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칼럼]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우정을 간직하기 어려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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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1.07.16 08:47:20
  • 최종수정 2021.07.1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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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은 정치적 선택이 다르면 우정을 간직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정치란 아마도 너무나 심각하고 비극적인 것이어서 우정은 그 압력을 감당하기 어려운 가 봅니다.”

정확히 지금 우리 사회를 말하는 줄 알았다. 우리 옆의 누군가가 늘 하는 이야기 아닌가. 좌우로 갈라져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이질적인 두 국민이 같은 땅 위에서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이상한 나라, 친구 사이는 물론 한 집안에서도 생각이 달라 서로 반목하는 나라, 바로 우리 한국의 이야기다.

놀랍게도 이것은 프랑스의 자유주의 철학자 레이몽 아롱이 한 말이다. 그의 책을 다시 번역하며 이 구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프랑스도 겪었으며, 이념의 대립은 다른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일 정도로 강렬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기 때문이다. 하기는 레이몽 아롱은 일찍이 1940년대에 정치적 견해 차이로 고등사범 동기동창인 사르트르와 결별하여 평생 말도 않고 지내다가 노년에 이르러서야 베트남 보트피풀 지원 켐페인을 위해 기자회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68세대의 재평가를 받은 레이몽 아롱

전후(戰後) 최초로 좌파 정권인 미테랑 정부가 들어선 80년대 초, 한국에서는 386 세대가 대학생이던 시절, 언론인이자 역사가,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레이몽 아롱이 프랑스의 지식인 사회에서,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롭게 각광 받기 시작했다. 한 지식인이 청년 세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왜 대단한 뉴스가 되는가, 라는 의문은 프랑스 고유의 지적 풍토에서 찾을 수 있다.프랑스는 이상하게도 정권은 늘 우파 보수 정권이면서 지식계는 좌파가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회다. 좌파가 지배하는 프랑스에서 우파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 지식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런 나라에서 냉전시대 이래 근 30년 동안 우익이라는 낙인이 찍혀 지적 주류에서 밀려나 있던 레이몽 아롱이 갑자기 68세대(1968년 5월 혁명 당시에 20대 초반이었던 세대)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견 사회당의 집권과도 모순되는 듯한 기이한 현상이었다. 68세대는 과거에 레이몽 아롱에게 주저 없이 ‘반동’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를 최대의 적으로 생각했던 세대였다.

그런데 1975년을 전후하여 갑자기 이 세대가 마르크시즘의 한계, 소련의 죄악, 인권 문제에 눈을 뜨고, 마르크시즘과 좌익 사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덩달아 레이몽 아롱의 사상도 새롭게 부각되었다. 마르크시즘이 갖고 있는 기독교적 메시아니즘, 소비에트 및 스탈린주의의 전체주의적 성격 등에 대한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관되게 지지하던 역사에 대한 상대주의적 개념도 새롭게 평가되었다.

언론도 발 빠르게 이 동향에 부응하여, 프랑스 제2 텔레비전 방송은 장 루이 미시카와 도미니크 볼통 등 68세대 소장학자 2명과 레이몽 아롱의 대담을 1980년 12월에 방영했다. 당시 77세였던 노 석학과 두 젊은 학자들과의 대담은 몰락 직전에 있던 1930년대의 프랑스 사회, 독일 나치즘의 대두, 20세기 최대의 비극인 2차 대전, 그리고 동서의 냉전 상황과 세계적인 탈식민 추세 등을 목격한 한 지식인의 증언이며, 동시에 68 세대와 우익의 만남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두 젊은 학자들은 결코 아롱의 추종자들 (Aronien)이 아니며 오히려 강한 사회주의적 경향의 사람들이었다. 대화 도중 불꽃 튀는 듯한 설전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책의 서문에서 “우리 68세대로서는, 레이몽 아롱의 사상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참으로 놀라운 즐거움이다”라고 썼다.

대담록 <참여한 방관자>(Le Spectateur engagé)는 한국에서 1982년에 《20세기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고, 최근에 다시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사진은 1979년 6월 20일 사르트르, 레이몽 아롱, 앙드레 글뤽스만 세 사람이 베트남 보트 피풀 구조 켐페인을 벌이며 기자 회견을 하는 모습. 사르트르와 아롱 두 사람은 수 십 년간의 절연 끝에 이 켐페인을 계기로 처음 만났다.(사진=agoravo.fr/박정자교수 제공)
사진은 1979년 6월 20일 사르트르, 레이몽 아롱, 앙드레 글뤽스만 세 사람이 베트남 보트 피풀 구조 켐페인을 벌이며 기자 회견을 하는 모습. 사르트르와 아롱 두 사람은 수 십 년간의 절연 끝에 이 켐페인을 계기로 처음 만났다.(사진=agoravox.fr/박정자교수 제공)

레이몽 아롱은 사르트르와 고등사범 동기 동창

1905년 파리의 한 유태인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레이몽 아롱은 사르트르(1980년 4월 사망)와 고등사범 동기 동창이다. 사르트르와는 각기 우익과 좌익을 대표하는 거물로서 평생 날카로운 경쟁 관계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 『지식인의 아편』(1955년)은 거의 사르트르 개인에 대한 공개 비판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도식을 그대로 원용하여「마르크시즘은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탁월한 격언을 도출해 내었다. 마르크시즘에 경도된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격언은 아마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레이몽 아롱은 근본적으로 『지식인의 아편』은 자신이 사르트르 그리고 메를로 퐁티와 나눈 비판적 대화라고  말한다. 

『지식인의 아편』 뒷 이야기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 두 사람은 실존주의라는 똑같은 철학을 갖고 있었으며, 똑같이 마르크시즘과 반 파시즘에 경도되어 수년 간 가까운 친구로 지내다가, 한쪽은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비(非)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는 공산주의를 추종하지만 당원은 아니었으므로 비 공산주의자이고, 메를로 퐁티는 공산주의를 반대했으므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그 차이로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 두 사람은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물론 메를로 퐁티도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환상은 버리지 않았다.

부르주아와 미국을 똑같이 싫어했던 사르트르는 우선 레이몽 아롱이 피가로지 논설위원이라는 것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피가로지는 보수 우파 신문이기 때문이다. 피가로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부르주아와 미국에 연대감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사르트르는 생각했다. 이것이 고등사범 동기 동창인 둘 사이의 우정이 깨진 이유였다. 1947~48년에 공식적으로 나쁜 사이가 된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처음에는 레이몽 아롱과, 그 다음에는 카뮈, 그리고 이어서 메를로 퐁티와 차례로 우정을 끊었다. 메를로 퐁티와 카뮈가 죽은 후에는 물론 그들 둘에 대해 따뜻한 애도 글을 쓰기는 했다. 사르트르와의 절교에 대해 레이몽 아롱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년기의 우정을 잃어버린 장년의 슬픔이 이런 것이로구나, 깨달았습니다. 친구를 잃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잃는 것과 똑같아요.”

사르트르는 자신의 출신 계급인 부르주아 사회를 매우 혐오했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자들과 그렇게 가깝지도 않았다. 룻세와 함께 「민주 혁명 연합」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었다. ‘민주’와 ‘혁명’이라는 두 명사의 결합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을 할 수는 있지만 혁명을 민주적으로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도 민주적이 아니었고, 소련 혁명도 민주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소련과 미국의 한 중간에 자리 잡는 중도의 길을 가고 싶어 했다. 그는 ‘혁명적인 운동’을 원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련식의 혁명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당시 그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사르트르와 아롱의 우정이 끊어진 두 번째 요인은 소련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소련에 대한 입장 차이가 지식인들을 가르는 분할선이었다. 외교정책적인 차원에서도 그랬지만, 지식인의 차원에서도 그랬다. 아롱은, 소련이 유럽의 절반을 소비에트화했으므로 유럽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참여가 필요하고, 따라서 대서양 동맹은 외교적 균형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자명한 명제를 많은 지식인들이 거부했다.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은 미국문명에 대해서는 반감을, 소련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 혹은 지금 막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한 나라들에 대해 무한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소련에 대한 극심한 견해 차이가 결국 우정까지도 금 가게 했다. 레이몽 아롱은 소련이라면 강제수용소, 전체주의, 팽창주의 같은 것을 떠올렸다. 소련이 전체주의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단순히 스탈린의 잘못이 아니라 이미 마르크시즘 안에 그런 싹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레이몽 아롱의 그런 생각을 못참아 했다. 만일 소련의 오류가 마르크스주의 때문이 아니라, 스탈린주의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데 그쳤다면 아마도 사르트르는 친구와 연을 끊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몽 아롱은 사회주의 운동 그 자체가 진짜 문제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분격한 사르트르는 “사회주의 운동, 혁명 운동에 참여한 사람만이 소련을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더 나아가 “모든 반공주의자들은 개다”라는 심한 말을 하기도 했다. 공산당원도 아니면서 그는 반공사상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며 도덕적인 죄의식을 느꼈다. 공산주의 운동을 옳은 방향으로 고쳐 주기 위해서는 우선 그 운동에 동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운동의 초기부터 그 결과를 예상했던 레이몽 아롱으로서는 반공주의자가 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구체적인 이슈로 떠오른 것이 소련의 강제 수용소 문제였다.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부정하는 지식인과 그것을 비난하는 지식인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졌다. 강제수용소에 대한 상이한 두 자세가 두 진영을 확연히 구분했다. 결국 『지식인의 아편』에서 레이몽 아롱이 싸운 대상은 공산주의자들 일반이 아니라,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반공주의자가 되기는 원치 않는 매우 모순적인 심리 상태의 친구들이었다.

그럼 사르트르가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몰랐던가? 그는 《현대》지에 쓴 기사에서 약 1천만 명이 강제수용소 안에 수용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소련을 비난하지 않았다. 어떻게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소련을 지지할 수 있는지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프랑스 지식인 특유의 정신 상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 지식인들 대부분이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니, 역사니, 혁명이니, 좌익이니 하는 것에 너무나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와의 결렬이라는 결과를 감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련과의 결렬은 당연히 대서양 동맹과 반공 연합전선의 길에 이르는 것이므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의 주역이며, 적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는 혁명 개념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주제와 함께 그것은 하나의 좌익 신화로 이어졌다.

지금 현재의 자본주의는 악이고, 지금 현재의 부르주아지는 혐오스럽고 경멸할 만한 것이어서 현재의 사회 제도를 타도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 마르크시즘의 개념이 당연히 노동자들을 신성한 존재로 만들었다. 노동자야말로 현재의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더 이상 계급투쟁도 존재하지 않게 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계급이라고 그들은 확신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을 이념의 구현자로 간주할 때부터 신화가 발생한다.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들이 이런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계급사회가 본질적으로 나쁜 사회이며, 모든 혁명운동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 방향이 소련의 방향이고 또 강제수용소의 방향인데도 그렇게 생각했다. 계급사회와 악랄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소련의 길밖에 없으며, 따라서 소비에트 체제의 잔혹성은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럼 프랑스 일반 국민들은 이 논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상당수의 프랑스인들은 대서양 동맹은 찬성했지만 미국을 확고하게 지지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미국과 소련을 거의 같은 정도로 비난했다. 그러니까 이들이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 등에게서 자신들의 추상적이고, 지적이고 철학적인 표현을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이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고도의 철학언어가 프랑스의 일반 국민과 대부분의 정치인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좀 더 사실을 말해 본다면 파리, 또는 프랑스의 많은 인텔리겐차의 흥미를 끌었던 이 대 논쟁들은 일반 프랑스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1950년대에 프랑스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혁명의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의 경제 부흥이었다.

다만 그 시절에는 실존주의자들, 혹은 좌익 지식인들이 사상의 영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장 폴 사르트르라는 경이적인 인물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 철학자였다. 그는 난해하고 고답적인 이론의 철학자이면서 희곡도 쓰고, 소설도 쓰고, 신문에도 기고하고, 정치 문제도 다루는 등, 사실상 사상표현의 모든 영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다양하고 풍부한 재능으로 인해 영향력이 막강했으며, 특히 그 당시 인텔리겐차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인 철학교수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제 한 지식인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모든 것에 참여하는 대서사의 시대는 갔다. 우리의 386세대만이 그 끝자락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채진원 연구원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586 운동권 그룹의 행태는 조선시대 위정척사 운동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습속을 빼다 박았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그들의 사고체계는 21세기를 살면서도 위정척사, 소중화로 똘똘 뭉친 주자성리학자들과 동일하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1980년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바로 이들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오늘날 문재인 정부의 핵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채진원 연구원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586 운동권 그룹의 행태는 조선시대 위정척사 운동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습속을 빼다 박았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그들의 사고체계는 21세기를 살면서도 위정척사, 소중화로 똘똘 뭉친 주자성리학자들과 동일하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1980년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바로 이들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오늘날 문재인 정부의 핵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김용삼 대기자 출처)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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