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일본 만화나 영화는 발상이 참 기발하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무릎을 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거기서 끝이다.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거나 작가가 아이디어에 집중하지 못해 길을 잃고 헤매다 끝난다. 그런데 이게 바다를 건너와 한국 장인들의 손에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유도 모른 채 10년 동안이나 사설 감옥에 갇혀 있던 남자가 풀려나와 복수를 한다는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지루한 만화는 박찬욱의 손을 거쳐 최고의 복수 영화로 재탄생했다(올드 보이). 초비만인 여성이 가진 돈을 다 털어 전신성형을 하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을 한다는 스즈키 유미코의 어수선한 만화는 정용화의 과감한 음악적 설정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미녀는 괴로워).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흔히 ‘데스 게임 영화’라고 불리는 이 장르는 원래 일본이 원산지다. ‘배틀 로얄’, ‘카이지 시리즈’, ‘신이 말하는 대로’, ‘리얼 술래잡기’ 같은 작품들로 일본은 나름 장르의 체계화까지 달성했지만 그 이상의 확장성은 없었고 내수용으로 끝났다. 반면 우리는 그 형식을 빌려와 ‘오징어 게임’으로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의 데스 게임 영화에 없고 ‘오징어 게임’에는 있는 것, 뭘까. 드라마와 디테일이다. 일본 데스 게임 영화의 주인공은 ‘게임’ 자체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은 ‘사연 있는 사람들’이다. 게임을 중단하고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현실도 지옥이라 다시 게임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드라마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자 전 세계인들의 공감 포인트다. 영국 BBC는 ‘오징어 게임’에 대해 “새로우면서 익숙하다”는 평을 달았다. 이 새로움이 바로 디테일이다. 평범한 사람은 모방하고 천재는 훔친다고 했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특별한 재능은 남이 어설프게 펼쳐놓은 것을 비틀고 다듬어 보석으로 만든다. 우리 민족은 이런 게 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오징어 게임’만 그런 게 아니다. 데뷔 때부터 한 번도 전성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는 블랙핑크의 성공에 대해 프로듀서인 테디 박은 ‘다양한 문화의 결합’을 이유로 들었다. 다양한 문화의 결합, 이걸 세 글자로 줄이면 짜깁기다.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와 살짝 바꾸고 섬세하게 마무리해서 내보내는 이 가공加工 기술은 노력이 아니라 재능의 영역이다. 타고 나야 한다. 하버드대 명예 교수인 조셉 나이는 “한국은 문화 측면의 소프트파워를 잘 타고 났다”고 말했다.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민족적인 특성이 그렇다는 얘기다.

연습하면 되는 나라와 해도 안 되는 나라.

일본 영화와 프랑스 영화의 현재를 보면 이 재능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프랑스는 영화가 탄생한 나라다. 그러나 지금의 프랑스 영화를 보면 대부분 관객과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두 시간 내내 방황하다가 끝난다. 유머 코드도 이상하고 이야기의 전개는 더 이상하다. 동양 영화에서 한때 선진국이었던 일본 영화는 어떤가. 과다하게 망상적이거나 지나치게 소극적인 연출, 자기 나라에서나 통하는 일본식 유머, 등장인물들의 납득하기 어려운 감정 전개 등 상업 영화에서 피해야 하는 것들의 종합세트다. 우리는 뒤늦게 영화를 만지기 시작했지만 진화의 속도는 빨랐다. 변곡점은 1999년의 ‘쉬리’다. 처음 시사회를 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이랬다. “우리나라 영화 아닌 거 같아요.” 단순히 총격전이 거창해져서가 아니었다. 이야기의 흐름과 편집과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이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에 근접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은 전통적인 미국 방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2차 대전 동안 전 세계의 영화인들이 안전과 창작의 자유를 찾아 할리우드로 모여 들었다. 그것은 전 세계의 이야기들이 할리우드로 모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는 지역적 특색이 뚜렷한 이 이야기들을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이야기 틀에 밀어 넣는 연습을 반복했고 가장 보편적인 영상어법을 찾아냈다. 할리우드가 영화 산업의 메카가 된 기원이다. 우리는 그 어법을 배우고 연구했고 따라했고 이제는 그 익숙함에 약간의 새로움을 더해서 우리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일본과 프랑스는 그걸 몰라서 못했을까. 안 되니까 못한 거다. 그 재능이 없는 거다.

우리는 원래 놀기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는 2021년 노벨상 시즌이었다. 보통 이 기간에는 우리는 왜 노벨상을 타지 못 하는가 따위의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일본은 물리학, 화학, 생리학, 의학을 중심으로 25명씩이나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우리는 왜 이상한 평화상 하나뿐이냐며 한탄하는 칼럼이 줄을 잇는다. 올해는 조금 덜한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한 의식변화라고 본다. 우리와는 잘 안 맞는 거다. 당장 우리 민족에 대한 옛 기록만 봐도 며칠씩 밤새워 먹고 마시며 놀았다는 얘기는 있지만 뭘 죽어라 연구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제대로 된 과학자는 장영실 하나 정도다(과학에 등 돌린 사회였다는 이유만으로는 변명이 안 된다). 욕먹을 각오하고 말씀드리자면 우리 민족에게 과학 DNA는 좀 빈약한 것 같다. 대신에 유흥에 강하고 머리가 좋아 응용력이 남다르며 손기술이 뛰어난 DNA를 내려 받았다. 이게 한 수 위 재능 아닌가. 남들이 연구해서 만든 것을 한 단계 올려 더 예쁘게 포장해서 내놓는 재능이 더 유익한 재능 아닌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라는 자동차, 인터넷, 스마트폰에서 우리는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 보시라. 셋 다 우리 것이 아니었으나 응용하고 포장해서 세계 1, 2, 5위가 대한민국이다. 여기에 문화적 파워까지 더해졌으니 한민족 5천년에서 최고의 전성기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겨우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 1위 가지고 너무 많이 나간 얘기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문화는 연쇄적으로 파급 효과가 발생하는 특별한 종목이다. 그 나라 문화가 좋아지면 그 나라의 말과 언어가 좋아지고 그 나라 말과 언어가 좋아지면 그 나라 제품이 좋아진다. 직접적인 이익은 물론 간접적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잘하는 것에 집중하자. 사람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그게 경영의 기본 아니던가.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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