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들’처럼 비양심적이고 몰염치하게는 못 산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러니’ 너는 다리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런데 ‘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 쭉 뻗고 나보다 더 꿀잠을 자는 것 같다. 나쁜 짓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자식대에 가서라도 그 대가를 치른다고도 한다. 그런데 ‘저들’은 자손만대 호의호식하고 잘 살 준비가 이미 확실히 되어 있는 듯하다. 가끔은 내가 잘 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내가 대학교 3학년이던 1981년 얘기다. 그해 봄 대학생 해외 연수가 처음 허용됐다. 젊은이들 듣는다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냐 하겠지만 그땐 돈이 있어도 외국 여행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할 때였다.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갈 수 있게 된 것도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흐른 후였으니 말이다.

암튼 난 그때 학보사 편집장이었다. 우린 1학기 내내 대학생 해외 연수가 시기상조임에 대해 수많은 기사를 썼다. 있는 집 자식들과 없는 집 자식들 사이에 위화감이 생길 것이니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논지였다. 우리 신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학 신문이 대학생 해외 연수에 반대하는 논조를 폈다.

그런데 여름 방학으로 들어갈 무렵 학보사 주간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한민국 대학생들을 뽑아 유럽 등 선진국 몇 나라를 돌아볼 대표단을 구성하는데 우리 학교 대표로 나를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일단 나는 못 간다고 했다. 우리 신문에서 1학기 내내 해외 연수 허용을 반대하는 기사를 써댔는데 어떻게 내가 앞장서서 해외 연수를 가겠느냐는 이유였다. 교수님은 다른 학교에서도 반대했기는 다 마찬가지이고 세상사 다 그렇고 그런 거니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양심상 갈 수 없다고 버티다가 ‘영어 회화 가능자’라는 자격 요건을 핑계로 다른 학생에게 그 기회를 양보했다. 물론 나도 ‘영어 회화 가능자’이긴 했다. 하지만 ‘영어 회화 능통자’여야만 대한민국 대학생 대표가 될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000
젊은이라면 정의감 넘치고 양심 충만한 행동을 펼친 경험을 트로피처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 대신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20여 일 동안 서유럽을 ‘순방’하고 온 다른 학생의 사진을 보니 참 부럽긴 했다. 그냥 ‘내가 갈 걸, 괜히 양보했다’라고 후회도 잠깐 했다. 하지만 나는 젊은 내가 참 정의롭고 양심적이었다고 자부한다. 당시 내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면 “너 미쳤니?”하고 나무라셨을 수도 있다. 지금 내 딸이 당시의 나와 같은 결정을 했다면 나도 “너 바보니?”하고 나무랄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라면 자신의 이익을 크게 돌아보지 않는, 정의감 넘치고 양심 충만한 행동을 펼친 경험을 하나씩은 트로피처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이가 들고 세상사에 닳고 닳다 보니 정의감이니 호승심이니 하는 열정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 사람들 하는 행태를 보며 ‘나 같으면 저렇게 안 살 것 같은데’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사람들’ 속에는 기성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젊은이도 많이 끼어 있다. 나도 그 시절을 살아왔지만 그렇게 살지 않아야 되는 이상한 행태들을 흔히 보게 되어 안타깝기도 하다.

나 같으면 엄마가 가짜 증명서를 만들어 스펙을 채워준다고 할 때 절대로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뜯어말렸을 것 같다. 아버지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지위를 ‘활용’하려 하지 않고 더 강하게 거부했을 것 같다. 어떻게 올라간 자리인데, 아버지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게 되면 어쩔 거냐고 말렸을 것 같다. 아버지의 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그 자리까지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는가. 또 얼마나 더러운 꼴을 많이 보고 얼마나 손바닥을 비벼댔겠는가. 그렇게 힘들게 차지한 고위 공직자 자리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도록 가족이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돕겠는가. 나 같으면, 내 아버지가 그 정도로 고위 공직자라면, 아버지를 사랑하든 안 하든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살았을 것 같다.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나 같으면, 내 아버지가 고위 공직자라면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 살았을 것 같다.

나 같으면 내 아버지가, 혹은 아버지 차 기사가 면접장 정문 앞까지 데려다줬어도 면접장 안에는 안 들어갈 것 같다. 거기까지는 어떻게 부모에게 등 떠밀려 갔다 해도 내 발걸음은 가까이 있는 북한산이나 도봉산으로 향했을 것 같다. 그만큼 ‘쪽’이 팔렸으면 그쯤에서 그만뒀을 것 같다. 성가셔서라도 그만뒀을 것 같다. 직업에 대한 소명감이 투철하다면 어디 오지에 가서 봉사라도 하고 왔을 것 같다. 부모에게서 세상 시선이 거둬질 무렵 돌아와 그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시작했을 것 같다.

나 같으면, 내 부모가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이라면 남보다 열심히 군 복무했을 것이다. 혹시 휴가 나왔다가 정말 몸에 병이 나고 아파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부모 차에 실려서라도 일단 정해진 시간에 귀대하여 신고를 마칠 것 같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절차를 밟아 병원으로 갔을 것 같다. 어머니가 상관에게 전화를 걸어준다고 해도 군대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니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렸을 것 같다.

“엄마나 아빠처럼은 살지 않겠어요” “더 이상 내 삶에 참견하지 마세요”라고 말은 잘 하면서 부모 세대의 부정한 행태는 왜 그냥 답습하고 왜 그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모 찬스’를 쓰려고 하는 걸까? 나 같으면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하기 위해서라도 ‘부모 찬스’를 포기할 것 같은데…….

기성 세대가 저지르는 이해 못 할 행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나나 내 남편은 여간해서는 교통 위반을 안 한다. 주차도 반드시 안전한 곳에 한다. 그래도 행여 도로 교통 관련 범칙금이 부과되면 고지된 그 다음 날로 범칙금을 납부한다. 제한속도 30km 도로에서 40km로 ‘달렸다’고 벌금을 내라 해도 버티지 않는다. 멀쩡한 도로에서 30km로 벌벌 기어가라는 건 부당하지만 법을 어긴 건 어긴 거니까. 또 그걸 안 내고 버티고 있다고 안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공직자 청문회에 나온 후보자들은 왜 그리 주차 위반, 속도 위반이 많고 범칙금은 왜 그리 밀려 있는지. 나 같으면 그런 사소한 문제로 내 경력과 지위에 흠집 내지 않는다. 그들이 공개한 재산 규모를 보면 거의 다 나보다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추접하게 사는 걸까?

일생을 거짓 없이 사셨던 도산 안창호 선생

내가 청문회나 국정감사에 질의하러 나가거나 혹은 장관이 되었다면 그 분야에 대해 벼락치기라도 열심히 공부할 것 같다. 무식하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할 것 같다. 나 같으면, 국제 교류에 직접 나서는 높은 자리에 앉았다면 매일 같이 원어민 선생 데려다 영어 공부부터 할 것 같다. 그래서 국제 무대에서 폼나게 외국 사람들과 농담도 나누며 당당하게 설 것 같다.

나 같으면, 가족 여행 때 관용 여권 들고 가지 않는다. 그 여권으로 얻는 혜택보다 들켰을 때 받을 수모와 굴욕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공항에서 줄을 서서 사람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 생각하고 그마저도 즐길 것 같다. 관용 여권 전용 창구로 가족들 줄줄이 이끌고 들어가며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을 때 그 자녀들은 뭐라고 할까? “와, 역시 우리 아빠가 최고야!”라고 얘기했을까? 그랬을 것 같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일 테니까.

나 같으면 다음 날이면 뻔히 드러날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뭔가 숨겨야 할 것이 있으면 보다 치밀하게 숨길 것 같다. 완전히 숨길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면 그냥 털어놓고 말 것 같다. 세상에는 비밀도, 완전 범죄도 없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며 조심 또 조심할 것 같다. 만에 하나 거짓말한 게 드러났다면 초반에 ‘깨갱’하고 용서를 구할 것 같다. 리처드 닉슨을 대통령직에서 밀려나게 한 것은 ‘도청’이 아니라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교훈으로 삼을 것이다. 그 자리를 명예롭게 지키고 싶다면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저들’은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일삼을까? 그리고 거짓말이 탄로 나도 어쩌면 그렇게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살아갈 수 있을까? 거짓말하면 코가 길게 늘어나는 ‘피노키오’ 얘기를 ‘저들’은 이해나 할까? 나 같으면, 나나 내 가족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양심에 어긋나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은 일단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더라도 사람들에게 들켜서 질타를 받게 되면 반성하고 근신하는 ‘척’이라도 할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저들’처럼 비양심적이고 몰염치하게는 못 산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러니’ 너는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런데 ‘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 쭉 뻗고 나보다 더 꿀잠을 자는 것 같다. 나쁜 짓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자식대에 가서라도 그 대가를 치른다고도 한다. 그런데 ‘저들’은 자손만대 호의호식하고 잘 살 준비가 이미 확실히 되어 있는 듯하다. 이러니 가끔은, 그래서 내가 이 나이까지도 내일 일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슬프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