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주목한다] 이승만 카리스마 통치의 명암(明暗)을 파헤친 역작
[이 책을 주목한다] 이승만 카리스마 통치의 명암(明暗)을 파헤친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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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선의 『카리스마의 탄생』은 모든 것이 부족했던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승만 일대기

빌레펠트 음모론(Bielefeld-Verschwörung)이란 것이 있다. “우리는 빌레펠트에서 온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빌레펠트에 다녀온 경험도 없으니, 그런 도시는 세상에 없다”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빌레펠트는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실존하는, 13세기에 건설된 인구 34만 명의 도시다.

“빌레펠트가 없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유행하자 빌레펠트 시당국은 “빌레펠트가 실존하지 않는 도시라는 걸 증명하는 사람에게 100만 유로(우리 돈으로 13억 3천만 원)를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인간은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만을 믿으려 한다. 이것이 역사 분야에서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루소는 이미 오래 전에 쓴 자신의 저작 『에밀』에서 역사 서술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역사 서술은 결코 우리에게 현실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충실히 모사해주지 않는다. 현실의 사실들은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그 형태를 바꾸고, 그의 관심에 맞도록 변화하며, 그의 선입견에 의해 특수한 색채를 띠게 된다. 발생 무렵 사건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그 무대가 되는 장소에 정확히 가 볼 수 있게 하는 기술에 도대체 누가 정통할 수 있겠는가?”

 

이승만 대통령 평전인 『카리스마의 탄생』
이승만 대통령 평전인 『카리스마의 탄생』

인터넷 온라인 시대가 고도화되면서 확증편향(確證偏向·Confirmation bias)이 무섭게 퍼져나가고 있다. 확증편향이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다. 흔히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의미이고, 한자로는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이승만이란 인물에 대한 접근방식을 분석해보면 확증편향이란 단어가 썩 어울린다. 이승만의 거대한 생에에서 자기 편한대로,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화되다시피 했다. 때문에 이승만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문명사적 차원에서, 역사철학적 의미까지를 분석해내는 일은 참으로 어렵게 되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이승만 연구서가 탄생되었다. 충남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연구원 이택선 박사의 이승만 평전이다. 『카리스마의 탄생』이란 제목 아래 ‘한국 현대사 빅뱅의 순간 우리의 지도자’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고민해온 ‘빌레펠트 음모론’이나, ‘확증편향’, 루소의 ‘역사 서술의 어려움’이란 고민의 벽을 훌쩍 뛰어넘는 저작이다.

권력의지

이 책의 내용에 돌입하기 앞서 고민해야 할 점은 정치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근본 없는 편견이다.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정치인들이 가진 권력욕을 비난하는 데 익숙하다. 이승만에 대한 격한 공격, 박정희와 전두환의 쿠데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면에는 이들이 보인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욕구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했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인에게 권력욕이 없으면, 그것은 시체나 다름없다. 권력욕은 정치인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란 사실을 현실로 이해하지 못하면, 정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부르스 커밍스 같은 학자는 정치가에게 권력이 없다면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권력의 추구야말로 정치적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브루스 커밍스, 「신의 고마움을 모르는」, 강원택 외 지음, 『김대중을 생각한다』, 삼인, 2011).

신룡은 정치학의 입장에서 김구는 이승만에 비해 권력 의지가 부족했으며, 국가수반에게 권력의지가 없다는 것은 흠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신복룡, 『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 지식산업사, 2017, 110쪽). 이승만은 권력에 대해 동물적일 정도로 강렬한 의지를 가졌던 인물이다. 이것이 흠이라면 정치의 ABC를 모르는 무식의 대폭발이다.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했기에 그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그것의 유지·보존을 위해 수많은 정적들과 싸워 이겼다.

이승만이 살았던 1875년부터 1965년까지의 시대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패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였다. 난세를 돌파할 능력이 있는 초인(超人)이나 거인이라면 몰라도, 그러한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줄이라도 잘 서야 생존이 담보된다. 한 개인도 이런 상황인데, 국가나 민족이라면 더 말해 뭐하겠는가.

복음주의 기독교가 담고 있는 정신

서세동점의 격렬한 운동에너지가 허리케인처럼 몰아치는 제국주의 격랑의 한복판에서 거의 모든 지도부 인사들이 “우리가 살길은 러시아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확증편향 아래 대륙지향의 행보를 거듭할 때 오직 한 사람, 이승만은 “우리의 살 길은 미국과 손잡는 것”이라고 외친 광야의 선지자였다.

그가 발견한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자 공화제, 민주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미국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1885년 조선에 파송된 서양 선교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미국인이었다. 그들은 복음주의 개신교(Evangelical Protestantism)라는 미국적 기독교를 조선에 전파한다.

칼뱅주의와 복음주의가 혼합된 것이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다. 미국 특유의 개신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종교 안에 체화하고 있었다. 사실 미국인들에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는 동일한 개념이었다. 기독교의 정치적 표현이 지유개인주의,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주의였기 때문이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친미기독교파III-1』, H프레스, 2020』, 844쪽).

책의 저자 이택선 박사.
책의 저자 이택선 박사.

조선에 파송된 기독교 선교사들은 추상적인 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일상을 개혁하는 데 뛰어든다. 선교사들은 단순히 기독교만 전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져온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혁명의 불씨였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불씨, 민주주의와 인권, 개인의 자유라는 사상과 이념의 불씨, 그리고 근대라는 문명의 불씨였다. 그들이 가져온 혁명의 불씨가 발화하면서 전근대 봉건의 질서가 깊이 뿌리박혀 있던 이 나라에 변혁의 기운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저자 이택선은 이승만이 고종을 “4,200년 동안 내려온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한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절하하고 그와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절대황제권 시대에 황제의 부름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한 혁명가적 기질이 이승만의 사고체계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미국과 같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이승만의 노력은 영어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고, 이것이 그의 미국 밀사 파견으로 연결된다. 미국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할 정도의 논리력과 서양 문명에 대한 식견을 갖춘 인물은 이승만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자신의 배재학당 스승인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존 헤이 미 국무장관을 비롯하여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록펠러와 함께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업한 세계적 기업인 세브란스 등을 면담했고, 미국 언론들과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의 정책은 이미 일본과 손잡고 조선의 독립 따위에는 관심을 거둔 상황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나라라 해도, 속마음을 내줄 정도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철학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어느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외고집의 길이었다. 로버트 올리버는 그런 이승만의 성격을 ‘불후의 고집불통’이라 표현했고, 이 책의 저자 이택선은 ‘카리스마의 탄생’으로 정의했다. 그의 외고집의 길은 세계정세를 오판한 독립운동가들과 타협할 수 없고, 시대착오적이며 현실 불가능한 무장투쟁론자들과의 싸움이었으며, 독립은 다 틀렸으니 적당히 즐기려는 사람들을 향한 채찍이었다.

이승만 카리스마

저자 이택선은 1927년 1월 7일 이승만에게 보낸 윤치영의 편지를 소개한다. 윤치영은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이승만을 나폴레옹, 무솔리니, 케말 파샤 등에 견주면서 “집정권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권고했다. 이승만의 성격은 스스로 자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여 한국인 중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고, 누그든지 자신에게 복종하고 따르면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했다. 동시에 그는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완고하여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적으로 간주한 사람에게는 복수심이 강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카리스마’는 이승만의 이후의 행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성향이다. 막스 베버는 카리스마란 타인과 차별화되는 개인 성격의 자질,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타고난 매력이라고 정의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강한 확신과 높은 에너지, 열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승만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이 가진 카리스마가 긍정적으로 작동할 때는 불굴의 투지로 독립운동을 이끄는 기관차가 되지만, 다른 쪽으로 작동할 경우 독선·만기친람·제왕적 권위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그가 후에 헌법을 개정하여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없애고 나이 8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4선 대통령에 출마, 당선된 것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대체할 만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 부재 상태에 직면한 한국 정치사의 아이러니이자 파라독스가 아니었을까.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외교독립활동에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머지않아 태평양을 둘러싸고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여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점이다. 이택선의 연구에 의하면 이승만은 1933년 1월부터 일본의 팽창을 경고했다. 1933년 1월 13일 일기에서 이승만은 제네바 주재 미국영사에게 “강대국들은 일본이 한국을 머잇감으로 삼은 데 만족하고 만주에서 개방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조만간 만주를 먹어치울 것이며, 이마저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한 이승만의 『일본내막기』 표지. 이 책이 발간된 지 4개월 후 일본은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한 이승만의 『일본내막기』 표지. 이 책이 발간된 지 4개월 후 일본은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처방전은 국동의 평화를 실현하고 국제연맹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강대국들이 함께 모여 일본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1941년 8월 1일, 뉴욕의 플레밍 H. 레벨 사를 통해 발간한 책이 『일본내막기: 오늘의 도전』이다.

이승만의 예언은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941년 12월,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를 공습하여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현실화되었다. 때가 왔으니 이승만은 발 빠르게 움직인다. 이승만이 바라본 세계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미국 세계정책의 핵심은 지구상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유한 식민지를 독립시켜 상호 교류 통상하는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으로 상징하듯, 주변국들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미국과 일본의 가치관이 완연히 다르므로, 양국은 태평양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 예언

전쟁이 벌어지면 차세대 문명의 에너지인 석유를 다량 보유한 미국이 그것을 보유하지 못한 일본을 제압하고 승리할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일본의 전쟁수행 과정에 물자와 병력, 돈을 제공하는 공범이 된다. 따라서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는 친한파를 많이 만들어 일본이 패망하는 날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분리시켜 독립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미국 내에서 자신과 뜻이 통하는 인사들을 규합하여 기독교인친한회, 한미협회를 조직하여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카이로 선언에서 국제사회로부터 한국의 독립 약속 보장을 받아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운동을 벌인다. 1944년 3월에는 모교인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정치론을 강의하는 슬라이(John Sly) 교수에게 해방 후 대한민국의 헌법과 선거방식, 행정 전반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또 프린스턴대학교과 한국의 기술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협의했는데, 이때도 슬라이 교수의 도움이 컸다.

한국의 독립은 이승만의 구상대로 실현되었고, 일본이 항복하자 연합국 수뇌들은 카이로선언에서 약속한대로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분리 독립시켜준다. 한국의 해방과 독립은 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 만주 항일무장투쟁가들의 무장투쟁 덕분이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이 일본을 항복시켜 얻어낸 것이다.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반소·반공 노선은 공산주의 친화적이고, 소련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국민들의 뜻과는 다른 길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들을 도운 것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뿐이었다는 현실 인식이 친소·친공의 모티프를 형성한 것이다.

해방 공간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이뤄낸 것은 미군정의 좌우합작 노선과는 명백히 다른 길이었다. 한반도의 남쪽, 절반만이라도 빨리 정부를 구성하여 제 목소리를 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이승만의 불굴의 의지, 다시말하면 카리스마적 에너지가 미국의 정책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좌우합작, 남북통일정부 수립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정책이 이미 트루먼 선언을 통해 ‘공산주의 봉쇄’로 돌아서면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냉전이 선포된 마당에 공산주의와의 협의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최장집은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려 정치적 지도자가 긴급 상황(즉 네체시타)에 부응하여 결단적 행위를 밀고 나아가는 비르투(정치질서의 원동력)의 발현이라고 평가한다. 다시 말하면 이승만은 당시 정치인들 중 냉전의 전개와 그로 인한 분단의 불가피성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 판단 아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추진하여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이택선은 결론적으로 이승만의 행동은 냉전의 전개로 세계가 자유민주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나뉘는 가운데 남한 사회를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편입시키는 진보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한다.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지도자

이승만은 인생 과정에서 무수한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자신이 확신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의 동지였던 미국과 소련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좌우합작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도 그는 외로이 반공·반소를 외쳤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반응 일색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미소 냉전이 시작되었고, 끝내 적이 되었다. 그와 함께 찾아온 기회를 이승만은 놓치지 않고 대한민국 건국으로 연결했고,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부족한 취약국가(Vulnerable state)였다. 국가건설에 필요한 물적, 인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은 민족국구, 민주공화국을 표망하며 만들어졌지만,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으식에 시달린다. 이택선은 그 결과 대한민국은 좌파와 북한의 공작에 맞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과도한 민족주의 ‘오버액선’을 남발했다고 분석한다. 성급하고 충동적인 국가의 폭력 사용은 상당수 국민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국가 밖에 ‘민족’이 존재하는 상황이 구조화되었으며, 이 문제는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 이택선의 분석이다.

이택선은 이승만은 타인의 생각이나 기대에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자기 지향형 인간’이었다고 한다. 일상 업무에서도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해 그는 아내를 제외한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잘 듣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김성수는 이승만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표현했겠는가.

이승만은 자신이 확신한 일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고, 그를 흠모했던 많은 정치인들이 기대하는 그런 포용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덕분에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적으로 돌변했다. 신익희가 그랬고, 조병옥이 그랬으며 장면·윤보선·조봉암이 같은 길을 걸었다.

저자 이택선은 이승만은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상하이 임정 초대 대통령에서 탄핵을 당했고, 해방 직후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수많은 지지자가 자신의 곁을 떠났으며, 이승만과 손잡았던 한민당이 미군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가담하기 위해 그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기 때마다 이승만을 구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 스스로의 신념에 대한 확신뿐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사람을 믿기보다 더 큰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으니 불행한 사람이었다는 분석이다.

정치학자 신복룡은 미국 측 문서를 통해 이승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은 정적과의 타협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만 생각했지 자신이 남들과 더불어 일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한국인은 그의 직책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신복룡, 앞의 책, 94쪽)

이승만은 환국 직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대동단결론을 앞세워 정치세력을 하나로 묶어내려 했으나 통합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성격상 흠결도 문제였지만, 애초에 통합이니 단결이니 하는 덕목은 조선 500년 붕당정치와 세도정치의 세파로 인해 도륙을 당하고 만 한국적 특수상황도 큰 책임을 져야 한다. 또, 무시무시한 한국의 지역감정도 한국인들의 통합을 저해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외교의 달인

해방이 된 후에도 이러한 당파성, 지역색은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선거에서마저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파에 80~90%가 넘는 몰표가 쏟아지는 이 기현상을 지구상에서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다른 나라에서 비근한 예를 찾을 수 있을까? 21세기 중반을 향한 현시점까지 한국의 정치판은 씨족사회적 원시성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통합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책임을 이승만의 독특한 개인적 성격에서 찾는 것의 무망함을 경고하는 사이렌이다. 저자 이택선은 이런 한국적 특수상황을 도외시하고, 그 모든 책임을 이승만의 개인적 성격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칼날을 맞아도 억울함은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무수한 도전이 제기될 때마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불후의 고집불통’ 성격으로 돌파해 나갔다. 모든 사람이 좌우합작, 남북통일정부 수립의 미몽에서 헤맬 때 외로이 단독정부 수립을 외칠 때, 부산 정치파동 당시 미국에 매수된 철부지 정치세력들이 미국의 장단에 놀아나 자신을 실각시키려 할 때,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고 엉터리 휴전을 추진하려 할 때 이승만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심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고 말겠다는 공명심을 작동시켰다.

모든 것이 부족한 취약국가, 분단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미국과 힘든 협상을 통해 얻을 것은 얻어내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는 외교의 달인이었다. 스티븐 진우 김은 이승만이 미국을 향해 자신을 “상대하기 어려우며 변덕이 심할 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예측 불가능한, 호전적인, 권위적인, 끊임없이 상대방을 귀찮게 하는” 인물로 각인시킴으로써 미국 정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다.

이승만은 한반도가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라는 점을 잘 이용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봉쇄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미국은 그로 인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고,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소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승만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고야 만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이승만과의 협상을 “인류 역사상 열강의 국무장관이 약소국의 지도자를 만나 자국의 정책을 약소국의 정책에 맞출 목적으로 지구를 돌아 여행한 사례는 이것이 처음이다”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그는 이승만에게 “역사적으로 미국은 귀하에게 제공한 정도의 것을 어느 국가에도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실토해야 했다.

1953년 한국의 GDP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비슷했다. 지하자원도 부족했고, 훈련된 고급 인재도, 축적된 자본도, 인프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쥐고 흔들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미국에 제공한 것은 “우리는 휴전에 반대하지 않겠다”라는 종이쪼가리 한 장이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지금 무지막지한 비이성적 용어를 동원해 “분단의 원흉”, “친일파 매국노”, “미국의 앞잡이”, “런승만”이라고 모욕하고 저주하고 있다.

이승만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놀라운 감각으로 인지하고 높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를 돌파하는 외교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국내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는 스스로 사건을 만들어내는 변혁의 리더십으로 정면 돌파했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은 6·25 전쟁에 지쳤고, 이승만의 노력으로 맺어진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국가안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이승만의 독선에 지친 국민들은 국가발전의 다음 단계, 즉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는 지도자를 찾기 시작한다.

볼리바르와 비슷한 길 걸은 이승만

저자 이택선은 이승만은 타고난 자질과 부지런함, 국제정치에 대한 안목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권모술수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있어 한국이 처한 험난한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최고의 지도자였다고 평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결정해야 안심이 되고, 약간의 권력을 나누는 데도 인색한 권력 지향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이승만에게 실망한 추종자들은 강력한 비판자로 변모했다.

이러한 배신의 경험으로 인한 외로움을 이승만은 이기붕과 그 가족에 대한 총애로 표출했다는 것이 이택선의 주장이다. 이승만에게 자신의 신념은 건전하고 틀림없이 옳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고집이 결국엔 측근에 대한 그릇된 믿음과 기용을 통해 자신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허물었지만, 그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이승만에게 보여주었던 숭배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4·19를 끝으로 그의 카리스마적 권위와 이상,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이승만은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와 유사한 길을 걸었다.
이승만은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와 유사한 길을 걸었다.

저자 이택선은 이승만이 미국의 독립영웅 워싱턴의 길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인 시몬 볼리바르와 유사한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 볼리바르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진 독립의 영웅이지만, 결국 모두에게 추앙받는 영웅으로 남지 못하고 해외에서 생을 마감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적대자와 희생자가 신처럼 존재하는 가운데 그 자신이 독재자로 전락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 했는데, 이러한 그의 인생 궤적은 이승만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적으로 지금 이 순간은 미중 패권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패권 향방에 따라 우리 사회의 일부 세력은 다른 문명권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승만이 청년 시절 발견한 미국의 가치, 해양문명으로의 대전환이란 견고했던 아성이 무너지고 다시 대륙 문명으로 회귀해야 하는 상황이 곧 닥칠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우리 사회는 편이 갈려 대립하고 있다. 과연 이승만이 토대를 다진 미국과의 동맹체제가 위협을 받을 만큼 중국은 강한 상대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에 앞서,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세기를 예견하고 미국의 가치를 발견하여 한국을 해양문명으로 전환시킨 선각자의 혜안과 선견지명에 고마움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이 부족했던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이승만은 개인의 카리스마를 동원했다. 정상적인 통치를 하기에는 자원도 인재도, 기술도, 자본도, 무엇보다 확실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 세력이 부재했다. 그러한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의 학부를 나온 초인(超人)의 만기친람형 카리스마 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나라의 행운이자 비극이었다. 그러한 비정상적 통치를 통해 대한민국은 생존했고, 그 결과 이승만은 ‘독재자’로 몰락했다. 이택선 박사의 『카리스마의 탄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울림은 그래서 깊고 무겁게 다가온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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