공사관 총영사로 부임, 1898년 3월 대리공사로 승진하여 한국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조던은 본국 정부에 “조선 조정은 내각 위기가 끊이지 않아 외국 공관들은 정부 각료가 1주일에 한 번 씩 갈렸다는 통고를 접수할 틈도 없을 정도였다”고 보고했다.

오죽했으면 러일전쟁 당시 AP통신 전쟁특파원으로 활동했고, 서울·선양주재 미국 부영사 및 총영사를 역임했던 윌라드 스트레이트는 “아시아에서도 한국은 구제가 불가능한 국가다. 고종은 열강 사이의 분열을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려는 나약한 거간꾼이고, 양반 계층은 음모를 통해 사적(私的)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익(私益) 집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치권을 포기하고 대신 일본의 지배를 수용해야 한다”고 망해가는 대한제국을 비판했겠는가.

화제의 역작 "매국노 고종"을 출간한 저자이자 현직 조선일보 기자 박종인. 저자 박종인은 국뽕 역사학자들이 '개혁 군주'라고 가짜 신화를 창조해낸 고종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쳤다.
화제의 역작 "매국노 고종"을 출간한 저자이자 현직 조선일보 기자 박종인. 저자 박종인은 국뽕 역사학자들이 '개혁 군주'라고 가짜 신화를 창조해낸 고종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쳤다.

 

일본이 경악할 정도로 나라 파는 일에 적극 협조한 왕공족들

1910년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긴 고종과 그 아들은 대일본제국의 왕공족(王公族)으로 편입되었다.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李太王), 순종은 창덕궁 이왕(李王)에 책봉되었고, 왕공족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경성에 이왕직(李王職)을 설치하여 조선 총독의 감독 하에 두었다. 왕공족은 경성에 본저(本邸)를 도쿄에 별저(別邸)를 두었다.

원래 나라가 망해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군주들은 이집트, 베트남처럼 평민으로 강등되고 재산을 박탈당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달랐다. 일본은 폭력수단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조선 인민들의 복종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황실을 보전하고 그들을 예우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왕공족들은 총독부의 고위 관리들이 경악할 정도로 통치권을 일본에 넘기고, 일본 천황의 통치를 받도록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왜 그랬을까? 나라의 주권을 남의 나라에 넘기는 일에 왜 그렇게 열성적이었을까?

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실은 천황가의 일원인 왕공족으로 환골탈태하여 극도의 예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왕공족의 지위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것이었다(이왕무, 「대한제국 황실의 분해와 왕공족의 탄생」, 『한국사학보』 64호, 2016). 옛 궁내부를 대신한 이왕직(李王職)이 왕공족 재산과 신분을 관리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의하면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50만 엔, 이듬해부터는 180만 엔으로 올랐다(이윤상, 「일제하 조선왕실의 지위와 이왕직의 기능」, 『한국문화』 40호, 2007). 1911~1913 회계연도 조선총독부 세출이 5046만 9000엔이었으니(박기주, 「식민지기의 세제」, 한국조세연구원, 『한국세제사』 1편, 2012), 식민지 세출의 2%가 고종과 그 가족에게 투입된 셈이다.

1930년 9월 2일 자 총독부 자료 「이왕가 추가예산 설명」에 따르면 그해 이왕가는 유가증권으로 60만 7,778엔, 부동산은 논·밭·대지·임야 모두 합쳐 772만 6,091엔어치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매년 들어오는 세비가 150만 엔, 불시적인 행사에는 추가 예산이 투입됐다. 1921년 예산은 100만 엔이 늘어난 257만 3,425엔에 달했다.(김명수, 「1915~1921년도 구황실 재정의 구성과 그 성격에 관한 고찰」, 『규장각』35집, 2016)

너무나 안락하고 해피했던 망국 군주의 삶

병합 3주년을 맞은 1913년 8월 29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고종의 일상을 이렇게 전했다.

‘옥돌장(玉突場: 당구장)에 나가서 공을 치시는데 극히 재미를 붙여 여관(女官)들을 함께 하신다. 여름에는 서늘한 때에 석조전에서 청량한 바람을 몸에 받으시며 내인들을 데리고 이야기도 시키고 유성기 소리도 즐거워하신다더라.’

비운의 황제, 망국의 주인공은 일본 정부로부터 제공되는 막대한 세비를 받아가며 안락한 노후를 해피하게 보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족(蛇足)을 덧붙인다. 이데 마사이치(井手正一)란 일본인이 일제의 한국병합을 기념하여 1910년 『한국병합기념첩』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일 병합이 다른 나라처럼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거나, 의회에서 독단적인 결정을 통한 강행이 아니라, 군주의 임의적 판단에 의한 평화적 합병이었음이 특기할 만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대한제국처럼 조약을 통해 한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넘긴 사례는 인류 역사상 지극히 드문 사례라는 것이다(이데 마사이치 지음·신동규 옮김,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병합-「조선사정」과 「조선사진첩」』, 동아대학교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 2020, 37~38쪽).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해친 후 남이 해친다고 했다. 고종에 대해 더 궁금하신 점이 있는가? 그렇다면 박종인 기자의 『매국노 고종』을 사서 읽으시기 바란다. 전 국민이 이 책을 읽고 국뽕 가짜 역사의 최면에서 깨어나는 날 대한민국의 근대혁명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성기웅 기자 skw424@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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