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칼럼리스트.

작년 여름 한국관광공사가 해외홍보용으로 제작한 ‘한국의 리듬을 느끼세요(Feel the Rhythm of Korea)’ 영상은 그저 단지 한국 홍보 캠페인일 뿐인데 소셜미디어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이날치 밴드가 노래 부르고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가 춤을 춘 이 동영상은 전 세계에서 합산 조회 수 3억 회를 기록했다. “K팝 아이돌보다 신선하다”는 해외 팬들의 찬사가 줄을 잇고, ’21세기 도깨비'라는 별명도 붙었다. 덩달아 이날치밴드가 부른 ‘범내려온다’도 2월 10일자로 유튜브 조회수가 4,570만을 넘었다.

늙은 세대의 유물인 줄만 알았던 판소리가 현재 대한민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인기 음악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 나아가 글로벌한 공감을 이끌어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종이 신문의 기획 기사에서도, 서울대 경제학 교수의 칼럼에서도, TV 특집 프로에서도, 도처에서 ‘범 내려온다’를 이야기하고 보여준다. “판소리를 하루 한 번씩 듣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고리타분한 포장을 걷어내니 전통이 이 시대에 가장 앞선 팝이었어요.” 이날치 밴드의 음악 감독 장영규가 했다는 말이다. 

별주부와 토끼의 추격전을 담은 수궁가의 ‘범 내려온다’를 나도 설 연휴에 유트브로 보았다. ‘이날치’라는 그룹 이름은 조선 후기 8명창 중 한 명인 이날치(李捺治, 1820~1892)에서 따왔다고 한다. 날치와 같이 날쌔게 줄을 탄다고 하여 날치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이다.

'범 내려온다'는 판소리 수궁가(토끼전)에 나오는 노래 가운데 하나다

토끼를 찾으러 절벽을 오르다가 온 힘을 다 쓰고만 별주부(자라)가 마침내 절벽에 올라 저 멀리 토끼를 발견한다. 반가운 마음에 “토선생!”하고 부른다는 게 그만 힘이 빠져 “호선생!” 하고 발음이 새 버렸다. 마침 그때 호랑이(범)가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자라 한 마리가 있지 않은가. 몸에 좋다는 자라로 용봉탕을 만들어 먹어야지 하고, 신이 나 한 달음에 산을 내달린다. 이를 보고 겁에 질려 바닥에 바짝 엎드린 자라가 부르는 노래가 ‘범 내려온다’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같은 앞다리/ 동아같은 뒷발로/ 양 귀 찢어지고/ 쇠낫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래 정신없이 목을 움추리고/ 가만이 엎졌것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 귀 쭉 찢어지고/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동개같은 앞다리 전동같은 뒷다리/ 새 낫 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격으로/ 잔디 뿌리 왕모래 좌르르르르르르 흩이고/ 주홍 입 쩍 벌리고 자라 앞에 가 우뚝 서/ 홍앵앵앵 허는 소리 산천이 뒤덮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라가 깜짝 놀래/ 목을 움치고 가만히 엎졌을 제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거대한 호랑이와 그 앞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자라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되어 있다. 노랫말 자체가 가사문학의 극치이지만, 왕모래 ‘촤르르르르’ 흩어지는 소리, 호랑이가 ‘홍앵앵앵’ 포효하는 소리를 노래하는 젊은 소리꾼의 의성(擬聲)은 정말 기막힌 테크닉이다. 평상복에, 평범한 헤어스타일이어서 더 놀랍다. 길에서 지나치면 그냥 평범한 젊은이 모습일 이 가수들은 어찌 그렇게 노래를 잘 하는가. 예전의 명창들은 흐르는 개천 물가에서 피를 토하며 득음을 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일화들을 하나씩 갖고 있는데, 오늘의 젊은이들은 건강하고 젊기만 하면 이 정도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마음껏 소리를 내지르고 촤르르르 목젖을 굴린다.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

이날치의 노래는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막춤과 어우러져 더 빛을 발한다. 김치 웨스턴 그루브(groove)라는 명칭도 얻었다. 그루브는 ‘멋지다’라는 뜻의 젊은이들 속어다. 판소리에 기계음인 신스팝(synthpop)을 섞고, 한복에 ‘추리닝’을 마구 섞었으며, 막춤과 현대무용이 한데 어우러진다.

음악은 가장 한국적인 판소리인데 거기에 맞추는 스텝은 스트리트 댄스의 일종인 로킹(locking) 스텝이다. 그러니까 무용수들이 자기 멋대로 막 추는 춤인 것 같지만 실은 세심하게 안무된 어려운 동작이다. 이 기상천외한 안무를 구상한 건 고등학생 시절 엄정화, 이정현 등 유명 가수의 백업 댄서를 했던 김보람 예술 감독이다. 그는 음악을 분석하며 선을 수십, 수백 개 그린다고 했다. 음이 꺾이는 부분, 이어지는 부분이 모두 각자의 선이 된다. 박자는 수십 숫자로 쪼개진다. 이 노트를 바탕으로 길게는 수개월 동안 연구를 거듭해 레퍼토리 하나를 만든다고 했다. 먼저 소리가 들리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그걸 어떻게 몸으로 표현할지 고민하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는 단원들에게 계산된 대로 표현할 것을 강조한다. 특히 관중이 환호하거나 웃는다고 절대 오버하지 말라고 한다. “관객들이 환호한다고 우리가 더 익살스럽게 움직이면, 그때부터는 저희가 공들여 준비한 작품이 의미를 잃고 그저 ‘웃기는 작품’이 돼버리잖아요. 저희는 작품을 날것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고, 해석은 오롯이 관객한테 맡기고 싶어요. 그들이 웃든, 울든 그것은 그들 영역이니까.” (조선일보, 2021 1/30, ‘아무튼 주말) 

그래서 공연 때마다 선글라스를 낀다고 했다. 눈이나 표정이 아닌 몸으로 언어를 표현하는 무용수들이므로, 선글라스를 쓰면 관객이 무용수의 몸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상도 기상천외하다

정장 양복 바지에 고무신 신고, 머리엔 갓을 쓰기도 한다. 한복에 선글라스를 쓰고, 한복 저고리에 골프 웨어 같은 바람막이를 받쳐 입기도 하고, 서양식 정장에 조선시대 투구를 걸치기도 한다. 전통과 현대의 조합이지만 세련미라고는 없이 이른 바 b급 정서의 조합이다. 그러나 싼티(싸구려 티) 나는 괴상한 의상의 조합이 오히려 힙(hip, 멋지다는 의미의 젊은이들 속어)해서 ‘앰비규어스 신드롬’을 고조시킨다.

그들은 새 작품을 준비할 때면 매일 동묘시장, 동대문 원단 시장, 풍물 시장, 방산시장 등 재래시장에 가 옷을 본다고 했다. 그리고는 마음 내키는 대로 구입하여 자유롭게 조합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투구를 풍물 시장에서 만 오천 원 주고 샀는데 상모(象毛·붉은 털 장식)가 없었다. 그래서 미러볼을 달았다. 그러자 단박에 나이트클럽 느낌이 났다. 그러면 어떤가. 분위기는 더욱 더 힙해 지는데...

이미 14년 전에 창단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계기는 이날치와 이룬 협업이지만, 이미 2007년에 데뷔했다. 서울예대 무용과 선후배 사이인 김보람과 장경민이 주축이 돼 창단했고, 2008년 CJ 영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아모레, KT, 현대백화점 등 대기업 광고도 여럿 찍었다.

이들 작업은 언제나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다. 테크노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다가(‘기가 막힌 흥’), 태평소 소리에 맞춰 치맛자락을 나부끼기도 하고(‘피버’), 바흐의 클래식과 다프트 펑크의 전자 음악을 한 무대에서 엮어내기도 한다(‘바디 콘서트’).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기를

요즘 MZ 세대(8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태어난 세대)는 전통 판소리나 한복 또는 한국적 문양에 관심이 높다. 고려청자나 민화를 그려 넣은 휴대폰 혹은 이어폰케이스를 사용하고, 훈민정음이 새겨진 텀블러를 들고 다니거나, 조선시대 도포 같은 옷을 입고 다니기도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 유산을 힙(hip·유행에 밝다)하다고 생각하는 트렌드여서 ‘전통힙’이라고도 불린다.

완전히 박물관의 유물로 화석화 될 것 같았던 전통 문화를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다만 지나친 반일, 지나친 민족주의적 사회 트렌드의 일환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한다. 젊은이들의 건강한 전통 문화 사랑이 편협한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역동적인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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