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주한 중화민국 대사 사오위린(邵毓麟)의 『한국외교 회고록』에서 밝혀

사오위린(邵毓麟)은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로 부임한 초대 주한 중화민국 대사다. 그가 주한 대사로 재직한 기간은 1949년 7월부터 1951년 9월까지다. 1909년 중국 저장성(浙江省) 출신인 사오위린은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九州)제국대학,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1934년 26세 때 쓰촨(四川)대학 교수로 부임한다. 그는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시대 상황에서 대학에서 후진을 가르치는 일은 의미없다고 여겨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외교관의 길을 택한다.

사오위린은 1935년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 외교부의 일본·러시아과 과장, 1937년 주일 요코하마 총영사를 지냈다. 이후 한국 임시정부 지원 책임자로 임명돼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때 임정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한국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4년 임정 주석 김구의 요청으로 중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임정 고문을 맡아 한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장제스는 사오위린을 초대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했다. 그가 쓴 『한국 외교 회고록』은 한국과의 외교 비화를 기록한 저작이다. 사오위린의 회고록은 한중 간에 벌어졌던 외교 비사·비화들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충실하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으로 표현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것처럼 만약 한반도가 중국의 적대세력에 넘어 갈 경우 만주를 비롯하여 중국 수도인 베이징이 적의 위협에 노출된다. 또 중국 남부 지방의 산물이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서해의 해상수송로가 봉쇄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안전이 위험해진다. 따라서 중국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한반도에 중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서도록 간섭하거나, 자신들이 한반도를 직간접 통치하려 했다.

 

한국인들, 중국에서 아편 장사로 악명 떨쳐

사오위린은 외교 업무 수행 과정에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의 행태도 개탄할 일이지만, 무형의 침략을 벌인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이 훨씬 더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이라는 외부의 적, 중국공산당이라는 내부의 적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장제스 국민정부의 우군이었다.  

사오위린이 한국의 독립운동가 지원 업무를 맡으면서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과 맹우 관계가 된다. 만리타향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준 것은 장제스 국민정부였다. 중국의 알뜰한 보살핌을 받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자연스럽게 중국 친화적 성향, 즉 친중파가 되었다. 한국 독립운동가 중에는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 추종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친공·친소파를 형성한다.

사오위린 대사의 회고록 표지.
사오위린 대사의 회고록 표지.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항일운동 등 좋은 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한인들 중에는 아편·모르핀·헤로인 등 일본제 마약을 중국에서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 시절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한국인들이 마약 공급책 역할을 하여 중국인들의 심신을 황폐화시킨 사례는 박강이 쓴 『20세기 전반 동북아 한인과 아편』에 상세히 연구되어 있다.

사오위린은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악행을 저지른 사실을 자서전에서 폭로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45년 8월 15일 일본군 항복 후 베이징의 음식점 문에 “한국인은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쪽지가 나붙었다. 전시에 가오리방쯔(高麗棒子,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비하하여 욕하는 말)의 악행에 대한 감정적 보복을 한 것이다(사오위린 지음』이용빈 외 옮김, 『한국 외교 회고록』, 한울, 2017, 73쪽).

사오위린은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적전 분열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문을 닫아걸고 당쟁만 일삼았다”고, 당파 간에 원수처럼 대립하는 바람에 자신들의 군사적 역량을 외적과의 싸움보다는 당쟁을 위한 정치 자본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중국 관내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치명적 약점은 파벌 간 투쟁과 대립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 소련의 사회주의 학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 폭력 없는 평화주의 등으로 당파를 이루다 후에는 좌우 2대 파벌로 갈렸으며, 양대 파벌이 대치하여 합했다가 갈라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리처 편·김승일 역,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시대의 창, 2005, 42~43쪽).

 

끝없이 분열한 한국 독립운동 진영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과의 싸움에 나섰다. 중국의 국공 양당은 한국 독립운동 파벌의 연합과 단결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조선 독립 인사들의 뜨거운 피는 중국의 대지에 뿌려지고 있으나 조선의 혁명 문제, 독립 문제와 관련해서는 의견대립이 많다. 한국 동지들은 중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으나 자신과 관계된 문제에서는 협력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중국 정치가 선쥔루(沈鈞儒)는 <조선민족전선>에 발표한 글에서 “조선 혁명동지들에게 바라는 점은 첫째도 단결, 둘째도 단결, 셋째도 단결”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독립단체의 분열상을 보다 못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인 각 당파 간 화해를 추진하여 한국민족혁명당 설립을 추진했으나 알력이 너무나 심각해 실패했다.

장제스 정부는 윤봉길 의거 이후에는 한국 임정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일본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했기 때문이다. 한국 청년 군사 간부 훈련과 양성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중국 정부가 부담하자 일본 정부는 온갖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고 사오위린은 기록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임정 지원은 당 중앙조직부와 군 정치정보공작부 등 두 개의 루트를 통해 진행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 후에는 공개적으로 임정을 원조했다.

1939년 1월 장제스는 김구와 김원봉을 면담했다. 장제스는 쌍방이 마음을 열고 협력하여 조선 독립을 실현하라고 권고했다. 한국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기 위해 좌우합작을 종용한 것이다. 장제스 정부는김원봉을 앞세워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용대는 300명 대원 중 대다수가 공산당 프락치의 공작에 넘어가 마오쩌둥 진영으로 투항했다. 김원봉을 비롯한 극소수 대원은 중국공산당이 "저들은 시도때도 없이 아무나 죽이는 테러리스트"라며 반대하는 바람에 낙오하게 되었다.

1941년 10월 장제스는 참모총장 허잉친(何應欽)에게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군사위원회 직할 부대로 예속시키고 참모총장이 이를 하나로 개편·통일해서 운용하라고 지시했다. 사오위린은 중국 최고지도자가 이처럼 간절하게 부탁하자 김원봉이 임정과 손잡고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게 되었다고 폭로했다. 

1945년 3월 현재 광복군 숫자는 514명. 이 가운데 중국인이 65명이고(대부분이 장교), 한국 광복군은 449명이었다. 사오위린은 한국광복군은 머리와 몸통만 있을 뿐 손발에 해당하는 사병이 모자라 합동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앞의 책, 91쪽). 중국 국민정부군을 도와 전투를 하기에는 부적합한 군대였음을 실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 정부는 항일운동에서 한국인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광복군을 후원했다.

광복군의 무기와 보급, 월급, 군복, 훈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장제스 정부가 지원했다. 그러한 지원은 공짜가 아니었다. 광복군의 작전통제권을 중국군이 차지하고, 참모장 및 각급 부대의 대장은 중국인이 맡았으며, 주요 포스트의 장교는 중국군이 차지했다. 그들은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조로 독자적인 작전이나 활동을 원천 봉쇄했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켰던 광복군을 한국 임시정부 소속으로 돌린 것은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의 일이다.

장제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창설된 광복군. 중국은 광복군의 운영비와 무장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작전지휘권 등 실권을 다 빼앗아 독자적인 행동을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장제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창설된 광복군. 중국은 광복군의 운영비와 무장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작전지휘권 등 실권을 다 빼앗아 독자적인 행동을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김구는 고매하게, 이승만은 부정적으로 묘사한 사오위린

사오위린은 임정을 관리하는 핵심 요직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김구와 친하게 지냈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김구에 대한 인물평은 극히 아름답고 고매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반면,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한 이승만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고 독설적이다. 예를 하나 소개한다.

“대한민국 개국의 최고 공로자라 할 대통령 이승만은 개성이 강하고 고집이 세어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는 상하이에 있은 지 겨우 반년 만에 복잡다기한 난장판을 만들어놓아 한국 임시정부로서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고 있는 워싱턴회의에 가서 장외 활동을 벌이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1921년 자신의 심복 임병직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되돌아갔다.”(앞의 책, 65쪽)

이 문장은 한 나라의 고위 외교관이 쓴 저술이라고 하기엔 어휘가 대단히 천박하고, 회고록의 기본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마저 엉터리로 기술하고 있어, 저자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임시정부를 난장판으로 만든 것이 이승만이라고? 이 사람 정말 제정신인가?

임시정부를 개판 친 것은 임정을 공산화하려던 이동휘, 국제연맹 위임통치론을 둘러싸고 황당무계한 논지로 이승만을 공박한 신채호 등 아나키즘 세력, 지역감정으로 범벅이 된 서북파들이다. 정작 피해를 당한 사람은 이승만인데, 이승만이 임정을 분열시킨 만악의 근원으로 기록한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사오위린이 이동휘·신채호 등의 난잡한 짓을 거론조차 하지 않고 이승만만 성토한 것은 이승만이 중국과는 아무런 연계를 맺고 있지 않아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중화의 몸통다운 발상이다.

사오위린은 또 임시정부를 난장판으로 만든 이승만이 사태를 수습할 길이 없자 미국으로 도주한 것처럼 문장을 꾸몄다. 역사적 사실을 말하면 이승만은 의열단이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상하이에 잠입하여 활동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다. 신변 안전을 위해 서양 선교사들 도움으로 필리핀으로 긴급 탈출하여 하와이로 돌아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사오위린 대사는 깊이 참고하시기 바란다.

사례에서 보듯 사오위린의 이승만 관련 기록은 시종일관 부정적이며 의도적 왜곡마저 발견된다. 1945년 1월 중순 그는 워싱턴 출장을 갔다. 이때 워싱턴 16번가 이승만 박사의 자택을 방문했다. 이 때 대화 내용을 사오위린은 회고록에 “그는 미국 국무부 관리들을 ‘비겁한 얼간이들’이라고 매도했을 뿐만 아니라, 충칭의 한국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의 오랜 노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조야가 시종일관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해 준 데 대해서도 별로 거론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앞의 책, 136쪽).

또 그의 집에서 미 국무부 관리를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으며, 미국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사절 가운데 주미 태국공사 세니 쁘라못 한 사람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 박사가 베푼 연회에서 정경한·임병직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면서 “이 박사와 미국의 각파 한국인들 간의 인간관계가 어떠한지를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고(앞의 책, 138쪽) 교묘하게 그를 비판했다.

이승만에 대해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한 사오위린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개인 차원에 그쳤다면 그나마 다행인 데, 사오위린은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그가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한국인 각파 대표들과 의견을 교환한 결과, 모두 주미 대표 이승만 박사가 완고해 단결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고 생각하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이 때문에 매월 임시정부에 기부하던 거액의 자금 지원을 중단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략) 본인이 국무부 부원들과 이승만 박사 주변의 인사들을 만난 결과, 역시 이 박사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으며, 이 박사가 한길수 등을 공산당이라고 공격하지만 사실과는 맞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앞의 책, 146~147쪽)

당시 이승만은 미 국무부 관리들과 전쟁 중이었다. 미 국무부 고위층에는 앨저 히스를 비롯한 소련 간첩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 국무부 내에 소련 간첩들의 활약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앤 코울터가 쓴 『반역』을 비롯하여 수많은 증거 자료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사오위린 대사는 꼭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런 소련 간첩들과 싸우고 투쟁한 것이 이승만의 지도자로서의 결격사유란 말인가?

진해에서 회담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장제스를 이승만 대통령이 영접하고 있다. 장제스 정부의 한국 전문가 사오위린은 중국에서 활동한 김구에 대해서는 큰 애정을 가지고 지원한 반면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이승만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기록했다.
장제스와 회담하기 위해 타이페이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장제스 정부의 한국 전문가 사오위린은 중국에서 활동한 김구에 대해서는 큰 애정을 가지고 지원한 반면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이승만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기록했다.

사오위린의 보고문에 등장하는 한길수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반이승만계 인물이었다. 소련 간첩이 우글거리던 미 국무부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한국의 민족주의 각파 사람들을 동원하여 한국통일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자들과도 협력하는 범한국 연립정권(좌우합작)을 수립하려 한 것이다. 이 작업을 지휘한 인물이 한국에 파송되어 평양 숭실전문학교 제4대 학장을 역임했던 매퀸 선교사의 장남 조지 매퀸 2세였다. 미국 정부에서 한국 전문가로 꼽혔던 조지 매퀸 2세는 안창호 계열의 친(親)흥사단, 친서북파 경향이 강해 기호파에 속하는 이승만에게 대단히 비판적인 인물이었다.

매퀸 2세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중 좌파 계열 인사들에게 관심이 지대했다. 그는 좌우합작을 추진하기 위해 한길수·김용중 같은 반이승만 성향의 인물을 집중 지원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은 한국을 공산주의에 내맡기는 것”이라면서 한국통일위원회를 와해시켰다. 사오위린은 워싱턴에서 그따위 성향의 인물들을 골라서 만나 이승만을 엿먹이는 이야기만 듣고 그대로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외교관으로서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비이성적 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대목이다.

김구에게 기밀비 20만 달러 제공한 장제스

이승만에 대한 극렬한 혐오와는 정반대로 사오위린은 자신들이 아낌없이 지원하여 자신들 말을 잘 따르는 김구와 친중 인맥에 대해서는 한없이 고상한 용어를 동원하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오위린은 일본의 항복 후 환국을 앞둔 김구에게 향후 이승만 박사와 어떻게 협력할 것이며, 또 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물었다. 김구 주석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우리는 합심 협력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그분이 대한민국 전체를 이끌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는 일”이라고 답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앞의 책, 159쪽).

이 발언을 들은 사오위린은 “겸손하고 넓은 마음을 지닌 김구 주석과 집권욕이 강한 이승만 박사는 삼국시대의 유비와 조조에 비교할 만했다”고 기록했다. 김구는 어떤 정치적 야심도 없는,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임을 부각시킨 것이다.

사오위린은 돈 문제와 관련하여 이승만을 또 한 번 공격한다. 1945년 11월 1일 장제스 주석이 충칭에서 김구를 위한 송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국민당 우톄청(吳鐵城) 비서장을 통해 김구에게 귀국 후 활동비로 미화 20만 달러를 지원했다.

중국 국민당이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1월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환국 직전 송별연을 개최했다. 왼쪽부터 펑위샹, 김구, 장제스, 쑹메이링.
중국 국민당이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1월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환국 직전 송별연을 개최했다. 왼쪽부터 펑위샹, 김구, 장제스, 쑹메이링.

사오위린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는 귀국할 때 이 돈을 가져가지 않아 중국 국고에 넣어두었다. 1947년 6월 주한 총영사 류위완(劉馭萬)이 서울에 부임하여 김구 요청에 따라 10만 달러는 한국 임정 주중 대표 복정일에게 넘겨 공무에 사용했고, 10만 달러는 류위완 총영사가 김구의 차남 김신에게 주었다.

장제스 정부 입장에서 볼 때 20만 달러는 껌값이었을지 몰라도, 국제정치학적 시각에서 보면 지극히 민감한 사안이 된다. 미국은 장제스 정부가 김구와 한국 임정을 파격적으로 지원하고, 그들이 환국할 때 돈 보따리까지 갖다 안긴 정보를 입수하고 그 저의를 심각하게 의심했다. 미국은 중국이 김구와 임정 요인을 통해 한반도에 다시 진출하려는 야욕으로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장제스는 일본이 패망하면 한반도에 중국군을 주둔시켜 전통적 사대질서의 복원을 하려 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환국시킨다.

장제스 주석이 김구에게 20만 달러 지원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의 정객들도 너도나도 비자금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중국의 당·정과 연고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달랐다고 사오위린은 말한다. 이승만이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주석으로 선출된 다음날 장 주석에게 전보를 쳐서 20만 달러를 청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충칭의 장 주석 각하. 웨이다오밍 주미대사에게 20만 달러를 미국안전신탁회사에 예금케 해서 이를 임병직 대령이 본인을 대신해서 인도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본인은 미국에서 이 돈이 급히 필요합니다. 각하께서 베풀어주신 애정을 한국인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앞의 책, 184쪽)

사오위린은 이승만이 보낸 이 전문에 대해 “이런 당돌한 전보를 받고 중국 당국도 퍽 입장이 곤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오위린은 돈 문제에 초연한 김구, 돈 문제에 관해서는 국제관계고 체면이고 따지지 않고 달려드는 이승만의 모습을 대비시켜 교묘하게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김구가 시해당한 경교장을 대사관저로 사용한 사오위린

대한민국 건국 후 장제스는 친김구 인맥의 정점에 있는 사오위린을 초대 주한 중화민국 대사로 보내기 위해 아그레망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가타부타 말 없이 6개월을 뭉갰다. 사오위린은 주한 대사로서 적절치 않다는 간접적 의사표시였다. 당시 중국은 대륙을 공산당에게 빼앗기고 대만으로 탈출한 상황이었다. 사오위린은 당돌하게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이 초대 주한 중화민국 대사로 가게 되었음을 알렸다. 국제 외교관례상 전례 없는 억지를 쓴 끝에 사오위린은 간신히 초대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하게 된다.

사오위린이 서울에 부임한 날은 1949년 7월 28일이다. 그가 사용한 대사관은 청나라 시절인 1883년, 천수당(陳樹棠)이 초대 총판조선상무 직함으로 부임하여 차지한 명동 한복판 건물이었다. 이후 조선의 상왕으로 군림한 위안스카이(袁世凱) 시절 대폭 확장하여 수도 서울 한복판의 금싸리기 땅 6,400평을 깔고 앉았다. 사오위린은 한 시절 조선의 상국(上國)으로서 조선 천하를 호령했던 추억의 장소에 돌아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오위린 대사는 김구가 시해당한 경교장을 대사관저로 사용했다. 사오위린은 김구가 시해당했던 서재를 자신의 침실로 고쳐 사용할 정도로 김구를 흠모했다.
사오위린 대사는 김구가 시해당한 경교장을 대사관저로 사용했다. 사오위린은 김구가 시해당했던 서재를 자신의 침실로 고쳐 사용할 정도로 김구를 흠모했다.

그의 부임일은 김구가 안두희에게 시해당한 지 한 달 후였다. 김구에 대한 애틋한 추억에 젖어 있던 사오위린은 한동안 김구가 생활했고, 안두희에게 시해당한 경교장을 대사관저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김구가 피살된 서재를 자신의 침실로 고쳐 사용했다. 이와 관련, 사오위린은 “그의 혼령이 꿈속에서라도 나타나 서로 만나게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남침을 개시하자 중화민국 정부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여 육군 3개 사단과 공군기 20대를 파병해 대한민국을 군사 원조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중화민국이 참전할 경우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위험이 있다면서 장제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실은 앞서도 설명했듯이 전쟁을 빙자하여 중국군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초반, 한국군은 소련제 인민군 전차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사오위린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1932년 1·28 상하이 사변 당시 중국군이 일본 전차에 맞서 술병에 휘발유를 담아 전차 사각지대로 침투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둔 사례를 설명했다. 한국군의 육탄 전차 공격 아이디어는 사오위린 대사가 제공한 셈이다.

이승만의 국립묘지 안장을 한국 정부에 건의

사오위린은 서울 철수 과정에서 중화민국 정보국 요원 한 명을 잔류시켜 적진에서의 정보 수집 임무를 맡겼다. 이 정보원은 3개월 동안 적 치하에서 암약하며 고급 정보를 캐내 비밀 루트를 통해 중화민국 대사관에게 보냈고, 이 정보가 한미 당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국제 외교 관례에 의하면 주재국 정부가 전쟁으로 수도를 떠날 경우 사전에 우방국 사절에게 알리고 각 대사관의 피난을 위한 교통수단을  제공한다. 한국 정부는 각국 대사관에 통보 없이 자신들만 탈출했고, 각국 사절에게 피난 수단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사오위린 대사는 “이는 한국 정부가 우방국 대사들을 포기한 것과 같았으며, 국제 외교에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앞의 책, 298쪽).

영국·프랑스·교황청 등 3개국 외교관은 외교관 면책특권을 믿고 서울을 탈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에게 국제 관례는 통용되지 않았다. 인민군은 3개국 대사관을 약탈하고, 외교관들을 체포하여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모욕을 준 다음 북으로 납치해 갔다. 그들을 외교관이 아닌, 전쟁 포로로 간주한 것이다.

납치된 외교관들은 압록강까지 도보로 끌려갔는데, 식사조차 공급하지 않아 ’죽음의 행진‘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 대표 패트릭 번 주교가 하창리 부근에서 사망했고, 영국 공사 두 명도 수용소에서 병사했다. 프랑스 대표는 휴전 후 석방되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과 전면전을 요구한 맥아더 장군을 하루아침에 해임했다. 맥아더의 해임을 전후하여 사오위린은 본국 정부에 사직을 청원하여 1951년 9월 한국을 떠났다. 사오위린은 1965년 1월 터키 대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하와이에 기착했다. 그는 마우나라니 요양원에 입원 중인 이승만 대통령 문안을 갔다. 병상에 누워 있는 이 박사는 수척해져 눈은 퀭했고 말도 제대로 못했다. 사오위린이 장제스 총통을 대신해 안부 인사를 전하자 그의 눈에 강렬한 빛이 감돌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오위린에게 “이 박사는 한국으로 돌아가 고국에 뼈를 묻으려 합니다. 이를 정부가 허락해 주었으면 하는데, 선생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했다.

사오위린은 “최선을 다해 이 대통령의 소망을 이뤄드리겠다”고 승낙하고 곧바로 서울로 날아가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났다. 사오위린은 정 총리에게 이승만 전 대통령의 귀국과, 그를 고국에 매장하는 일을 정부가 비준해달라교 요청했다. 정 총리는 사오위린의 뜻을 박 대통령에게 전했다. 정 총리는 사오위린이 서울을 떠나기 전 “한국 정부는 이 전 대통령이 귀국해 요양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지만, 사후 시신을 고국의 국립묘지에 매장하는 것은 허락한다고 결정했다”고 알렸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90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서거했고,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운구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건국 대통령의 사후 귀환마저 자기들 의지가 아닌, 제3국 외교관의 부탁과 권유를 받고서야 결정한 박정희와 그 정부. 우리는 그런 수준밖에 안 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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