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 총장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고 한달 뒤에 발생한 12·12사태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집권에 따른 5공화국 출범에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비상계엄 상황에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체포됨으로써 박 대통령 사후 진공상태나 다름없었던 권력은 급격히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쪽으로 이동했다.

12·12에 대해서는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검찰에 의해 이루어진 수사와 대법원 판결에 따라 상관살해 등 하극상, 정권탈취를 목적으로한 군사반란으로 정리된 바 있다. 노재현 당시 국방부장관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결재없이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문제는 1979년 12월12일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정승화 게엄사령관 체포에 나서게 된 이유와 계기다. 김재규는 10·26 당일,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범행장소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10월27일 게엄령이 선포되고 포고령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합동수사본부가 군 경 검찰 중앙정보부 합동으로 구성되자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와 특수부 소속 검사 7명이 전두환 본부장이 이끄는 합수부로 파견됐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로 합수부에 파견된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은 얼마전 기자에게 “당시 나를 비롯한 파견검사 전부가 처음부터 김재규와 함께 만찬장에 있었던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은 물론 불과 수십미터 거리에서 대기했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에 대해서도 공모 여부, 즉 공범 수준의 조사와 조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이 전 고검장은 “하지만 정승화 총장의 당일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바람에 조사를 할 수가 없었고, 10월28일 전두환 합수본부장에 의한 중간수사결과 발표에서도 이런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나를 비롯한 검찰의 파견검사들은 이후에도 줄곧 정승화 총장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전두환 본부장과 합수부(보안사) 관계자들에게 건의했지만 계엄상황에서 직속 상관인 정 총장에 대해 어떻게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방법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노재현 국방부장관과 최규하 대통령을 설득, 재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12·12 당일 무력을 동원해 기습체포에 나섬으로써 군사반란이라는 규정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에대해 당시 이 전 고검장과 함께 합수부에 파견됐던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만큼 김재규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컸는데 10·26 후 시간이 지나면서 정승화 총장이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등 김재규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일종의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12·12 사태가 발생하기 전 정승화 총장이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건의해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교체 및 좌천을 추진하다고 있다는 정황이 파악되자 전 본부장과 보안사 참모들은 이를 김재규에 대한 구명운동이 시작되는 상황으로 받아들일 정도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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