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쓰레기’ 미스터리...도대체 북한엔 지금 무슨 일이?

연평도의 한 해안가.

동지섣달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쓸쓸한 바닷가를 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다.

긴 막대기를 손에 들고, 해변 구석구석을 살피다 무엇인가를 발견하면 소중하게 자루 속에 집어넣는다. 매서운 바닷바람에 볼이 얼고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발밑을 살피는 두 눈이 반짝인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지난 12월 20일 연평도 해안가에서 북한 쓰레기를 찾고 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지난 12월 20일 연평도 해안가에서 북한 쓰레기를 찾고 있다.

그가 찾는 것은 북한에서 떠내려 온 ‘쓰레기’

새로운 디자인의 과자 봉지를 발견하면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다.

이날 그는 ‘치즈 에스키모’를 주웠다.

해변가 조약돌 틈새에서 꽃잎처럼 수줍게 흔들리던 병아리빛 플라스틱 포장지를 처음 발견했던 그 순간을 그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인천시 옹진군의 대연평도의 한 바닷가
인천시 옹진군의 대연평도의 한 바닷가

‘치즈 에스키모’는 평양의 유명한 ‘오일건강음료종합공장’에서 생산한 치즈맛 아이스크림이다. 물론 내용물은 없고 포장지만 남아있다. 귀여운 소 캐릭터 그림 아래 ‘치즈맛 그대로’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치즈의 독특한 향’이 담겼다는 홍보문구도 있다. 북한에서는 외래어를 배척해 아이스크림은 ‘얼음 보숭이’로 부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도대체 언제부터 북한에서 아이스크림을 ‘에스키모’라고 불렀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북한이 타도 대상인 ‘서양 제국주의’의 산물인 ‘치즈’를 인민들의 먹거리에 사용하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엉긴 우유’나 ‘우유 발효 식품’ 등 ‘주체식’ 조어(造語)를 쓰지 않고 외래어 그대로 ‘치즈’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연평도 해안가에서 수집한 북한 쓰레 '치즈 에스키모'
연평도 해안가에서 수집한 북한 쓰레 '치즈 에스키모'

아니, 그런데 ‘치즈맛 그대로’를 담았다는 것은 북한인민들이 이미 ‘치즈맛’을 좀 봤다는 것 아닌가? 치즈를 먹어본 적이 없다면 ‘치즈맛’을 알지 못할 테니까. 심각한 식량난으로 제2의 고난의 행군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에서 ‘치즈’를 일상적으로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평양의 유명 식음료 공장인 ‘오일건강음료종합공장’에서 만들었다는 표시가 없었더라면 이것이 북한 제품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북한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날 그가 수확한 또 다른 북한 제품은 ‘망고 요구르트’다. 역시 평양의 ‘오일건강음료종합공장’에서 만들었다. 세련된 포장 디자인과 페트병 모양이 흡사 한국 제품처럼 보인다. 귀여운 서체로 ‘망고’라고 쓰여 있고, 잎사귀가 달린 노란 망고 열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외래어 ‘요구르트’도 선명하다.

북한산 망고 요구르트. 역시 연평도 해안가에서 주웠다.
북한산 망고 요구르트. 역시 연평도 해안가에서 주웠다.

북한의 망고 사랑은 유별나 보인다. 이날 연평도 해변가에서 망고 요구르트 외에 ‘망고 우유’와 ‘망고 에스키모’ ‘망고 단물’ ‘망고 탄산수’를 주웠다. 요즘 북한에선 ‘망고맛’이 인기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다양한 ‘망고’ 제품들이 만들어질 리가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북중국경이 폐쇄된 지 2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도대체 북한은 어디서 ‘망고 액기스’를 수입하는 것일까? 북중국경이 폐쇄됐다지만 물밑에선 북한과 중국 간 교역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북한산 ‘망고맛’ 요구르트를 손에 들고 생각이 많아진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지난 6일 일년 동안 서해5도에서 수집한 북한 쓰레기를 모아 '서해5도에서 북한 쓰레기를 줍다' 책을 출간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지난 6일 일년 동안 서해5도에서 수집한 북한 쓰레기를 모아 '서해5도에서 북한 쓰레기를 줍다' 책을 출간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지난 일 년 동안 무려 1,400여 개의 북한제품 포장지를 수집했다. 어느 날 서해5도 해변가에서 북한 쓰레기를 발견한 뒤로 그는 ‘북한 쓰레기’에 심각하게 꽂혔다.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대청도와 소청도, 백령도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 그가 수집한 북한제품에는 35여 종의 에스키모와 30여 개의 공장에서 생산한 수십 종의 단물(주스), 단졸임소빵과 튀긴빵, 와플, 즉석국수와 우동, 쏘세지와 마요네즈, 매운닭발쪽, 수십 종의 맛내기와 막걸리, 맥주, 담배까지 다양하다.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5도의 해변가 곳곳은 군사시설로 통제구역이다. 군부대에 통문을 열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겨우 철문이 열린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해변가에서 그는 북한의 흔적을 찾는다. 지난 여름의 어느 이른 아침, 간밤에 파도에 떠내려 온 주사바늘을 바위틈에서 포장지 째로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은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환호를 질렀다.

강 교수에게 북한 쓰레기는 그리운 이가 북한에서 보내온 편지와 같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보물이다.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지만 북한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간접적인 연구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가 수집한 북한 쓰레기는 북한의 변화를 보여준다. ‘화이트 초코레트’를 입힌 ‘락화(땅콩)생강정’과 ‘치즈맛 에스키모’, ‘망고맛 탄산단물’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되고 폐쇄적인 북한사회에 어떤 종류의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암시한다.

북한 제품 '고구마 에스키모'
연평도 해안가 바위틈에서 발견된 북한 제품 '고구마 에스키모' 포장지

그리고 그 변화의 바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대다수의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살 때 이런 물건을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북한이 이렇게 좋은 물건들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평양의 저 높은 고위 간부들끼리 먹고 쓰는 물건일 거라고 했다. 실제로 그가 수집한 제품들은 거의 모두 평양에 위치한 공장들에서 만들었다. 총 131개의 공장들 가운데 111개가 평양특별시 소재였으며, 강원도 13개, 황해남도 1개, 황해북도 4개, 남포특별시 1개, 라선특별시 1개였다. 한 탈북민은 김정은 정권이 평양 고위층들이 보유한 달러를 빼내기 위해 이런 상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강 교수가 만난 최근에 탈북한 발랄한 10대 여학생은 고향 양강도 혜산시의 장마당에서 에스키모를 자주 사먹었다고 말했다. 한류에 심취했던 그녀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고구마 에스키모’와 ‘대추맛 에스키모’. 다른 것은 맛없어 보여서 사먹지 않았다고 한다. 에스키모 한 개의 가격은 중국 돈으로 1위안. 북한 돈으로 1500원 정도다. 북한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4000~5000원 정도임을 감안할 때 북한에서 하드 바 한 개의 가격은 한 달 월급의 3분의 1정도인 셈이다. 그녀의 고향에는 에스키모 도매상도 있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생산된 아이스크림이 북중국경 지역까지 유통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12월 20일 연평도 해안가에서 주운 북한 제품 '빠다 단설기'. 단설기는 카스테라같은 부드러운 빵으로 알려졌다.
12월 20일 연평도 해안가에서 주운 북한 제품 '빠다 단설기'. 단설기는 카스테라같은 부드러운 빵으로 알려졌다.

강 교수는 “북한 쓰레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면서도 “북한의 평양뿐만 아니라 북중국경에 인접한 혜산시 장마당에서조차 학생들이 아이스크림을 자유롭게 사먹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김정은 정권 들어 북한경제와 시장의 사장경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추정해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북한제품에 남한의 신라면과 새우깡, 포테이토스틱과 같은 유명 과자들을 카피한 제품 포장지가 다양하게 발견된 것에 대해서는 “한류 등의 영향으로 북한주민들의 소비자로서의 취향이 높아진 탓에 북한 김정은 정권이 주민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맞추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연평도의 석양
연평도의 석양

강 교수는 북한주민들의 힘을 믿는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통제적이고 폐쇄적인 ‘창살 없는 감옥’ 북한에서 이처럼 개인의 선택과 취향이라는 것이 생겨나면 북한주민 스스로 북한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장”이라며 “이런 제품들을 서해5도에서만 주웠다면 북한의 중앙집권제에 의해 배급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평양 이외의 지역에서도 제품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동해안 지역인 강원도 원산에서 생산된 제품이 북한 내부에서 유통이 되고 거래가 된다는 것은 북한에 시장경제 방식이 유입되고 있다는 것으로 이는 곧 “북한의 변화의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천에서 하루에 꼭 한번 운항하는 배를 타고 세 시간 조금 안 되는 바닷길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연평도. 연평도에서 만난 그의 얼굴에 지난 여름의 햇살이 겹겹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닷가 너머로 북한 땅이 손닿을 듯 지척에서 아른거렸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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