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진영의 이념적 지향 무너져 내리고 진영은 길을 잃은 상황
이익 추구와 정치 셀럽을 향한 팬의 숭배가 압도하는 '정체성 정치'
선거의 선택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서적인 것
같은 편에서도 서로에게 지속되는 불신, 더 세분화된 분열로 이끌어
대선과 지방선거, 그리고 2년 후의 총선이 대한민국 미래 결정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

미래를 이야기하는 대선을 앞두고 선택의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으로 현실을 탄식하게 되는 안타까운 추석 연휴 기간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선거라는 선택의 장을 생각하면서 정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시간을 갖고 정치 리더십이 양성되지 못하고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이 급변하는 정치 환경에서 정치지도자는 갑작스레 이 세상을 구원할 화제의 인물로 등장하여 대중의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겨루기라는 정치 소비 과정을 통해서 탄생해 왔다.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와 어떻게 이를 타개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은 주목을 받지 못하기에 생략되기 일쑤다. 대중을 흥분시키고 관심을 모으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화제거리를 제공하는 대중성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대중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정의 방식과 미디어 정치라는 상황은 더욱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종교를 대신하여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이념이 행동의 근거를 제공하기에 정치 세력의 이념성이 선택의 기준인 때가 있었다. 87체제에서 끊임없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온 586운동권 정치세력이 사회 주류가 되고 집권정치 세력이 된 이후에, 조국 사태 이래 오늘까지 이어지는 아수라의 현장에서 확인되듯 그들에게 어떠한 이념 지향성이 애당초 없었거나 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흔들려 온 국가정체성 뒤에서 방향을 가르키던 정치 진영의 이념적 지향이 무너져 내리고 진영은 길을 잃은 상황이 되었다. 대립되는 이념 정체성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집단이나 그러한 전선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그때의 이슈로 야기된 다툼의 소란스러움만이 대립을 만드는 진영이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 의한 권리 추구나 인물 선호로 갈린 정치 집단은 이에 상응하는 포퓰리즘을 불러 일으키고, 정치는 통합이 아닌 분열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권리를 근거로 한 이익 추구나 정치 셀럽을 향한 팬의 숭배가 실질적인 이해관계로 등장하면서 자기편의 정체성을 추구하게 된다. 유권자가 요구하는 권리나 취향을 만족시키는 정치 현실은 정체성 정치 현상을 보여준다.

같은 시대와 장소에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세대의 공존이라는 공통의 이해를 만들기 어려운 환경과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각자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혼란 상황에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의 추구는 집단을 더욱 세분화하고 세력화하면서 분쟁은 치열해지고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려는 포퓰리즘은 더욱 번창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불신과 갈등은 유일한 정치적 자원이 되고, 공동체성을 무너뜨리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가 되었다.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라는 저술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공동체를 형성하기 보다는 개인간의 여러가지 연결고리를 자원으로 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신분 상승을 추구하여 벼슬을 얻어 입신양명해서 가문의 영광을 달성하려는 문화적 전통도 이같은 정치 상황의 배경이다.

정치적 지향이나 이념 추구가 아니고 공동체를 위한 현실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어떤 인물을 택하는가의 문제가 되는데, 내편이거나 내게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소망이 선택의 이유가 된다. 명확하지 아니한 상황이지만 어쩐지 나와는 잘 맞을 것 같은 사람, 나와 동일시 할 수 있는 사람, 나와 정체성을 같이 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느낌이 선택 기준이 된다. 오늘의 정치 진영은 이념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는 기대를 통한 인정 욕구의 충족을 제공하고자 한다. 자신과 일체감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호감이나 반감이 선택의 기준이 되므로 후보자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동질감을 심어줄 것인가이다. 선거의 선택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서적인 것인데, 팬덤정치에서는 이런 상황이 더하다.

팬덤정치는 정치인 셀럽에 대한 숭배로 나타나는데, 중도층이란 이념도 이익도 아니고 셀럽을 찾지 못해서 팬이 되지 못한 경우를 가리킨다. 팬덤 정치에서는 누군가를 뽑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 나를 만족시키는 사람, 곧 자신을 선택하는 선거가 된다. 팬은 셀럽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다. 개인의 선호에 따른 정치 소비 상황에서 공동체를 위한 진지한 선택이 어렵다. 현실의 불만을 해소할 해결책으로서 희생양을 찾고 제물을 잡아서 제사를 주재할 자를 지도자로 선택한다. 대립과 갈등의 증폭으로 유지되는 정치환경이 만든 전쟁에 가까운 적대적 관계의 심화는 보복과 복수의 잔치로 이끈다. 분노의 시대에 불만과 악의를 해소할 악당이 지도자로 선택된다, 대중이 독재자를 선택하는 것은 무지 때문만이 아니다. 역사는 규범을 파괴하고 문명을 허물어 스스로 야만을 추구하는 것이 선거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중은 악을 추구할 수 있고, 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대중의 선호에 의한 선거 결과에 좌우되는 민주정은 언제나 독재의 폭정과 동반하는 체제로서 동전의 양면이다. 민주정은 언제나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선거에 의해서 선택이 되는 민의에 의한 폭정을 예상해야 한다.

집권세력의 실정에 대해서 정권교체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선택할만한 대안정당이나 지도자가 없다고들 말한다. 같은 후보자에 대해서 호감과 동시에 비호감이 존재하고 문제를 수습할 정치세력을 찾을 수 없다면서 선택의 어려움이 호소되는 것은 오늘의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치열한 투쟁으로 분열을 키어온 정치가 공동체를 갈라 놓았고 갈라선 편 안에서도 신뢰를 찾을 수 없기에 지속되는 불신은 더 세분화된 분열로 이끌어 간다. 오래된 대립과 투쟁의 과정이 공통의 사회 기반을 허물어 버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진 터를 오히려 새 출발의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선거라는 선택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국민(大韓國民)을 주어로 서술된다. 대한국민이 헌법에 의해서 권력을 만든다. 권력의 성격은 대한국민이라는 정체성이 만드는 것이다. 대한국민은 자유민주정이라는 정치적 정체성에 의해서 대한민국을 건설했고 70여년간 이를 지켜왔다. 공화국은 혈연과 지연이라는 역사적 전승에 의한 것이거나 이익집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인 국민이 국민의 정체성에 의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침략에 대항해서 싸우고 내부의 혼란에 대처하면서 만들어 가는 공화국이다. 자기 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분열과 혼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다시 물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선거에서의 선택이다.

대선과 지방선거, 그리고 2년 후의 총선까지 이어지는 선거는 대한민국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87체제로 불리우는 제6공화국의 지난 30년간 반대되는 이념 진영에 의한 적대적 공존관계로 유지되던 시대가 종결되고 그 기초가 된 이념의 기반이 소멸되었으며 극심한 분열과 대립 그리고 이것이 가져온 증오가 가득차 있다. 현실 문제를 타파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질서가 마련되어야 한다. 2022년 선거는 국민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다. 지난 70여년간 존속하여온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무너진 진영이나 이익이나 선호에 따른 집단 정체성의 추구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대한국민으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면서 이에 따라서 앞으로의 이곳에 사는 우리들 모두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결정을 해야하겠다.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前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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