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피투성(被投性)'...원초적 본능에 호소하는 사회주의 유혹 이겨내야
국가의 역할은 '간섭·개입' 아닌 '자유 보호'...개인 역량이 발휘될 수 있도록 제도적 정치 갖추는 것에 그쳐야
자유기업 정신과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 장애물이 덜 설치된 나라일수록 번영한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이 세상에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피투성(被投性)’이다. 자신의 힘으로 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한다. 하지만 무지의 장막을 걷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현실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다. 이때 누군가 나타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선(善)하고 전지(全知)한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설득하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처럼 사회주의와 전체주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닿아 있다. 정치적으로 원초적 호소력을 갖고 있다.

 

O 문재인 정부 경제실패의 근원적 오류(mother fallacy)

문재인 정부는 5년차에 접어들었다. 고착된 열성 지지자 빼고는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감히 입에 담지 않는다. 현상에는 본질이 있다.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철 지난 이념’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국정 목표는 국민의 가슴을 잠시는 울릴 수 있겠지만 ‘허망한 미사여구’가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는 ‘유산(有産)국가’ 즉 모든 생산자원을 국가가 배분하기 때문에 그런 구호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 하지만 무산(無産)국가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장경제에서 ‘어떻게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질 수 있겠는’ 가.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삶은 개인이 책임지는 것’이 당위다. 문재인 정부가 선택한 탈출구는 ‘국가를 최대의 고용주’로 등치시킨 것이다. 고용으로 국민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이는 잘 못을 더 큰 잘못으로 덮겠다는 오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책 파행은 “공공부문의 비만과 민간부문의 위축”을 초래했다. 민간부문의 규모가 공공부문에 추월당하는 ‘나쁜 역전(dead cross)’이 일어난 것이다.

 

O 공공·민간 부문 역전의 위험신호

기획재정부와 행전안전부에 따르면, 2020년 ‘공공부문’ 총 인건비는 89.5조원으로 ‘민간부문(500대 민간 기업)’ 인건비 합 85.9조원 보다 3.6조원 많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 년도인 2016년을 기준년도로 삼으면 민간부문의 인건비 총합(75.3조원)은 공공부문(71.4조원)보다 컸다. 문재인 정부 들어 역전된 것이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공공부문 인건비는 25.4%(18.1조원) 급증했다. 같은 기간 500대 기업 인건비 증가율(14.1%, 10조6000억원)의 약 2배 가까운 수치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인건비는 성격이 다르다. 민간부문에는 ‘시장원리’가 적용되며 ‘경쟁압력’이 작동한다. “근로자가 생산한 부가가치를 시장에 팔아 현금화 한 뒤, ‘자신의 기여분’을 사후적으로 찾아간 것”이 민간부문의 인건비다, 인건비가 늘면 그만큼 가계 소득이 커지게 된다.

반면 공공부문의 인건비는 공기업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액 ‘세금’에서 충당된다. 공공부문에는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공공부문의 생산액이 적정한지’를 판별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 결국 공공서비스 필요 요구량은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과다생산의 유인’이 상존하기에, 공공부문은 비대해 지기 쉽다.

그리스의 몰락은 1981년 ’파판드로우‘가 집권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국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겠다”며 무차별적으로 복지 정책을 펼쳤고 공무원 수를 대폭 증가 시켰다. 민간 부문을 키우지 않고 공공부문만 비대화 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는 ’회복 불가‘의 남유럽의 영원한 병자(病者)로 남게 되었다.

 

O 죽은 정치: 정치 쟁점으로 발화되지 않는 ’국가의 책임과 역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그리스를 문재인정부는 추종하기 바쁘다. 운 좋게도 우리나라는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국정운영 방향을 점검하고 교정할 수 있는 최고의 ’안전장치‘이다, 지금 쯤 지난 4년간 실패를 성찰하고 ’국가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피 튀기는 논쟁이 일어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공동묘지의 평화가 흐르고 있다. 정치의 존재이유는 ’적기에 적절한 국가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정치의 생산성은 그러한 능력으로 평가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정치는 죽었다. 모두들 “국가가 당연히 국민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대선주자 중 최재형 후보만이 홀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국적 현실에서 지금이 ’허버트 스펜서(H, Spencer, 1820~1903)‘를 불러들일 적기이다. 그의 역작 ‘개인 대 국가’(The Man versus the State, 1884)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그는 과거 군주에게 무제한 권위가 있다는 당연 사실을 논박하면서 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처럼, “진정한 자유주의는 당연시 되는 의회의 무제한적인 입법 권위를 논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는 국가의 역할과 간섭이 커질수록 개인 자유가 침해 받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 역할은 간섭·개입이 아닌 자유 보호’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의 동등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했다. 상대방의 주먹은 내 코앞에서 멈춰야 한다. ‘동등 자유의 법칙’(the law of equal freedom)이 요체인 것이다. 국가는 “생명권, 신체 자유권, 토지사용권, 물질 및 정신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의 책임은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 역량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제도적 정치를 갖추는 것이다.

그는 시민들이 정부 개입에 익숙해지면 바라는 목적을 “개인적인 행위가 아닌 공공기관을 통해 달성하는 데 더 친숙”해 진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를 “노예 상태로 가는 길”이라고 인식했다. 모든 것을 국가가 나서 세금으로 해결해 줄 것을 바라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놀라우리만큼 웅변하고 있다. 책이 발간된 1884년은 임오군란(1882년) 즈음이다.

그는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을 '사회진화'의 기본적 동력으로 인식함으로써 사회진화론자(사회다윈주의)로 비판 받았지만 그의 자유주의 철학은 인류 진보를 가져온 시대정신이 되었다.

 

O 고삐 풀린 최악의 포퓰리스트, 이재명 후보

이재명은 최악의 포퓰리스트다. 그를 경계하는 이유는 포퓰리즘은 국가의 무제한적 개입을 낳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소득과 기본주택에 이어 기본시리즈 3탄을 내 놨다. 기본대출이 그것이다.

신용에 관계없이 모든 성년에게 ‘연 3%로 마이너스 1천만원 통장’을 개설해 주겠다는 것이다. 기본대출 기저에 깔린 그의 삐뚤어진 반(反)시장적 금융관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는 현재의 금융권 대출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저(低)신용자는 제도권 고금리 대출과 불법 사채로 내몰리지만, 신용도 높은 고소득자는 저금리 대출을 활용해 부동산 등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다. 금융시장의 작동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재명은 자신의 기본대출을 이준석의 그것과 견주면서 ‘선의의 정책경쟁’으로 호도하고 있다. 이준석 대표가 지난 5월에 제안한 대출제도는 ‘결혼장려(주택구입)를 목적으로 정부가 보증을 서 3천~4천만원을 대출해 주겠다’는 것이다. 신용기록이 부족해 신용평가를 통해 대출받기 어려운 젊은 층에 대한 ‘국가보증’이 핵심이다. 이자율 등 가격신호에는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이재명 기본대출은 ‘연 3%금리 획일 적용’이다. 금융시장의 차주(借主) 위험 평가에 따른 금리 가격 기능을 정면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그리고 1천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이재명과 이준석의 대출제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럼에도 이재명은 동명이인을 같은 사람이라고 우기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공짜에 길들여지고 있다. 고등학교는 무상교육이고 대학 등록금은 반 값이다. 여기에 성년이 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만원이 대출된다. 성인이 되자마자 빚지고, 푼돈 기본소득 받아 생활하다가 미래 준비가 여의치 못하면 기본주택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 이는 ‘국민의 삶을 국유화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길을 선택할 것인가.

 

O 내 삶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정언적 명령

베네주엘라가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도 포퓰리스트 ‘차베스’가 집권하고 나서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면서 ‘개인의 삶’을 국유화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자조의지를 잃고 ‘차베스와 마드로’만 처다 보고 있다. 가난은 정해진 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인기를 위해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 가파른 보릿고개에서도 국민 위로금을 뿌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며 땀과 눈물을 국민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새마을 정신은 ‘스스로 돕고 스스로 일어나는’ 자조와 자립이었다. 그의 비전과 리더십이 대한민국의 내면에 5천년동안 쭈그리고 앉아있는 ‘거인’을 깨운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허언은 개인을 국가에 예속시키고 정신세계를 황폐화시킨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등불인 미제스(F. Mises)는 그의 ‘자본주의 정신과 반(反)자본주의 심리’에서 자유기업 정신과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 장애물이 덜 설치된 나라일수록 번영한다고 설파했다. 슘페터가 일갈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최대의 적은 역설적으로 ‘번영’이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약관화하다. 자유와 개인 그리고 시장을 복원시키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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