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희 칼럼] 두고두고 기억되어야 할 6‧25전쟁 참전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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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1.06.09 11:14:21
  • 최종수정 2021.06.10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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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 16개국 가운데 그 어느 나라도 특별한 사연이나 감동적인 스토리 없는 나라는 없다. 말이 쉬워 '연합군'이지, 언어도 다르고 식습관 등 문화도 다른, 심지어 인종도 다른 열여섯 나라의 군인들이 한데 모여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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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국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정한 때는 지난해 가을이었다. 겨울이 시작되는 황량한 계절에 나는 사진 작가인 남편과 함께 취재 길에 나서기 시작했다. 기획 초기 우리 부부는 12년 전 첫 저서 작업을 시작할 때 나눴던 것과 똑같은 대화를 나눴다.

“그 옛날 이야기에 사람들이 과연 새삼스럽게 흥미를 가질까? 모두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닐까?”

물론 이 대화는 대부분의 저서를 기획할 때마다 나누는 대화였다. 대화 끝에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내리며 작업에 착수했다.

“같은 콘텐츠라도 접근 방법, 그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 구성과 문체에 따라 독자의 주목도는 달라진다. 게다가 이 주제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결론 또한 매번 똑같다. 하지만 이번 기획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절대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엄중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학자도 소설가도 아니다. 인문학 분야를, 그중 특히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쓰는 작가이다. 학자들이 이미 써놓은 ‘어렵고 재미없는’ 글들을 쉽게 풀어서 독자 앞에 조금 더 가까이 가져다 놓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책도 쉽고 재미있게 쓰려고 마음먹었다.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다치고 동료를 잃었으며 일상이 파괴되어 치명적인 고통을 당했을 참전 용사 이야기에 ‘재미’라는 말을 붙인 것은 참 송구한 일이다. 하지만 그 ‘재미’는 좁은 의미의, 낄낄거리며 웃고 마는 그런 가벼운 재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재미’는 책장을 계속 넘기게 하고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재미’는 동영상을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하는 원동력이다. 재미가 있어야 끝까지 탐독 혹은 시청한다. 그래야 내용을 알게 되고 내용을 알아야 감동이 생긴다. 감동하면 오래 기억에 남고 그런 울림 가운데서 감사의 마음도 우러나오는 것이다.

맞다. 이 작업의 최종 목표는 더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6‧25전쟁 참전국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일에 감동하며 길이길이 기억하고 두고두고 감사하게 돕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 참혹한 전쟁 이야기를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군사사를 서술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첫째, 지휘관의 시점에서 전략적으로, 군사학적으로, 작전도에 나타난 부대의 이동 경로를 주로 다루는 방법이다. 둘째는 전투원들이 들고 싸웠던 무기의 장단점 위주로 쓰는 방법이다. 마지막은 전쟁 때 군인들이 겪은 일, 그들이 보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을 중심으로 쓰는 방법이다. 그간 출간되었던 도서 등 참고 자료들을 뒤져보면 온통 전황을 기록한 것들 일색이다. 아마도 첫째, 둘째의 방법을 주로 채택한 듯했다. 군대 경험이나 군사학적 지식이 없는 내가 선택한 길은 세 번째 방법이다. 어차피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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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6·25전쟁 참전 기념비. 그 나라의 상징 동물인 스프링복의 실물 크기 동상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참전 기념비, 전적비, 전투 기념비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대개의 경우 그런 비가 서 있는 곳은 6‧25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참전했던 외국 병사들의 피가 스며 있는 그 땅에 서면 그들의 투지와 영혼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 그곳에 서면 그동안에는 하지 못했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참전국이나 장병들과 관련된 감동적인 이야기는 말 그대로 차고도 넘친다.

1950년 6월 28일 유엔이 지원군 파병을 결정하자마자 즉각 지지 의사를 밝힌 오스트레일리아의 멘지 총리는 “우리가 만일 유엔 안보리의 결정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위선자가 아니면 비겁자가 되어야 하는 역사상 전례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규모 부대보다 소규모일망정 조속한 참전이 몇 배 더 바람직할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다급한 처지에 처했는지를 헤아린 발언이었다. 그 나라의 상하 양원도 만장일치로 파병을 승인했다. 파병할 군사를 모집하는데 정규군 총수의 98%가 지원했다. 어쩔 수 없이 심사를 통해 파병 인원을 ‘뽑아야’ 했다.

뉴질랜드 의회도 만장일치로 파병을 결정했다. 그들의 신속한 파병 결정이 다른 나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했다. 뉴질랜드는 포병 대대를 새로 창설하여 파병했는데 부대 이름은 ‘케이포스’, 즉 ‘한국부대’라는 뜻이다. 파병할 병사 모집을 시작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6천 명 가까이 지원했다. 1,350명의 해군이 참전했는데 이는 뉴질랜드 해군 전 병력의 절반 정도 되는 숫자였다.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파주 설마리에서 800여 명의 병력으로 중공군 5만 명을 맞아 사흘 동안 싸웠다. 그들은 거의 전 병력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 덕분에 유엔군은 후방을 지킬 수 있었고 전멸을 피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설마리 골짜기 폐금광이 있던 동굴 안에 동료 병사들의 시신을 안치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찾아가 주변의 돌을 주워 돌탑을 쌓아 그 동굴의 입구를 막았다. 그 앞에 유엔기, 부대 표시와 함께 당시의 전투 상황을 기록한 한글, 영문 비석을 만들어 붙였는데 한글도 영국군이 썼다고 한다. 오늘날 설마리 전투 기념비가 있는 그 부근이다.

에티오피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에 침략을 당했다. 당시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천신만고 끝에 이탈리아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난 에티오피아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황제는 강한 군사들로 구성된 황실 근위대로 파병 부대를 꾸렸다. 그리고 ‘상대를 궤멸시키는 부대’라는 뜻으로 ‘강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국에 온 강뉴 부대원들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부상을 입었을 경우 낙오하여 포로로 잡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강뉴 부대원들은 부상 입은 동료를 들쳐 업고 이동했다. 에티오피아 군 중 포로가 한 명도 없는 이유이다.

귀국 후 황제는 마을 하나를 만들어 그곳에서 참전 병사들이 살 수 있게 했다. 마을 이름은 ‘한국 마을’이다. 지금도 그곳에는 100세를 바라보는 참전 용사와 그들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파병 용사들은 황제가 쫓겨나고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했을 때 남보다 더 핍박을 받았다. 황제의 명에 따라 공산주의자와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후에 받은 핍박도 사실은 우리가 지은 빚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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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설마리 전투 기념비. 영국군은 전투 중 사망한 동료의 시신을 이 기념비 너머 동굴에 안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심한 홍역을 앓은 프랑스는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몽클라르 장군은 대대 병력을 모집하였다. 중장인 그는 대대 병력을 이끌 수 없었다. 그래서 중령으로 스스로 계급을 강등하여 우리나라에 왔다. 프랑스 군이 양평의 지평리 전투 등에서 보여준 활약은 짧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당시 용맹함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터키군은 포로로 잡힌 264명 중 단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포로수용소에서 중공군은 포로들에게 아무런 계급장이 달려 있지 않은 똑같은 옷을 입혔다. 계급이 없어지니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힘이 지배하게 되었다. 식사는 늘 부족하게 주기 때문에 힘센 자가 주로 먹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굶었다.

그런데 터키군은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다녔고 아침, 저녁으로 자체 점호를 했다. 자발적으로 계급을 존중하고, 자신들이 만든 교육 프로그램으로 운동하고, 씨름하고, 놀이도 했다. 식사는 대위의 지휘하에 음식을 공평하게 나눴다.

참전 16개국 그 어느 나라도 특별한 사연이나 감동적인 스토리 없는 나라는 없다. 말이 쉬워 연합군이지 언어도 다르고 식습관 등 문화도 다른, 심지어 인종도 다른 열여섯 나라의 군인들이 한데 모여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

어떤 나라든 참전 병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와 “조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그들은 싸웠다. 참전의 결과 그 나라에 이익이 돌아갔을 수도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 이익을 바라고 파병을 결정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위정자나 고위 간부들의 생각이다. 일선에서 적과 직접 마주쳐 몸으로 부대끼는 장병들의 머릿속에는 ‘조국의 명예’를 위한 일념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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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참전 기념비.

이 작업은 아직 취재 단계에 있다. 그런데도 이 주제에 대해 방송과 강의, 원고 집필 요청이 몰려들고 있다. 6월이 호국 보훈의 달이기 때문에 생기는 반짝 관심이 아니길 바란다. 생각해보면 1년 열두 달 6‧25전쟁과 관련된 기념일이 없는 달이 없다. 1월은 1‧4후퇴, 2월은 지평리 전투, 3월은 서울 재수복, 4월은 가평 전투, 5월은 중공군 춘계 공세 방어, 6월은 6‧25발발, 7월은 정전협정 체결, 8월은 다부동 전투, 9월은 인천상륙작전과 9‧28수복, 10월은 3.8선 돌파, 11월은 장진호 전투, 12월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흥남 철수 작전에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야 한다.

내가 여기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아직 발간은커녕 집필도 끝나지 않은 책을 홍보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6‧25전쟁 참전 용사들의 휴먼 스토리가 널리 알려지고 기억되기 바란다. 또 그 휴먼 스토리의 수혜자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고 그들에게 우리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되기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손 빠른 작가가 참전국 활동을 중심으로 소설을 써서 출간하기를, 그리고 그 고마운 사람들 이야기를 어떤 발 빠른 감독이 영화로 만들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한국 영화 〈연평해전〉(2015)이나 〈인천상륙작전〉(2016) 혹은 터키 영화 〈아일라〉(2017)처럼 우리 국민의 가슴에 짙은 인상을 남기기를 더욱 간절히 기대한다.

명나라 때 나관중이 지은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천 년 전의 일을 담은 ‘전쟁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에게 재미와 함께 감동의 메시지를 준다.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 즉 인류의 보편적 정서를 가득 담고 있는 덕분이다. 이게 바로 고전의 힘이다. 나는 6‧25전쟁 참전 용사들의 이야기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못지 않은 방대한 휴먼 스토리라고 확신한다. 이제 그 감동적인 스토리가 부족한 나를 비롯하여 더 많은 사람의 손으로 기록되어 고전으로 길이길이 남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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