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 여론에 심상찮은 움직임...'그냥 이대로' 현상유지 심리
총선은 과거에 대한 심판의 성격 강해...하지만 대선은 다르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도...정치 어젠다가 구도 그 자체
20대 대선의 핵심 대립구도, 즉 시대정신은 어떤 것일까? 답은 '경제'와 '외교안보'에 있다
경제민주화 원칙 폐기와 평화통일론 거부, 이를 도전적으로 드러내고 어젠다화해야
이대로 가면 내년 대선에서 '무난하게' 패배하는데 엄청난 반발과 공세가 두렵나?
선명하게 대립하는 어젠다 내세우면 사즉생(死卽生), 일말의 부활 가능성 열린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정권교체에 대한 우파 진영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한국갤럽이 8월 3일부터 5일까지 전국의 만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 차기 지도자 선호도를 물은 조사에서 이재명 경기지사가 25%로 윤석열 전 총장(19%)을 앞선 것이다. 이 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는 11%,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4%로 집계됐다.

여야 대선후보의 지지율뿐만이 아니다. 정권교체 여론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정권교체 요구가 더 높지만, 현 정권 재창출 여론과의 격차는 지난 4·7 재보궐선거 후 처음으로 한 자릿수로 줄어들었다. 즉, 유권자들이 문재인 정권을 갈아치우자는 요구에서 점차 발을 빼고, ‘그냥 이대로’라는 현상유지 심리로 회귀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갤럽의 조사 직후인 8월 6~7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실시한 주간 정례조사에서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지지율이 한 주 만에 4%포인트 하락한 28.3%를 기록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같은 기간 동안 1% 오른 28.4%였다.

이 조사에서 윤석열의 지지율은 PK지역(10.9%포인트↓), 서울(7.6%포인트↓), 50대(10.0%포인트↓), 여성(4.6%포인트↓), 자영업자층(6.7%포인트↓)에서 많이 떨어졌다. 윤석열이 지난 3월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이래, 오차범위 이내라고는 해도 KSOI 조사에서 선두를 놓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윤석열의 지지율 하락 이유를 놓고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함으로써 중도 성향 유권자들이 많이 빠져나간 결과’라고 분석하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다른 관점의 분석도 있다. 윤석열에 대한 지지는 원래 그의 것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머무르다가 자기 갈 길을 찾아가는 표심이었다는 설명이다. 이른바 발광체냐, 반사체냐 하는 논란이다.

윤석열이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조국 사건 처리를 놓고 문재인 정권과 각을 세우고 거기에 대해 추미애가 막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상식 이하의 대처를 한 것이 윤석열의 정치적 중량감을 키워준 측면이 강하다.

즉, 윤석열은 자신의 정치 콘텐츠와 메시지, 스토리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권력의 탄압이라는 빛(?)을 받아야 주위를 밝히는 반사체에 가까운 정치 캐릭터라는 얘기이다. 문제는 이런 분석이 단순히 윤석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민의힘 대선후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문제이다.

총선은 과거에 대한 평가 즉 심판의 성격이 강한 선거이다. 하지만, 대선은 다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대결구도를 통해 시대적 과제가 발현되는 과정이다. 그 과제를 흔히 시대정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선의 대립구도는 근본적으로 미래지향적이다.

정치인들의 정치의식이나 경륜, 내공, 콘텐츠와 무관하게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집단 무의식이 대통령선거의 대립구도로 표현되는 것이다. 정치 마니아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국민들보다 수준이 낮은 정치인들이 대선에 나서고 대통령이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유권자들의 집단지성이 가리키는 시대정신의 표출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국민의힘 대선주자들의 근본적인 한계는 바로 이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관점이나 가치관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윤석열과 최재형의 한계가 그것이고, 홍준표나 유승민, 윤희숙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이다.

윤석열과 최재형이야 정치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 경륜이나 내공에서 당장은 큰 기대를 걸기 어렵다. 하지만, 홍준표나 유승민, 윤희숙 등은 경우가 다르다. 홍준표나 유승민은 오랜 정치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정책 콘텐츠와 그를 뒷받침하는 정치 경륜을 갖고 있다. 윤희숙은 정치 경험이 짧지만, 경제 전문가로서의 내공이 뒷받침된 콘텐츠를 보여주고 있다.

이재명이나 이낙연, 정세균 등 민주당 대선주자들이 내세우는 정책 콘텐츠에 비해 이들 우파 대선주자들의 그것이 뒤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용의 완성도나 현실 정합성 등에서는 우파 정치인들이 더 앞서는 점이 많다. 문제는 이런 정책 콘텐츠의 비교우위가 정치 어젠다의 우위로 이어지지 못한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국민의힘 대선주자들이 결정적으로 오해하는 지점이 이것이다. 정책 콘텐츠는 정치 어젠다의 하위 범주이다. 정치 어젠다의 우위를 갖지 못하면, 정책 콘텐츠의 비교우위는 거의 의미가 없다. 100%의 확률로 정치 어젠다의 위력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도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바로 이 구도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 어젠다이다. 아니, 정치 어젠다가 구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젠다가 정치적 대립전선을 형성하는 중심이 되고, 그 대립전선이 구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구도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전투의 승패와 별개로 전략적으로 전쟁의 우열을 가리는 형세이다. 부분적인 이슈파이팅이 아니라, 거대한 시대정신이 정치적 대립물로서 표현된 결과이다.

그렇다면, 20대 대선의 핵심 대립구도 즉 시대정신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포스트87체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20대 대선은 포스트87체제를 가리키는 풍향계와 같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87체제는 헌정적으로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 시효를 다한 상태이다.

포스트87체제의 방향 제시는 기존 87체제가 드러내온 구조적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1987년 이후 무려 35년 가량 유지된 6공화국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한계는 한두 가지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의 현실 그 자체로 귀결된다. 그 문제를 일단 경제와 외교안보 등 2가지 영역으로 집약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87체제에서 좌파의 정치적 우세는 이 두 가지 영역의 어젠다로 수렴된다.

경제 영역의 이슈는 경제민주화의 명제로 수렴된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의 정치화이다. 경제와 정치는 전혀 다른 가치체계와 작동 메커니즘을 갖는다. 자유시장 경제체제인 우리나라에서 경제의 핵심은 시장질서이고, 그것은 상호간 합의에 의한 거래의 질서라고 표현할 수 있다.

거래의 질서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다. 즉, 당위의 영역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합의의 수준이 있을 뿐이고 그것은 가격이라는 양적 단위로 표현된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질서가 작동한다. 그것은 옳고 그름, 선과 악, 흑과 백, 양자택일의 질서이다. 이것은 정치 테크닉 등 정치공학의 유연성을 배제하는 개념이 아니다.

공자는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라고 했고, 데이빗 이스턴은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규정했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거래의 규칙에 근거한 상호합의가 불가능한 상황 즉 시장의 질서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정치가 개입하여 해결한다는 의미이다. 가치를 상호합의에 의한 가격이 아닌 권위에 의해 배분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제력, 자발적인 복종을 불러오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장의 질서에 기반한 거래의 규칙이 작동할 때이다. 다만, 현실 속에서 시장의 질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상황은 끊임없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정치는 그런 예외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 칼 슈미트가 말한 주권의 예외적 상황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 상황이고 상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사회 등 공동체의 운영에서 정치가 개입하는 영역은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야경국가로 표현되는 작은 정부에 대한 요구가 그것이다. 하지만, 87체제를 만들어낸 거대한 정치 민주화의 파도는 경제에도 민주화라는 당위를 들이대기 시작했고, 경제에 개입하는 정치의 영향력은 끊임없이 확대돼왔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의 저성장 저효율 고비용 구조, 양극화 현상, 고용 없는 성장, 청년실업, 만성적인 산업재해 등이 모두 경제 영역에 정치 논리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기업 활동과 시장질서에 대한 개입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최저임금의 살인적인 인상이고,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다. 그리고 반기업 친노조 규제의 양산이다.

경제민주화 원칙의 근원적인 해소 없이는 대한민국의 경제는 암울하다. 경제가 한계에 부닥치면 국가 체제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남은 것은 그것이 언제쯤이냐 하는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우파 정치인 특히 대선주자들은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소신을 적극적이고, 도전적으로, 공격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어젠다화해야 한다.

외교안보 영역에서는 평화통일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둘러싼 오해와 왜곡은 경제민주화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악질적이다. nation 어휘의 번역 오류로 표현되는, 민족 또는 국민 개념의 혼동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평화라는 허위적 프로파간다의 위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nation은 결코 겨레나 동포 등 전근대적이고 자생적인 질서에 근거한 인간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즉, 민족이 아니다. 인권과 사유재산 보호, 신분의 억압에서 해방된 공화국의 질서를 자발적으로 수용한 국민의 개념으로 정리해야 한다.

지금 남과 북의 대립 갈등은 오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공유해온 인간집단들이 서로 다른 체제 즉 헌정질서를 선택한 데 따른 불가피한 결과이다. 민족의 분단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한반도의 인간집단들은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오래 공유한데다, 중국이라는 위협이 배후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은 반드시 달성해야 할 숙제이다.

하지만, 평화는 통일의 결과이지, 통일을 이루는 수단일 수는 없다. 남과 북은 완전히 상반된, 본질적으로 적대적인 체제이다. 이런 적대적 체제를 평화적으로 통일한다는 것은 정치적 외교적 기만이다. 북한 특유의 정치투쟁 프로파간다일 뿐이고, 그 결과는 결국 대한민국 체제의 자발적인 무장해제일 수밖에 없다.

그 단적인 표현이 ‘아무리 좋은 전쟁이라도 나쁜 평화만 못하다’는 억지이다. 이 논리가 정당하다면 군대를 둘 필요도 없고 경찰 등 치안유지도 불필요하다. 이순신 장군은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인종학살 범죄자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당장이라도 나라를 들어 북한에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중국에 넘기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다.

북한은 연방제통일론과 통일전선전술을 결합하여 남한에 대해 정치적 공세를 펼쳐왔다. 평화통일론은 그런 북한의 정치선전 공세에 대한민국 내부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무원칙하게 영합한 결과이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문재인 정권이 북한과 중국에 보여주는 비굴한 이적행위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한민국 내부에서 이적집단이 합법적으로 준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중물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파는 어떤 대안을 내세워야 할까? 우파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이후 독자적인 통일론을 가져본 적이 없다. 차라리 영구분단론이 현재 우파의 암묵적인 합의사항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우파가 정치투쟁에서 패배한 결과이자 그 패배를 더욱 구조화 영속화하는 길이다.

대통령선거에 나서는 우파의 정치지도자라면 대중의 평화통일 환상에 정면 도전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시장질서 체제로의 흡수통일만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 과정에서 일부러 전쟁과 유혈을 선택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과 유혈의 가능성을 억지로 외면해서도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평화는 통일의 결과이지, 통일을 실현하는 방법론일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혀야 한다. 북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체제로의 흡수 통일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며, 한반도 급변사태에 중국 등이 개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일본과 혈맹 차원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경제민주화 원칙의 폐기와 평화통일론의 거부는 결국 헌정질서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 표현이 바로 개헌이다. 포스트87체제 즉 7공화국의 성립은 개헌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개헌 논의는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는 87체제의 진정한 극복도 아니고 시대정신의 올바른 포착일 수도 없다.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드러내는 작업이 어떻게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제한된 범위로 국한될 수 있나. 말도 안되는 얘기이다. 1987년 직선제개헌이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던 것은 그것이 단순히 권력을 누구에게 넘기느냐의 차원을 넘어 전국민의 직접적인 통치자 선택이라는, 자유의 확대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진보는 본질적으로 자유의 확대 과정이다.

우파 정치 지도자, 대선후보가 이런 어젠다를 제기했을 때 어떤 반발이 터져나올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좌파, 대깨문이 주도하는 여론 공세에 밀려 좌초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런 공세를 견뎌내는 것이 정치 지도자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세이자 덕목이다. 이것은 87년체제 이후 우파가 정치 어젠다를 주도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파는 이대로 가면 내년 대선에서 ‘무난하게’ 패배한다. 지금 우파 대선주자들은 45%로 질 것인가, 49%로 질 것인가를 놓고 박 터지게 경쟁하고 있다. 이들이 실제로는 대통령직을 노리는 게 아니고, 2위 자리가 진짜 목표라고 말하면 허위사실 유포일까?

우파 대선주자들은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어차피 어젠다를 주도하지 못하면 내년 대선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 뒤에 지방선거 공천권이나 2024년 총선 공천권이 유효할 것 같은가?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에 대해서 선명하게 대립하는 어젠다를 내세우면 사즉생(死卽生), 일말의 부활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이런 도전과 모험을 기피하면 오늘 죽느냐 내일 죽느냐 하는 시기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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