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이명희 씨 "북한에서 예닐곱번 자살 시도...사는 것이 너무 기차고 말같지 않았죠"
-탈북민 최은혜 씨 "북한은 먹고 살려고 중국에 나온 사람을 간첩 취급하고 반역자 취급하는 더러운 땅"
-"중국에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라 마음이 굉장히 가난합니다"
-지현아 작가 "중국에서 탈북민들이 갈 곳은 교회밖에 없었어요"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 국가 북한. 김일성은 북한에서 기독교를 ‘박멸’하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 북한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처형을 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러나 북한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고 있는 이른바 ‘지하기독교인’은 4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5만~12만, 최대 20만 명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반인륜적 처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정권의 가혹한 박해와 살해 위험에도 불구하고 북한주민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정권의 삼엄한 감시체제 아래 이들은 어떻게 신앙을 지켜가고 있을까. 이 보고서는 독재 권력과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영혼의 존재와 자유를 향한 갈망에 대한 기록이다.

신을 찾게 만든 것은 체제에 대한 환멸과 절망

이명희 씨(가명, 73세)는 북한에서 예닐곱 번 자살을 기도했다. 이 씨는 북한에서의 삶에 대해 “사는 것이 너무 기차고 정말 말 같지 않았다”고 했다. “자유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가 엉망이었어요. 생활이라는 것은 아예 나물죽도 없어서 못 먹는데...(탈북했던) 아들도 중국에서 잡혀서 삼년을 감옥살이 했죠”

이 씨는 딸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뒤에 두만강에 몸을 던졌다. 딸은 탈북 후 남한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한행을 한 사람들은 몽땅 정치 수용소에 보내라’는 김정일 지시의 첫 시범 케이스에 걸려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씨는 그동안 자식들 앞길에 지장을 줄 것 같아 ’대놓고’ 자살 시도를 할 수 없었다. 북한에서는 자살한 사람에게 ‘반역자’ 딱지를 붙인다고 했다. 그 가족들은 ‘반역자 집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모두 추방당한다. 딸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자 이 씨의 집안은 졸지에 ‘반역자 집안’이 됐다. 그는 “내가 자살한다고 더 반역자될 거는 없었기 때문에” 두만강에 ‘마음놓고’ 뛰어들었다. “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어요. 정권에 대한 반항심이 더 커졌죠. 이런 데서 살아 뭐하나. 하나님 모를 때니까 죽는 게 최고였죠” 그의 딸은 결국 젊은 나이에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해주의 한 병원에서 아기에게 수유를 하고 있는 북한 여성(사진=RFA)
해주의 한 병원에서 아기에게 수유를 하고 있는 북한 여성(사진=RFA)

 

최은혜 씨(가명, 47세)는 2006년 32살의 나이로 탈북했다. 북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별 장사를 다 해봤지만 몸에 안 맞는 장사를 하려다 돈을 뭉텅이로 떼인 적이 수두룩했다. “국수를 이쪽저쪽 고장으로 날라다 파는 것도 해봤고 옥수수 국수를 사서 가루를 내서 킬로당 얼마에 파는 것도 해봤어요. 세멘트, 그것도 깡통에 한차씩 해갖고 팔았는데... 돈은 항상 내가 대는데 내가 장사 머리가 없어서 (동업자로) 사람을 똑똑한 걸 고르면 이것들이 영락없이 나를 등쳐먹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본전 찾으려 1년 넘게 그 집에 가서 행악을 부려야 되고... 내가 알았죠. 나는 장사가 안 되는 사람이구나”

번번이 사기를 당했던 최 씨는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올 생각으로 강을 넘었다. 중국에는 고모들과 사촌 언니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한 중국인 집에 한국어 과외 선생으로 3년 반 동안 있었다. 그러나 강제북송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북한에서 나올 때 49kg였던 몸무게가 중국생활 동안 40kg으로 줄었다. 불면증으로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탈북자에겐 자유가 없었기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2010년 고향땅 북한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러나 김정일이 이년 전 ‘자본주의 물을 한번이라도 먹은 것들은 북한에서 못 산다. 달아나고 달아나니까 자수해도 받아주지 말고 무조건 5년 이상 감옥에 처넣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며 오빠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대했다.

최 씨는 북한체제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때 정말 환멸이 느껴졌어요. 내가 나라를 배반하려고 한 적도 없었고, 가족이나 국가에 정말 배은망덕한 짓을 한 적도 없었고 순전히 먹고 살려고 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려고 했더니 간첩 취급하고 반역자 취급해서 넣겠다는 거예요. 이 더러운 땅...” 그는 “중국에서 3년 동안 살면서 북한이 완전 사기와 거짓의 나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북한이 나쁘다는 거. 내가 배웠던 것이 거짓이었다는 거. 너네가 많은 부분을 거짓말하고 있다는 거. 그걸 알았죠.”

북한으로 돌아갈 길이 막힌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왜 살겠다고 이렇게 악을 쓰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굳이 살아서 또 뭐하겠다고... 그래서 죽으려고 했죠. 한번에 10알 이상 주지 않는 약을 제가 40알, 50알 모아서 가루를 내서 가지고 있었거든요. 감옥에는 죽어도 끌려가기 싫었어요...”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마지막으로 사촌 언니를 만났다. 사촌 언니는 그녀를 교회에 데려갔다. 최 씨는 그곳에서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6개월 동안 물질적 후원을 받으며 성경을 읽는 ‘일’을 얻게 됐다. 교회는 그녀에게 머물 집도 제공했다. 최 씨는 그곳에서 신앙을 갖게 됐다.

김미진 씨(가명, 38세)는 2006년 처음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북한에서 굶어 죽어가는 가족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방(중국)에 나가 식량을 구해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 건너에서 그녀를 기다린 것은 인신매매단이었다. 당시 그녀는 23살에 불과했다. 김 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거의 모든 탈북여성들이 그렇듯 저도 인신매매로 팔렸다가 이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한국에 오려고 연길로 갔다가 그곳에서 복음을 듣게 됐습니다. 탈북민들은 중국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라 마음이 굉장히 가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길의 한 교회 집사님이 사도행전 16장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마음속에 꽂혔어요. 나도 구원받고 우리 가족도 구원받는다는 말씀에 제가 먼저 믿기로 결단을 하고 북한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김 씨는 2008년 북한에 들어간 뒤 일 년 반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주일마다 가족들과 비밀리에 예배를 드렸다.

박민우 씨(가명, 41세)는 북한체제에 ‘환멸’을 느껴 탈북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남파 간첩으로 북한에서 ‘공로자’ 대우를 받았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버지 덕분에 좋은 성분을 갖게 된 그는 보위부 하사관으로 군 복무를 할 수 있었다.

박 씨가 군 복무를 하던 중 “먹고살기 힘들어서” 중국과 밀수를 하던 그의 이모부가 보위부의 조사를 받다 고문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분노한 그는 이모부를 죽게 만든 보위부 간부를 찾아가 심하게 때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10년 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감옥 안은 배급이 형편없었다. 그는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78kg이었던 몸무게가 45kg으로 줄어들었다. ‘거의 죽게 됐던’ 그는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박 씨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탈북을 했다. 감옥에서 중국에 가면 배불리 실컷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탈북 후 중국쪽 백두산 기슭을 헤매던 그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조선족 기독교 선교사였다. 선교사는 거지꼴을 한 그에게 씻을 물을 데워주었다. 닭을 잡아 삼계탕도 끓여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선교사는 오갈 곳 없는 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선교사의 삶을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교회밖에 갈 곳이 없었어요”

지현아 작가
지현아 작가

 

탈북민 출신인 지현아 작가는 탈북 후 중국의 여러 조선족 교회들을 전전했다. 강제북송의 위험에 노출된 탈북민들에게 교회는 유일하게 안전한 피신처였다. “북한에서는 ‘기독교’라는 말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교회는 나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중국에서 탈북민으로 강제북송 위험에 처했을 때 갈 곳은 교회밖에 없었어요.”

중국 조선족 교회들은 아무 조건 없이 그녀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지 작가는 “북한에서는 교회에 가면 먹을 것을 주지만 결국 우리를 이용해먹는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그 말이 가짜였다는 것을 중국에서 깨달았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할 뿐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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