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 눈에 비친 한국전쟁.2021.06.25(사진=연합뉴스)
종군기자 눈에 비친 한국전쟁.2021.06.25(사진=연합뉴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이 25일 71주년을 맞이했지만, 돌아오지 못한 국군용사들의 존재가 잊혀지는 모양새다. 바로 '국군포로'에 대한 이야기다.

71년 전 20대의 꽃다운 나이로 북한에 맞서 나라를 지킨 그들이지만, 북한에 억류됨에 따라 무려 7만여 명의 국군용사들이 지금까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4년 조창호(故) 소위를 시작으로 북한에서 자력 탈출한 극소수의 국군용사들이 우리나라도 돌아왔지만, 지난 5일부로 이들 중 생존한 인사는 18명에 불과하다.

기자는 이날 북한에서 47년만에 자력 탈출해 귀환한 유영복(92) 씨를 수도권 도심지 외곽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강원도 김화 전투에서 육군 제5사단 28연대 소속으로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그는, 2000년 8월 北 두만강을 넘었다.

기자는 지난 5일 국군귀환용사 유영복 씨를 통해 그의 귀환 신고 사진을 확인했다. 2021.06.19(사진편집=조주형 기자)
기자는 지난 5일 국군귀환용사 유영복 씨를 통해 그의 귀환 신고 사진을 확인했다. 2021.06.19(사진편집=조주형 기자)

2년 전인 2019년 중순에 만났을 당시보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지만, 그럼에도 유 씨는 이날 "지난 날 북한으로 억류됐을 때 곁에 있던 전우(戰友)들의 얼굴이 생생하다"라며 "그 때 함께 꼭 살아서 돌아가자고 했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같은 마음과는 다르게, 지난 6일 제66회 현충일 정부 행사에 초청받지 못했다. 71년 전 나라를 위해 싸우다 47년의 청춘을 주적(主敵)인 북한군에게 빼앗겼지만 문재인 정부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유 씨는 이날 찾아온 기자의 손을 붙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는 "잊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찾아올 줄 몰랐다"라며 "이제 내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국방부나 전쟁기념관 등에 6.25 전쟁 때 싸웠던 존재인 '국군포로'에 대해 조그마한 기념비라도 마련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이를 '돌아오지 못한 국군 포로들의 존재를 잊지 말아달라'는 통한(痛恨)의 외침이라고 봤다.

이에 펜앤드마이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의 이야기를 귀환용사 유영복 씨를 통해 소개한다. 장장 6시간에 걸친 그와의 이야기 중 일부는 앞서 2편으로 나눠 알린 바 있다. 그의 이야기가 사료(史料)로서 남을 것으로 본다.

국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군에 잡혀 50년 동안 억류됐다 생환한 유영복 국군귀환용사회장.(사진=연합뉴스)
국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군에 잡혀 50년 동안 억류됐다 생환한 유영복 국군귀환용사회장.(사진=연합뉴스)

#1."전쟁기념관 속 작은 한 켠에라도 '국군포로가 있었다'라는 흔적, 남겨달라"

-현충일(2021년 6월6일)에는 어디 가시지 않습니까?
▲ 이전 같았으면 초청장이 오는데, 금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라도 그렇고. 연세가 많으니까 왠만해선 초청을 안합니다.

-그래도 국방부에서 예우나, 보훈 차원에서의 귀빈 활동 등이 있을텐데요?
▲ 모든건 국방부가 하지만...아, 돌아가시면 장례식 때 입는 수의. 그건 이미 배달돼 있습니다. 우리 인사들이 사망하면 국가가 기본적으로 하지. 비용이나 이런건 몽땅 국방부가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그런 차원(국방부)에서 예우는 하지만...아, 물망초재단(이사장 박선영) 같은 사단법인에선 영정사진도 만들어서 하고.

- 회장님은 귀환하셨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많은데요. 나라를 위해 희생했는데, 국방부에서 기념비라던가 이런 이야기는 없는지?
▲ 전쟁기념관에 이런 기념비 등에 대해서요? 이미 제기했습니다. '국군포로가 북한에 억류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또 실제로 국군포로였던 용사들이 우리나라로 넘어왔고요. 지금 국군포로들을 포함한 100여 명의 가족들이 이미 한국에 와 있잖아요? 미망인 등이 넘어와 있으니까 있는거죠. 국군포로가 실제로 몇 명이나 살아 있는지는 몰라도, 그러니까 데려오지는 못하더라도 거기서 죽은 포로들을 위해 추모탑 만이라도 현충원에 세우면 안되느냐고 제가 제기했었는데 실현이 안됐습니다.

기자는 지난 5일 국군귀환용사 유영복 씨를 그의 자택에서 직접 만났다.2021.06.19(사진편집=조주형 기자)
기자는 지난 5일 국군귀환용사 유영복 씨를 그의 자택에서 직접 만났다.2021.06.19(사진편집=조주형 기자)

- 아직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요?
▲ 조 기자, 내가 선생한테도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어서 잘 아실 겁니다. 이렇게 (국군포로 송환 문제가)알려진 이상, 전쟁기념관에도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의 존재를 알리는, 그런 칸이라도 만들어 달라고하는 겁니다. 지난해, 국군용사들이 북한에 많이 억류돼 있다는 사실을 증언도 했고, 그래서 작은 칸을 만들어 국군포로들의 존재를 모르는 후세들에게, 지난 6.25전쟁 때 우리 국군포로들이 억울하게 억류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교육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정부가 실천을 안하잖아요? 그런데 어찌 강요를 하고 그러겠어요? 저도 그때 (기자가)오시기 전에 말했던가...국회에 가서 증언했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렇게 말을 했어도 진보 정권에서는 참...예전 몇년 전 현충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초대해서 갔습니다. 그 때 문재인 대통령 하고 같이 찍은, 그 사진입니다. 근데 지금 조용히 있잖아요? 정부가 나서서 뭔가 하겠다고 언급을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겨우 그저 뭔가 좀 하려나 하는 거지, 부담스러운지 이제는 아예 조용해요. 그런데 나 혼자 나서서 뭘하겠소, 기자 선생? 그저 가만히 있는거죠. 근데, 조 기자는 다른 국군포로 용사분들 만나본 적이 있는가?

- 회장님,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동안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겁니까?
▲ 그게 말이오, 조 기자. 내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에는 미국에 가라 이런 말도 있었어요. 얼굴 내밀고 그러면(언론 노출) 북한의 남겨진 친척들이 영향을 받는다 이런거지. 나도 그럭저럭 지냈는데...억울해. 북한에 내가 뭐 잘 못한 게 뭐 있겠어? 그리고 내가 북한에 대해서 아예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이제, 실명을 공개하기도 했고요. 북한도 알어야지 알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미련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남겨진 가족도 있고 그래서 나서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없어요. 또 나서서 시원하게 뭘 그러는 분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나는 이왕나선 일이고 하니까, 부족하지만 찾아오시는 분들 만나면...언론에 기사를 내야겠다고 나서시는 분들이니까, 얼마나 고마운 분들입니까. 내가 못하는 것을 언론이 찾아주시는데, 그래서 나는 그런 의미에서 반갑게 기자선생님들 맞아들이고 이에 따라 언론에 공개되는 북한의 실태, 국군포로의 실태를 사실 그대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이제는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을까...국군 포로분들 모두 다 돌아가셨을텐데...지금 북한에 몇 명이나 남아 계시겠습니까. 이제는...어떻게 생각하시오, 기자 선생?

21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사단법인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법원 출석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이 탈북 국군포로 2명을 대리해 북한 김정은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이날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2019.6.21(사진=연합뉴스)
21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사단법인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법원 출석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이 탈북 국군포로 2명을 대리해 북한 김정은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이날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2019.6.21(사진=연합뉴스)

#2. 나라 지키다 돌아오지 못한 7만명의 국군 용사들···"부디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

지난 2014년 정부(통일부-통일연구원)가 발간한 '2014 유엔 인권이사회 북한인권 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6.25 전쟁 정전 당시 약 8만2천명의 국군용사들의 존재가 공백으로 남았는데, 그들 중 약 7만명이 국군포로(prisoners of war: POW)로 북한에 의해 억류당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北 김일성이 억류한 한국군인으로는, 남한이나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2만7천명의 국군포로도 있다'라는 말과 함께 '북한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한 사령관 펑더화이(팽덕회·彭德懷)는 중국군이 전쟁에 참전해 4만 명의 한국 국군포로를 데려갔다고 밝혔다'라고 적시했다.

하지만 1953년 7월27일 6.25전쟁이 정전협정을 맞게되자, 1953년 4월과 1954년 1월 사이 한국으로 송환된 국군포로는 8천343명에 불과하다. 즉, 최소 5만 명의 국군포로가 우리나라로 송환되지 못했다는 점과 500명의 생존자들이 아직 북한에 억류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게 우리 정부 판단인 셈이다.

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중사 안장식에서 박찬주 육군참모차장이 헌화하고서 경례하고 있다. 고인은 6·25 전쟁 때 국군포로로 끌려가 1984년 북한에서 숨졌다. 손씨의 딸인 손명화 씨는 2005년 탈북한 뒤 아버지 유해의 국내 송환을 위해 노력하다 2013년 가까스로 유해를 찾아왔다. 2015.7.4(사진=연합뉴스)
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중사 안장식에서 박찬주 육군참모차장이 헌화하고서 경례하고 있다. 고인은 6·25 전쟁 때 국군포로로 끌려가 1984년 북한에서 숨졌다. 손씨의 딸인 손명화 씨는 2005년 탈북한 뒤 아버지 유해의 국내 송환을 위해 노력하다 2013년 가까스로 유해를 찾아왔다. 2015.7.4(사진=연합뉴스)

지난 24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조태용 의원은 '국군포로 송환'에 대해 "지금 당장 시작해도 한참 늦은 만큼, 빠른 시일 내 책임을 다하는 게 정부의 도리"라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5일 기준으로 생존 중인 국군귀환용사들은 18명이다. 유영복 국군귀환용사회장은 그들 중 한명으로, 정전을 코앞에 둔 지난 1953년 6월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북한군에 붙잡히게 됐다. 47년이 지난 2000년 8월 그는 돌아왔고, 그해 10월 육군 제5사단 사령부 앞에서 "사단장께 ‘유영복 9395049 전역을 신고합니다!"라며 귀환 신고를 마칠 수 있었다.

유 씨는 이날 기자에게 귀환 신고 후 자신의 일상이 담겼던 여러 사진들을 꺼내어 보여줬다. 그의 집 현관에서 실외로 나서던 순간 신발도 신지 않고 나온 그는 "잊지 않고 찾아와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라며 기자를 배웅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취재를 종합하면, 71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은 여전히 수만 명에 달한다. 흔히 쓰는 문구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구호가 왜 이들의 여한(餘恨)을 비껴가고 있는지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 강제 노역을 했던 한모(가운데)씨와 사단법인 물망초 등 소송대리인 및 관계자들이 7일 오후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뒤 기뻐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한 씨 등이 북한과 김 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한씨와 노씨에게 각각 2천1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그의 옆에는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전 회장과 박선영 물망초재단 이사장.2020.7.7(사진=연합뉴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 강제 노역을 했던 한모(가운데)씨와 사단법인 물망초 등 소송대리인 및 관계자들이 7일 오후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뒤 기뻐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한 씨 등이 북한과 김 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한씨와 노씨에게 각각 2천1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그의 옆에는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전 회장과 박선영 물망초재단 이사장.2020.7.7(사진=연합뉴스)

 

조주형 기자 chamsae9988@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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