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칼의 나라' 일본은 '붓의 나라' 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
[김용삼 칼럼] '칼의 나라' 일본은 '붓의 나라' 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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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획득한 랴오둥(遼東)반도를 러시아·독일·프랑스 삼국간섭에 의해 중국에 돌려준 바 있다.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을 벌여 러시아에 복수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조차지 산둥반도를 빼앗아 독일에 보복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인도차이나반도의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여 프랑스에 보복했다. 사무라이들은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복수하는 것이 그들 세계의 법도다.

#. 창씨개명에 대한 소고(小考)

한국 정치권에서 욱일승천하고 있는 반일(反日) 감정 에너지의 분출량을 측정하면 가히 일본인 살점을 뜯어내 씹어먹을 기세다. 어쩌다 한국인들은 일본과 일본인은 서로를 이토록 저주하는 관계로 전락했을까? 

필자는 한국인의 반일 감정과 중국을 향한 사대 모화사상은 날줄과 씨줄로 겹겹이 얽힌 동일 운명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중국에 투항한 한국인들은 중화 문명이야말로 지고지순의 가치로 여겼고, 자신들을 중국인의 후예라고 굳건히 믿었다. 조선은 중화를 종족이나 국가보다 우선했고, 중화 천하일가에 동참하기 위해 중국 주(周)나라 무왕으로부터 조선 왕으로 책봉 받았다는 기자(箕子)를 시조로 삼고, 한미족 모두가 기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겨 왔다. 문제는 기자란 인물이 실제로 한반도로 이주해 와서 기자 조선을 창업했는지를 명쾌하게 입증할 수 있는 근거나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주 한씨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씨들은 기자와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굳게 믿고, 그런 사실들을 자신들의 족보에 기록해 놓았다. 자기들 시조가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해야만 사회적 예우를 받는 ‘중화에 미친 나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사회적 풍토가 만연하면서 한국인들은 자기들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인이라고 족보를 날조했고, 성씨와 이름을 중화 방식으로 창씨개명하는 경쟁을 벌였다.

고려말 주자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던 정몽주(鄭夢周) 이름을 뜻풀이하면 꿈에서라도 주나라를 보고야 말겠다는 뜻이다. 조선 개국의 주인공 정도전(鄭道傳)은 도를 전한다는 뜻인데, 그가 말하는 도란 곧 주자성리학이다. 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의 부친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아들 이름 작명 과정에서 중국의 전설적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이름을 차용했다. 첫째는 복희씨(伏羲氏)를 따 이희신(李羲臣), 둘째는 요(堯)임금을 빌려 이요신(李堯臣), 셋째는 순(舜)임금 이름을 가져다 이순신(李舜臣), 넷째는 우(禹)임금 이름을 차용하여 이우신(李禹臣)으로 지었다.

그 결과 이름만 보면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일제 말기에 조선총독부가 일본식 창씨개명을 유도한 이유는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중화권에서 분리시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이루기 위한 시도였다. 한국인들이 일본식 창씨개명을 한 것은 일본의 강요 때문이라고 강변하지만, 사실은 한국인들 스스로 알아서 한 사례가 훨씬 많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식 창씨개명을 했음을 알리고 있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식 창씨개명을 했음을 알리고 있다.

세상이 바뀌자 일본식 창씨개명을 한 역적 놈들은 모조리 친일파로 몰아 사회적·정신적 주리를 틀고 부관참시를 강행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식 창씨개명을 그토록 혐오·저주하는 심리적 기원은 그것을 요구한 주체가 중화 문명이 아니라, 주자성리학자들이 “왜놈”으로 극력 멸시해 왔던 일본이었기 때문이란 것이 필자의 분석이다.

#. 일본의 한국학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본 조선·조선인

조선총독부는 1921년 『조선인』이란 단행본을 간행했다. 동경제국대 출신의 한국학 전문가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저자다. 일본이 전쟁이 아닌 조약에 의해 조선을 식민지로 획득한 후 대체 조선은 어떤 나라이며, 조선인들의 심리상태는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총동원하여 조선의 관습과 제도, 철학과 사상, 문학작품과 전설, 속담 등등을 총체적으로 연구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탄생한 저작이다.

이 책의 저자 다카하시 도루는 조선을 보편적인 세계사의 발전과정을 거치지 못한 낙후한 민족으로 결론내렸다. 희한하게도 조선에는 고유한 문자인 이두와 한글이 있었으나 그것으로 탄생한 문학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카하시는 “형식과 사상 모두 중국의 철두철미한 모방으로 일관한 결과 조선은 정신적으로 중국에 완전히 흡수되었다”라고 결론 내렸다(다카하시 도루 지음·구인모 역,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48).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인』을 번역한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의 표지. 이 책에서 다카하시 도루는 "조선은 정신적, 사상적으로 중국에 완전히 흡수된 나라"라고 평했다.
한국인의 심성을 연구한 저작 『조선인』의 저자 다카하시 도루. 

다카하시는 조선이 그토록 낙후한 이유는 한국인들이 자국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고 중국 역사만 죽어라 공부한 덕분이며, 그 결과 “조선인들은 역사의 제일 요소인 어떤 사건이 왜 일어났고, 어떤 결과를 이루었나 하는 인과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라고 분석했다. 한 마디로 조선인의 역사의식이나 철학, 가치관은 중국을 따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로 평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조선의 정치는 500년 동안 어떻게 조선 사회를 주자성리학의 이상에 합치시키는가 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중국의 유학은 학파가 주자학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주자학과 대립했던 육상산(陸象山), 왕양명(王陽明)도 있었고, 노장(老莊) 학문도 중요한 흐름의 하나였다. 조선은 오로지 한 번 주자학을 받든 이래, 다른 학파나 학문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이단시하고 배척했다.

철학은 자유로운 토론의 학문이다. 다카하시는 조선에서는 자유로운 토론이 금기시되었고, 700년간 애오라지 주자학만 맹종한 결과 다른 학문은 존재하지 못해 모든 학문은 진보도, 발전도 없이 화석화되었다고 진단했다(다카하시 도루 지음·구인모 역, 앞의 책, 51쪽). 그 결과 중국에 기울어진 사상의 고착성이나 종속성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한 마디로 조선은 주자성리학 탈레반의 왕국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탈레반 나라에서 몇 십 년 전에 일본식 창씨개명에 동조한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것은 주자성리학 탈레반을 너무 우습게 보는 시선인 것 같다.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인"을 번역한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의 표지.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인"을 번역한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의 표지.

#. 일본인이 분석한 조선인의 10가지 특성

다카하시 도루는 조선과 조선인의 심성을 분석한 후 조선인은 ①사상의 고착, ②사상의 종속, ③형식주의, ④당파심, ⑤문약(文弱), ⑥심미 관념의 결핍, ⑦공사(公私)의 혼동, ⑧관용과 위엄, ⑨순종, ⑩낙천성을 특징으로 꼽았다.

다카하시는 조선의 사상은 고인 물이 되어 썩어버렸으며, 사상과 제도, 철학 등 모든 것은 중국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조선인들이 당파싸움에 익숙한 이유는 유일한 취업의 길인 관료사회가 중앙직·지방직을 다 합쳐도 900여 자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리를 놓고 매년 쏟아져 나오는 급제자들이 지연·학연·혈연으로 무리를 이루어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조선에 봉건제도가 부재했던 이유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함으로써 중앙정부에 맞서는 지방 권력이 탄생하여 봉건제도가 싹 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선인의 심미관이 결핍된 이유는 유교 덕분이라고 진단했다. 공자는 오로지 정치와 도덕을 학문 수양의 근본으로 삼았고, 실용과 상관없는 예술은 악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공사(公私)의 구분이 사라진 나라가 된 이유는 관리의 봉급을 너무 적게 책정하여 먹고 사는 문제는 관리들 스스로 알아서 책임지도록 한 중국 제도를 그대로 도입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조선의 지방행정 공무원인 아전, 서리는 아예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관직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적인 갈취를 일삼다 보니 공사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조선인이 순종을 미덕으로 아는 민족이 된 이유는 유교의 교리 덕분이다. 유교는 천부인권이나 개인의 인격, 사민평등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군신·반상(班常)·부자·남녀·부부·적서(嫡庶)·장유(長幼)·사제의 차별 및 순종을 당연시하여 하층민은 복종할 의무만 주어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카하시는 한국인들의 장점과 약점을 실증적으로 분석해 냈다. 

#. 조선 사회의 개조는 가능한가?

다카하시는 자신의 저서에서 조선의 개조를 위한 현실적 방법론도 제시하고 있다. 우선 그는 조선인의 사상은 주자성리학 하나이므로 당분간 유교의 권위가 맹위를 떨칠 것으로 보았다. 일본에 합방된 1910~20년대 조선 주민의 8할은 농업에 종사했고, 경제는 원시적 수준이었다. 부자 소릴 듣는 사람들도 부의 수준은 빈약하기 짝이 없고, 치부의 원천을 조사해보면 정치적 수단으로 이권을 독차지하여 일군 것이다. 즉 큰 부자는 국왕이나 중앙정부와 결탁하여 협잡 수단을 쓰고, 작은 부자는 지방 관리와 결탁하여 가련한 농민을 착취한 결과물이었다.

조선의 경제력은 대단히 취약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학문은 과거급제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여 학자들의 평생 과업은 다름 아닌 고등문관시험에의 급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카하시는 조선이 학문과 종교의 정치적 구속에서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조선이 진정한 진보의 가능성을 지닌 사회로 개조되는 의미 있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했다. 정신적 개조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조선 교육의 근본이 제대로 설 수 있다는 다카하시의 분석 및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본다.

다카하시는 조선 개조의 두 번째 근본적인 문제는 정실 사회를 실력 경쟁의 사회로 뜯어고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치적 동력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조선에서 정치의 부패는 사회 전부를 부패하게 만든다. 이런 풍토에서는 사회 전부가 공사를 혼동하여 사농공상을 불문하고 사람과 사람의 교류나 거래는 모두 정실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조선 정치무대의 기초는 과거제도에 있다. 그런데 과거제도가 가장 노골적이고 추악한 정실의 진흙탕이 됨으로써 조선은 모든 사회가 절망과 혼돈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다고 다카하시는 진단했다. 따라서 정실에 얽매인 조선을 실력 경쟁의 사회로 개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지식과 기능의 차이를 공정하게 판정하여 지식과 기능이 높은 사람에게 상급의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실천적 대안을 제시했다.

다카하시는 조선인의 형식주의, 심미 관념의 결핍, 문약, 당파심,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기질 등은 조선인이 근대적 학문을 배우고, 일본의 통치를 통해 개조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조선인의 관용과 위엄, 순종의 태도와 낙천성은 길이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조선인의 정신적·물질적 생활 수준을 일본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도록 일본인의 문화를 조선인에게 이입하여 조선의 인간과 사물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될 때 일선병합의 취지를 실현하여 완전한 내선일체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 모욕당하면 반드시 복수하는 것이 사무라이 세계의 법도

일본은 조선 통치를 위해 수많은 학자를 동원하여 한국의 지질에서부터 기후, 생산물, 토양의 분석은 물론 한국인의 정신세계, 심지어 그들이 믿는 귀신과 풍수지리에 이르기까지 소름 끼치도록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그 결과물을 한국 통치의 밑거름으로 삼아 한국인을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매는 데 성공했다.

다카하시는 조선인은 힘이 센 자가 가하는 압박에는 견디고 복종하나, 사정이 바뀌면 감히 불평하기도 한다면서 “조선인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단호하고 위엄 있는 간단한 법령을 갖추고, 한 번 법령을 발포하면 변경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법령을 자주 변경하면 그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도록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고 제안했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 체결한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고, 1965년 한일 수교 과정에서 합의했던 징용공 배상 문제까지 파기함으로써 일본과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과연 일본은 국가적 이런 모욕을 어떤 형태로 표출할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 체결한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고, 1965년 한일 수교 과정에서 합의했던 징용공 배상 문제까지 파기함으로써 일본과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과연 일본은 국가적 이런 모욕을 어떤 형태로 표출할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와 체결한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고, 박정희 정부가 체결한 한일조약의 일부 조항까지 파기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일본은 한국을 정상 국가로서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징용공 판결을 토대로 일본 기업의 주식을 강제 처분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경우 일본이 어떤 대응 조치로 맞설 것인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만약 한국인들이 일본과 일본인들의 심성, 사고방식, 민족성과 기질을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했다면 일본이 어느 정도로 무시무시한 나라인지 우리 국민이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무라이들은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복수하는 것이 그들 세계의 법도다. 과거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획득한 랴오둥(遼東)반도를 러시아·독일·프랑스 삼국간섭에 의해 중국에 돌려준 바 있다. 이후 일본은 와신상담(臥薪嘗膽), 절치부심(切齒腐心)을 국가 슬로건으로 앞세웠고,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표현처럼 러시아와 전쟁을 위해 전 국민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군사력 건설에 전력투구했다.

그 결과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무릎 꿇렸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에 보복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인도차이나반도의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함으로써 프랑스에 당했던 삼국간섭의 패배를 설욕했다(강정일, 「지정학으로 본 러시아제국의 對한반도 정책(1884-1904)」,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13, 203~204쪽).

뿐만이 아니다.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곤란에 처하자 고종과 민왕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조선은 순식간에 러시아 세상으로 돌변했다. 수억 엔의 전비와 일본 군인들의 피로 이뤄낸 청일전쟁의 성과가 물거품이 되는 모습을 참고 견디기에는 ‘사무라이들의 피’가 너무 뜨거웠다. 그들의 국가적 복수극이 을미사변이었다. 사무라이의 나라답게 일본은 자신들을 모욕한 조선에 확실하게 보복을 한 셈이다.

문재인 정부의 반일 드라이브가 한일 관계에 끼칠 해악은 과연 어떤 형태로 표출될까? 필자가 예견하건대 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명운을 가르는 충격파가 조만간에 닥칠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할 것 같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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