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이 “골포스트를 향해 달려가는 ○○○선수입니다”라는 식의, 주어가 없는 표현을 근거 없이 사용하는 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SNS 등에서 남을 비방할 때 ‘주어 없음’이라고 쓰는 경우이다.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상대가 문제를 제기해도 “너한테 한 얘기 아닌데”라고 발뺌할 여지는 남기겠다는 의도이다. 근거 없이 주어를 생략하는 말투가 혹시 사람들이 갈수록 자신의 행동에 무책임해지는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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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얼마 전 대치동 학원에서 영어와 논술을 가르치는 친구와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a book’의 품사가 명사라는 데서 시작된 얘기다.

“‘a book’은 ‘관사+명사’ 아니에요?”

“관사(article)는 명사의 부속품이기 때문에 명사로 봐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영어에서 관사의 역할이 얼마나 큰데. ㅋㅋㅋ”

“그럼 a pretty girl의 품사는 뭘까?”

“관사+형용사+명사.”

“이건 국어가 아니라 영어에요. ‘A pretty girl is~’의 문장에서 ‘a pretty girl’은 주어죠. ‘관사+형용사+명사’가 주어가 되어요. 주어는 명사예요.”

결국 ‘a pretty girl’의 품사도 명사라는 얘긴가? 그 친구가 농담 삼아 한 말일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그쯤에서 대화를 끝냈다. 하지만 친구의 태도가 워낙 당당하고 완강한 터라 내가 영어에 무심했던 몇 년 사이에 영어 문법이 이렇게 바뀌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아이들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정보를 우겨 넣을 것인가 골머리를 썩인 결과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문제는 영문법을 이렇게 가르치면 학생들이 국어 어법을 배울 때 무척 애를 먹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국어 어법은 중학교 3학년이나 되어야 본격적으로 배우는데 영문법은 유치원부터 배운다는 것도 문제다. 교사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학생들은 먼저 배운 영문법과 국어 어법을 비교하며, 대입하며 공부한다. 그러니 영문법을 편법으로 배우면 국어 어법을 배울 때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배우는 학생들에게 입력된 정확하지 못한 이정표가 그의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편법 영문법의 대표적인 것이 영어의 어순이 ‘주어+동사+목적어’로 이뤄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대로 하면 영어의 어순은 ‘주어+서술어+목적어’가 되어야 한다. 어순은 문장 성분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장 성분으로 설명해야 하는 어순에 ‘주어+동사+목적어’라고 품사를 끼워 넣는 건 우리집 형제의 순서를 이야기하는 데 이웃집 아이 하나를 그 사이에 끼워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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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입력된 정확하지 못한 이정표가 그의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국어 어순은 ‘주어+목적어+서술어’라고 문장 성분으로 이야기하는데 영어 어순은 ‘주어+동사+목적어’라며 품사를 끼워 넣는 것일까? 영어를 배우는 수년 동안 그걸 설명해주는 선생님은 한 사람도 없었고 나 자신도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40세가 넘어 학생들에게 국어 어법을 가르치며 궁금해하던 끝에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영어의 서술어는 모두 ‘동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영어 어순은 ‘주어+동사+목적어’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사실과 원칙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과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한 교사는 만날 수 없었다. 그들 자신도 이 내용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친구와의 대화 때문에 모처럼 인터넷에서 영문법을 찾아봤다.

“주어로 쓸 수 있는 요소로는 명사(구‧절), 대명사, 부정사, 동명사, ‘the+형용사(분사)’ 등이 있다.”

이것들이 결국 ‘다 명사다’라고 얘기하면 안 된다. ‘명사처럼 쓰인다’와 ‘명사다’라는 말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한번 쓸까 말까 하지만 영어를 배우자마자 열심히 외웠던 그 말 “I am a boy. You are a girl.” 두 문장의 주어 ‘I’와 ‘You’는 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다. 명사구나 절, 부정사, 동명사 등을 몽땅 명사라고 규정짓는 기세로 보면 대명사도 명사라고 할 판이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같은 사람은 아니다. 대명사는 대명사이고 명사는 명사다.

영어 어순이 ‘주어+동사+목적어’라고 고집하면 중국어나 러시아어 등 제2외국어의 어순이 ‘영어와 같다’라는 말에도 문제가 생긴다. 나도 중국어나 러시아어를 배울 때 실제로 ‘영어와 어순이 같다’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 헤맨 경험이 있다. ‘그녀는 아름답다’라는 말의 중국어는 ‘她漂亮’(Ta piaoliang), 러시아어는 ‘Oна красива’(ona krasiva)다. 이 두 문장은 ‘주어+서술어’로 되어 있지만 그 서술어는 동사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문장들은 형용사도 서술어로 사용할 수 있는 우리말과 어순이 같다.

관사가 명사의 부속물이라는 말도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제목이 《영어에는 Apple이 없다》라는 영어 관련 책이 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an apple’ 혹은 ‘the apple’이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구사할 때 가장 많이 틀리는 부분이 관사 사용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 때는 영문법 책의 목차가 한자로 쓰인 경우도 많았다. 물론 ‘冠詞’(관사)라는 한자 뜻을 가르친 교사는 만난 적이 없다. 관사의 ‘冠’은 머리에 쓰는 모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한자 명명을 중국에서 했든 일본에서 했든 혹은 우리나라에서 했든 굳이 영어의 관사를 ‘모자’라는 한자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 추측으로는 관사의 두 가지 특성 때문이다.

첫째, 단어의 앞에 써야 한다.

둘째, 반드시 써야 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관사를 명사의 부속물 취급하다니…… 거듭 말하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의 애로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아무리 친해도 우리집 형제와 옆집 형제가 한 형제일 수는 없다. 영어로부터 시작된 원칙 파괴가 국어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사실 심각한 문제이다. 사회 현상 때문에 언어가 바뀌고 그 바뀐 언어가 다시 새로운 사회 현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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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부터 시작된 원칙 파괴가 국어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국어 파괴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 우리말은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순으로 해야 하지만 주어가 명확할 때는 주어를 생략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말에서는 ‘주어’가 근거 없이 사라지고 있다. “골문을 향해 달려가는 ○○○선수입니다”라는 식이다. 스포츠 중계 중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특히 많다. 물론 어쩌다 한 번 이런 표현을 쓸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오늘의 MVP는 OOO선수입니다”라는 식으로 선수 이름을 강조할 때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경우 ‘MVP는’이라는 주어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 “골문을 향해 달려가는 ○○○선수입니다”의 문장에는 주어가 아예 없다.

이 점에 대해 지적하면 많은 사람이 ‘○○○선수입니다’가 주어 아니냐고 말한다. 당연히 아니다. ‘○○○선수입니다’는 서술어이다. 그것도 주체를 잃어버린 서술어이다. 그런데 중계 내내 이런 식으로 말하는 캐스터도 있다. 어디서 배운 겉멋인지는 몰라도 심각한 국어 파괴 행위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방송이 표준어와 바른말을 사용하는 모범이 되었는데 요즘에는 방송 언어도 믿을 수 없어졌다.

이런 이상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SNS 등에서 남을 비방할 때 ‘주어 없음’이라고 쓰는 경우이다.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상대가 문제를 제기해도 “너한테 한 얘기 아닌데”라고 발뺌할 여지는 남기겠다는 의도이다. 근거 없이 주어를 생략하는 말투가 혹시 사람들이 갈수록 자신의 행동에 무책임해지는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느닷없는 문법 이야기를 왜 이리 길게 하는가 의아하고 짜증이 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것 몰라도 말만 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들을 우습게 흘려보내면 나비 효과처럼 상상할 수 없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편리를 도모하는 것과 편법을 쓰는 것은 크게 다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원칙대로 제대로 가르친 후에 그걸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야 하는 거다. 한동안 “골치 아프고 따분한 건 몰라도 돼. 아무렇게나 쉽게 살아도 괜찮아”라고 가르친 것이 오늘날 비리와 부패의 원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가까이 있어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세상이 두 쪽 나도 거짓말과 도둑질과 살인은 나쁜 짓이다. 내 돈은 내 돈이고 네 돈은 네 돈이다. 해도 되는, 남을 괴롭히는 짓은 없다. 자신이 한 일은 책임져야 한다. 이런 것들이 절대 버릴 수 없는 삶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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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어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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