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섭 KBS 이사

수신료 인상의 교훈: 공영방송의 ‘존재 증명’ 요청

지난 1월 27일 KBS이사회에서 텔레비전방송수신료(이하 수신료) 인상안이 상정되었다. 인상액은 월 2,500원에서 1,340원 올린 3,840원이다. 현재 수신료는 41년째 2,500원으로 동결된 상태이다. 수신료 인상은 KBS로서는 숙원사업이자 가야만 하는 길이다. 수신료 인상은 방송 공정성, 자구 노력, 미래 비전 등이 응축된 프로젝트다. 수신료 인상을 위해 KBS는 무엇보다 공정방송으로 국민의 마음부터 얻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신료 인상은 방송의 공정 품격 신뢰 등 공영방송의 ‘존재증명’ 없이는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그 동안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KBS 수신료 인상에 대한 논의는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받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방송 공정성 시비: 그 때는 글렀고 지금은 옳은가

‘방송은 사사롭지 않고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아야 한다’는 방송 공정성의 정의는 단순하다. 그러나 방송 공정성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시비는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방송 공정성 문제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지만, 일관성 있는 원칙은 여전히 찾기 어렵다.

이번에 수신료 인상안을 상정하고 논의하는 KBS이사회 회의장에서 필자는 김상근 이사장에게 질문했다. 지난 1987년, KBS 방송이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TV시청료거부운동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는데, KBS방송이 그 때는 불공정했고, 지금은 공정한지. 다음으로 양승동 사장에게도 질문했다. 지난 2010년과 2013년, KBS가 수신료 인상을 추진할 때 ‘KBS가 정부에 대한 비판이 무디다’는 등 역시 ‘방송 불공정성’을 이유로 수신료 인상을 반대했는데, KBS가 그 때는 정부 비판에 무디었고, 지금은 날카로운지. 그러나 모두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 때는 글렀고 지금도 옳지 않다면, KBS 방송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함께 지혜를 모으자는 요청이었다.

공정이 훼손된 방송은 사회의 공기(公器)가 아니라 흉기(凶器)

KBS가 수신료를 인상하는 목적은 공영방송의 공적책무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공영방송의 가장 중요한 공적책무는 방송의 공익성과 공정성이다. 방송의 공익성은 다짐과 약속으로 가능하지만, 방송의 공정성은 신뢰가 쌓여야 한다. KBS가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린 불공정 방송사례 몇 개를 상기해 보고자 한다.

2019년 6월 KBS 1TV <시사기획 창> ‘태양광 복마전’ 프로그램이 방송된 후,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KBS에 정정보도와 사과방송을 요청했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KBS측에서 대답이 없었다”며 공개적으로 브리핑까지 했다. 필자는 KBS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훼손된 중대 사태가 발생했다고 판단하고, 동료 이사들과 함께 ‘시시프로그램 현안보고 및 시스템 개선방안 보고안건’을 KBS이사회에 제출했다. 그런데 다수이사들은 안건 상정 자체를 무력화시켰다. KBS의 독립성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는 이사로서의 마음은 참담했다.

KBS 경영진도 이 중대한 보도외압 사건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그리고 KBS민노총노조는 2016년 세월호 사건 당시 KBS 보도본부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읍소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을 고발해서 실형을 받게 했다. 그러나 명백히 KBS의 독립성을 침해한 윤수석에 대해서 KBS민노총노조는 관대했다. 과거 KBS민노총노조가 투쟁하며 내세웠던 ‘언론자유’와 ‘방송 독립’은 수사에 불과했고, 투쟁 목적은 ‘보직’과 ‘자리’였음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자성의 목소리들이 내부에서 분출되었다. 공정성 투쟁과 공정성 원칙에 일관성이 없다.

다음으로, 2020년 7월 <KBS 뉴스9> ‘KBS판 검언유착 의혹사건’은 당초 ‘채널A 기자와 검사’의 검언유착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KBS 기자와 또 다른 검사의 유착관계가 발생한 사건’이다. 취재기자의 원고를 보도국 간부진들이 데스킹하는 과정에서 ‘제3의 인물’로 보이는 관계자와 나눈 대화록이 활용됐다는 의혹이다. 즉, 취재기자가 전 채널A 이동재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이 나눈 대화를 직접 녹취한 것이 아니라 ‘제3의 인물’의 부정확한 전언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특정 세력을 공격하고, 특정 정파를 옹호하는 허위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 보도참사라면 최고 경영자의 대국민 사과와 엄정한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 의혹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 없이 관련 실무자들에 대해 주의, 견책, 경고 등 경징계 처분을 내렸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행태이다. 해외 공영방송에서도 허위방송으로 최고 경영자가 사퇴를 한 경우는 상당 수 있다. 이 사건은 ‘KBS 검언유착 의혹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 의해 검찰에 고발되어 있다. 향후 KBS의 검언유착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는 KBS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태가 될 것이다.

이 밖에도 2018년 KBS 1TV <오늘밤 김제동> 프로그램에서 ‘공산당이 좋아요’ 방송, 2019년 강원도 대형 산불 때 ‘강릉 중계차 위치 기만’ 보도, <도올아인 오방간다> 프로그램에서 김용옥의 ‘이승만 대통령 부관참시’ 발언, ‘미디어 비평은 없고 편파성만 있다’는 <저널리즘 토크쇼J>, 2020년 KBS 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 프로그램에서 주진우 진행자의 ‘구속되는 이명박 대통령 저주 발언’, 여당에 불리한 내용을 빼고 뉴스를 읽은 ‘김모 아나운서 편파방송 사건’ 등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품격에 오점을 남기는 불공정 방송은 계속 발생하고 있다

KBS 방송목표 중의 하나가 공정한 저널리즘 확립과 독보적인 저널리즘 신뢰구축이다. 이러한 시청자와의 약속과는 달리 KBS가 불공정 방송으로 국민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KBS와 같은 거대 조직에서 문제는 수시로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이 있는가이다. KBS의 힘은 국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국민의 신뢰는 방송의 공정성이 잣대가 된다. 방송의 공정성 확보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채 수신료를 인상한다면, 이는 KBS의 불공정 방송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방관하는 태도가 될 것이다. 내외부의 간섭으로 공정이 훼손된 방송은 사회의 공기(公器)가 아니라 흉기(凶器)가 될 수 있다.

‘기계적 중립’이 오히려 공정성을 준수하는 강력한 방안

양극화된 우리사회에서 방송은 이념적, 정치적 쟁점이 되는 내용을 다룰 때 공정성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공영방송에서의 공정성 시비는 우리사회 내부의 구조적인 이념대립으로 인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본다. 소위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공영방송에서 저런 프로그램이 나갈 수 있는가?”라는가 하면,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공영방송 KBS가 실체적 진실을 외면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영의 논리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방송 공정성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전까지는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공정성을 준수하는 강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양보 없는 평행선, 그 41년의 벽을 넘어야

KBS 수신료 인상은 2007년, 2010년, 2013년에 이어 네 번째 도전이다. 준조세 성격인 수신료 인상에 대해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다. 여권은 거버넌스(governance)와 방송 공정성 등에 대한 제도적 장치를 제대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반면 야권은 거버넌스 개편과 불공정 방송대책 등을 요구할 뿐 수신료 인상에는 호의적이지 않다. KBS는 경영효율화 및 공적책무에 대한 설명책임이 부족하다. 국민들은 통신요금에 수십만 원을 지불하면서 방송은 공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선진국의 1/8 수준에 불과한 수신료에는 관용과 배려의 정신을 발휘하지 않는다.

‘수신료 납부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수신료거부운동 세력이 상존하고, ‘수신료의 전기료 병합징수를 금지하는 법률’이 발의되었고, 수신료 인식조사에서 ‘수신료 인상이 필요 없다’는 국민이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수신료 인상안에 대해 ‘징세를 넘은 약탈’이라고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수신료에 비판적인 국민들의 진정한 뜻은 KBS를 해체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공정한 방송을 하라’는 강력한 요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광고 덕분(?)에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국민 부담을 최소화하여 공영방송제도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방송광고 매출액이 급감하면서, KBS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공적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수신료 인상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수신료 인상을 앞두고 또 다시 펼쳐지는 양보 없는 평행선, 그 41년의 벽을 넘어야 한다.

방송 공정성 확보로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수신료 인상의 선결 조건

수신료 인상의 묘수는 없다. 국민의 방송으로서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수신료 인상은 정치적 합의와 국민적 동의를 요청하는 고도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복합프로젝트다. 수신료 인상은 KBS 대발전의 청신호이다. 국가기간방송 KBS는 수신료 인상으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하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문화기구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KBS는 돈보다 혁신으로 수신료 가치에 감동으로 보답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국민적 동의를 받기 위해 KBS의 잘못된 현실을 고백하고, 자구 노력과 미래 비전을 신박하게 제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영방송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공정성이다. 따라서 모든 논의에 앞서 KBS가 방송 공정성을 제도적으로 확보하여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수신료 인상을 가능하게 하는 선결 조건이다.

황우섭 객원 칼럼니스트 (KBS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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