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부터 1977년까지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역임하면서 미국의 닉슨 및 포드 대통령을 위하여 일했던 헨리 키신저 (Henry Kissinger)는 국제정치의 구도를 미국과 소련의 양자 대결에서 미국, 소련, 유럽, 중국, 일본의 다자간 협력체제로 전환시켰다.

당시 끝이 보이지 않는 베트남전에 지쳐있던 미국인들은 키신저의 획기적인 발상에 감탄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부담이 줄어들게 해 준 닉슨과 키신저를 외교의 천재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공산화되었고 대한민국도 심각한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

1957년 키신저는 자신의 하버드 대학 국제 정치학 박사 학위 논문을 편집하여 <회복된 세계; 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년 - 1822년>를 출간했는데 빈 회의 전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닉슨 행정부의 1970년대 미국 외교정책의 전환에 영감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혁명이 낳은 유럽의 패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자 유럽의 4대 강국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상호 대립하면서 빈 회의 (The Congress of Vienna Convention; 1814년 - 1815년)를 통하여 각국의 영토를 조정하고 패전국 프랑스를 다시 국제사회에 복귀시킨다. 이렇게 성립된 5대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 대륙에 장기간에 걸친 번영을 가져온다.

1969년에 취임한 닉슨 대통령이 자신의 보좌관 키신저의 새로운 세계질서 구상을 현실 외교에 적용하기 시작하자 국제사회에 큰 변화가 발생한다.

미국, 유럽, 일본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국의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던 냉전 체제가 - 미국과 소련의 군축회담 및 미국 및 중국의 외교관계 수립을 통하여 - 미국, 소련, 유럽, 중국, 일본의 5대 세력 체제로 개편된다. 그러자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미국, 유럽, 일본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공산주의 진영 내의 소련과 중국은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적대국으로 분류하고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소련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한다.

키신저의 구상에 의하면 미국은 과거의 영국, 유럽은 과거의 프랑스, 일본은 과거의 프로이센, 소련은 과거의 러시아, 중국은 과거의 오스트리아 역할을 맡으면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형성하게 된다.

미국은 자국 영토가 대서양과 태평양에 의하여 다른 강대국들과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럽 대륙과 바다로 분리되어 있는 영국, 유럽은 과거에는 최강이었지만 현재는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더 이상 주변국에 위협이 되지 못 한다는 점에서 왕당파와 공화파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던 프랑스, 일본은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고 잘 조직되어 있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이기에 국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프로이센, 소련은 공산주의 이념을 강요하며 다른 나라들의 내정에 무제한적으로 간섭하려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유럽 대륙을 통제하려 하던 러시아, 중국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독립을 원하는 소수민족들이 국토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인, 헝가리인, 체코인 등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오스트리아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로 한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영국은 프랑스 이외의 유럽 국가는 자신들의 적수가 될 수도 없고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으므로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유럽 대륙에 대한 개입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외상 캐슬레이는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간의 미묘한 갈등이 자국 안보에 근본적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영국이 유럽 안보체계에 계속 관여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다른 유럽 열강들과 타협했더라면 라인강을 경계로 하여 보나파르트 왕조 하에 대혁명 이전의 유럽으로 복귀할 수도 있었으나 결국 패전국의 처지가 되면서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였다. 프랑스를 대표하여 빈에 파견된 탈레이랑 (Talleyrand; 1754년 - 1838년)은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갈등을 이용하여 자국을 다시 유럽 열강의 위치에 올려 놓는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이후 더 이상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어서 폴란드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대가로 독일 내 작센 지방을 얻고자 하였지만 이 또한 독일 연방의 맹주 오스트리아의 반대에 직면하여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경험했던 연이은 패전의 결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였기에 오스트리아 등을 상대로 군사행동에 나설 생각은 하지 못 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격파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60만명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승전국의 대표 자격으로 프랑스 파리에 입성했던 차르 니콜라이 1세 (Александр I; 1777년 - 1825년)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유럽 대륙 전체를 통제하려 들면서 다른 승전국들과의 긴장이 점차 높아져 갔다.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는 로마 교황의 인정을 받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다스리는 다민족 국가로서 역사적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전 유럽으로 확대됨에 따라 내부 응집력이 약화되고 있던 불안정한 국가였다.

닉슨과 키신저의 구상에 따르면 1970년대의 미국, 유럽, 일본, 소련, 중국이 19세기 초의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역할을 각각 승계하고 미국의 국무장관 키신저가 과거 영국의 외상 캐슬레이 (Lord Castlereagh; 1769년 - 1822년)의 역할을 중국의 총리 겸 외교부장 주은래 (周恩來)는 과거 오스트리아의 재상이었던 메테르니히 (Klemens von Metternich; 1773년 - 1859년)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키신저 본인은 해외 문제에 아예 관심이 없는 미국인들의 고립주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국제 문제 개입을 주도하면서 전세계적 세력 균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영국에 대한 직접적 위협인 프랑스 이외의 국가에 개입하기를 꺼려하던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 대륙에 관여했던 과거 캐슬레이 외상의 역할을 맡았다.

중국의 총리 주은래는 매사에 감정이 앞서는 최고지도자 모택동 (毛澤東)의 심기를 관리하면서 외국 정상들과의 협상을 통하여 자국의 이익을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점에서 소심하고 무기력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 (Franz II; 1768년 - 1835년)를 충성스럽게 보좌하면서 국제질서의 흐름을 자국에 유리하게 가져갔던 과거 오스트리아의 외교를 담당했던 메테르니히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키신저의 저서 <회복된 세계>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이지 영국의 캐슬레이가 아니지만 1970년대 국제 외교가의 중심인물은 중국의 주은래가 아니라 미국의 키신저였다. 닉슨 행정부의 세계질서 개편에 있어서 키신저는 유럽, 일본, 소련, 중국이 모두 다른 열강보다는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막후에서 조정했다는 점에서 19세기 전반 국제 외교의 중심인물이었던 메테르니히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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