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8년부터 1월 1일을 ‘설’이라 부르는 명칭을 폐지했고, 이틀이었던 신정 연휴도 하루로 줄였다. 김대중 정부가 이 조치를 시행한 이유는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난국을 극복하고 이중과세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신정을 강화하고 음력설을 폐지한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와는 정반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조치로 인해 음력설은 민족 고유의 명절로 확고부동한 뿌리를 내렸다. 독재정권은 일제의 뒤를 이어 양력설을 강제하고 민주정권은 민족의 명절로 음력설을 부활시킨 셈인가?

#. 100여 년 탄압을 이기고 ‘음력설’ 쟁취?

대선 정국으로 어수선한 와중에도 어김없이 새해는 밝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1년을 설계하고, 때론 작심삼일(作心三日)로 후회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결의도 다진다.

그런데 달력을 보니 신정 한 달 후, 그러니까 2월 1일이 설날이란다. 설날의 경우 앞뒤로 연휴여서 사흘을 쉬게 되어 있는데, 올해는 연휴가 토·일요일과 이어지면서 5일을 휴식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 중반을 향해 달리는 개명 천지에 음력설이라니…. 이 땅에 양력이 처음 도입된 시기를 살펴보니 1896년이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 정부가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면서 조선 문명사 최초로 태양력이 등장했다. 왕실의 탄생일을 양력으로 수정했고 수많은 국가와 왕실의 공식 제사와 축제 모두 양력에 맞췄다. 그 후 126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음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민 대다수는 음력으로 생일을 기념하며 '손 없는 날'을 따져 이사 가는 날을 정하고, 절기도 음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조선일보 1면 오른쪽에는 오늘이 음력 며칠인지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한국인의 음력설에 관한 애정은 누구도 못말릴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한겨레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한반도를 점령했던 일본 제국주의와 광복 이후 나라를 지배한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은 100년 가까이 ‘설’의 전통을 뿌리뽑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하지만 민중들은 겉으로는 적응하고 순응하는 척하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했고, 100여 년의 탄압을 이기고 결국 ‘설’을 쟁취해냈습니다. 그래서 ‘설’은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면서도 끝내 이 땅의 주인이라고 거듭 주장하는 촛불 민심을 닮았습니다.”(한겨레신문, ‘100년 수난을 견디고 명절이 된 ‘설’의 운명’, 2017년 1월 27일)

#. 왜놈이 강제했으니 거부하는 것이 마땅?

아시다시피 태양력을 도입한 주인공은 고종의 부인 왕비 민 씨가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된 직후 출범한 김홍집 개화파 정부다. 그들은 “세계 문명 표준에 맞추자”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양력 도입, 군제 개편, 종두법 보급, 우체사 설치, 독자 연호인 건양(建陽)을 선포했다. 또, 의관 제도를 서양식으로 간소화하는 복제개정(변복령)과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내렸다.

수천 년 사용해 왔던 음력 대신 듣도 보도 못한 양력을 쓰라 하고, 강제로 상투를 자르라는 명을 접한 이 땅의 백성들은 친일 앞잡이들이 조선의 혼을 통째로 왜놈, 양놈 식으로 바꾸려 한다고 의심했다. 백성들은 이러한 개악의 배후세력은 일본이라 여겼고, 개화 내각은 친일 앞잡이라며 이를 갈았다.  

그것이 아무리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고(변복령), 보건위생에 이로우며(단발령), 세계 문명 표준과 함께 함으로써(양력 도입)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깨어나 근대인이 되자는 현실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개화파의 근대적 개혁을 ‘일본화’와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그 바람에 조선의 문명개화는 큰 저항에 직면했다. 중화 문명의 정수를 간직한 지구상 최후의 존재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조선의 주자성리학자들은 묵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왜놈들이 강요하는” 제도를 수용할 수 없다며 열렬 저항했다.

#. 국가·왕실 제사 통폐합한 개화파 정부

개화파 정부는 갑오개혁을 통해 상투와 의복, 역법만 바꾼 것이 아니다. 조선의 고질병이나 다름없던 수많은 종류의 국가·왕실 제사를 통폐합하고 의식을 간소화했다. 우선 자연의 변화를 관장하는 신들에게 올리는 우사(雩祀), 사한(司寒), 기우(祈雨), 영제(禜祭), 기설(祈雪), 마조(馬祖), 사현사(四賢祠) 등 7개의 제사를 폐지했다. 우사란 매년 5월에 지내는 정기 기우제다. 기우는 비가 오지 않을 때 사직과 종묘 이하 여러 제단에서 돌아가며 지내는 각종 비를 부르는 제사를 가리킨다. 장맛비가 오래 계속되면 영제를 통해 날이 개도록 빌었으며,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으면 산천에서 기설제를 지냈다. 이런 미신 제사를 갑오개혁 정부가 통째로 폐지한 것이다.

국가 차원의 기우제는 갑오개혁 정부가 폐지했으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할 때 다시 부활되었다.
국가 차원의 기우제는 갑오개혁 정부가 폐지했으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할 때 다시 부활되었다.

이어 개화 정부는 중국인들을 받들어 모시는 대보단(大報壇), 계성사(啓聖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제사를 폐지했다. 1704년 숙종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파견해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 신종(萬曆帝) 황제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왕궁 후원에 대보단을 건립했다. 이미 명나라가 망해 없어진 지 60년 후에 말이다.

영조 시절에는 제사를 올리는 대상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崇禎帝)과, ‘조선’이란 국호를 하사한 명 태조(洪武帝)를 추가했다. 세 명의 명나라 황제를 기리기 위해 국왕이 주재하고 문무백관이 참여한 대보단 제사는 갑오개혁 정부가 폐지할 때까지 190년간 계속되었다. 2세기 내내 소중화 조선의 지도부는 망해 없어진 명나라 황제 추모에 국가적 정성을 쏟았다.

계성사(啓聖祠)란 공자 이하 다섯 성인의 부친을 모신 사당이고, 선무사(宣武祠)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邢玠)와 양호(楊鎬)를 비롯하여 전몰한 명나라 군사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정무사(靖武祠)는 임오군란을 평정한 우창칭(吳長慶)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1884년 우창칭이 사망하자 1885년 사당을 지었는데, 우창칭 이외에 우자오유(吳兆有), 왕지천(王志春) 등 조선에 파병되었던 장수 20명의 신위를 모셔놓고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모셨다.

갑오개혁 정부는 이러한 중국인을 추모하는 제사를 폐지함으로써 소중화 중독에서 벗어나려 했다. 또 왕실의례의 회수를 크게 줄이고, 날짜도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꿔 시행토록 했다.

#. 폐지됐던 제사·음력 부활시킨 광무개혁

1896년 고종은 "일본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궁녀 가마에 숨어 경복궁을 탈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왕조를 통치하던 1896년 7월 24일, 고종은 “국가 제사는 더없이 엄하고 공경스러운 것인데 그때(갑오개혁) 내각의 역신들이 자의로 재단하고 축소했으니 지극히 통탄스러운 일”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어명을 내렸다.

“새 역서(태양력)와 옛 역서(음력)의 날짜는 애초에 서로 달라 정성을 다하는 도리에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 종묘·전(殿)·궁과 각 능·원의 제향을 이전의 법식에 따라 준행하라.”

고종은 갑오개혁 정부가 도입한 태양력을 거부하고 음력을 부활시켰고, 통폐합했던 국가 제사를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이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원구단에 나가 천제(天祭)를 올린 후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 학자들은 이러한 ‘과거로의 회귀’ 선언을 구본신참(舊本新參)에 의한 광무개혁이라고 입에 거품을 문다.

광무개혁에 의해 갑오개혁 정부가 폐지했던 기우제, 기설제, 영제 등이 일제히 부활되었고, 묘(廟)·전(殿)·궁(宮)·능(陵)·원(園) 등의 제사가 다시 시행되었다. 이웃 나라들은 비가 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 양수기 개발, 댐과 보 설치, 관정 굴착을 하여 지하수를 퍼올릴 때 대한제국의 황제와 고관대작들은 도포 자락 휘날리며 기우제·기설제(祈雪祭)를 지냈고,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제발 비를 그치게 해달라고 돼지머리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영제(禜祭)를 지내는 풍수도참의 나라로 퇴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갑오개혁으로 축소되었던 국가 의례와 왕실 제사는 고종의 구본신참 노선에 의해, 그리고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국체가 격상되면서 황제국 위상에 어울리는 전례로 대대적으로 격상되고 확대되었다.

고종은 1883년 북관왕묘를 세워 관우를 크게 예우했다. 요사스러운 무당 진령군이 자신이 관우의 혼령을 받고 태어난 관우의 딸이므로 사당을 지어 모셔야 한다고 겁을 준 덕분이다. 고종과 민 왕후가 무당의 명을 받아 조성한 것이 북관왕묘다. 신통하게도 다음 해 갑신정변이 일어나 고종이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북관왕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북관왕묘는 1883년 요사스런 무당 진령군의 "나는 관우의 혼령을 받고 태어난 관우의 딸이므로 사당을 지어 모셔라"라는 명에 의해 고종과 민비가 지어바친 사당이다. 광무개혁 때 고종은 관우의 격을 왕에서 황제로 격상시켰다.
북관왕묘는 1883년 요사스런 무당 진령군의 "나는 관우의 혼령을 받고 태어난 관우의 딸이므로 사당을 지어 모셔라"라는 명에 의해 고종과 민비가 지어바친 사당이다. 광무개혁 때 고종은 관우의 격을 왕에서 황제로 격상시켰다.

대한제국 선포 후인 1901년 8월, 고종은 관왕(關王)을 관제(關帝)로 격상하라고 명했다. 그 결과 제후 신분이었던 관우는 황제로 지위가 높아졌다. 1904년 4월에는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본받을 인물이라면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관우·장비를 모신 숭의묘(崇義廟)를 돈의문 밖에 건립했다. 이 사당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유비·관우·장비를 비롯하여 제갈량·조자룡·마초(馬超)·황충(黃忠)·왕보(王甫)·주창(周倉)·조루(趙累)·관평(關平) 등 중국 장수 11명에게 융숭한 제사를 올렸다.

고종은 또 갑오개혁 정부가 폐지했던 선무사, 정무사 제사를 부활시켜 임진왜란 때 죽은 명나라 병사와 장수, 임오군란 진압의 전공을 세운 청나라 장수들에게 극진한 제사를 올렸다. 이러한 고종의 행위를 ‘광무개혁’이라고, 어려운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개명 군주”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국사학자들은 대체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인가.

#. 일본과 중국의 서양 문물 수용 방법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을 배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1871년 12월 구미 12개국 시찰에 나선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은 서양의 근대화  된 문물을 보고 처음에는 놀라고, 그 다음은 취하고, 마지막에는 미쳐버렸다. 서양 문명에 심취한 일본이었기에 천황과 국가 지도자들이 문명개화의 추진자로서 솔선하여 단발하고, 우유를 마시고, 양복을 입고, 소고기를 먹으면서 백성들을 개화로 유도했다.

일본에서는 1872년 태양력 채택과 함께 단발령이 내려졌다. 일본 군인과 경찰이 양복을 착용하면서 사무라이식 상투도 자연스럽게 폐기됐다. 주요 대신, 고위 관리들이 앞장서서 단발을 하자 변화에 민감한 일본인들은 상투의 불편함을 깨닫게 되었다. 일반 국민은 군 말없이 뒤를 따라 문명개화의 모범을 보였다(이민원, 「조선말의 단발령과 일본의 대한 정략」, 『조선 시대의 사회와 사상』, 조선사회연구회, 1998, 277쪽).

청나라는 1911년 신해혁명 당시 250여 년 강제해 왔던 변발 풍습이 공식 폐기됐다. 변발은 만주 정복왕조가 등장하면서 한족에 강요된 것이고, 명나라의 두발 양식은 조선인의 상투와 비슷했다. 청나라에서 단발령이 내려져 변발이 폐기될 당시 일부 만주족 인사들이 저항했다. 그렇다고 조선처럼 전국이 혼란에 빠질 정도의 상황이 연출되지는 않았다.

#. 유독 조선에서만 저항이 일어난 이유는?

유독 조선에서만 단발령, 복식 제도 변경, 양력 사용에 저항하는 의병봉기가 폭발하여 죽기 살기로 저항한 이유는 무엇일까? 양력, 단발, 기복적 제사 폐지 같은 개화 프로그램을 오랑캐, 짐승, 곤충이나 다름없는 ‘왜놈’들이 강요한 때문이다.

고종은 태양력 도입을 장려하는 한편에선 재위 기간 내내 음력을 존중하는 이중행태를 보였다. 한겨레신문은 이것을 “외세에 의하지 않는 주체적인 근대화 개혁에 대한 의지(양력 도입)와,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중적 의미”라고 해석했다(한겨레신문, 앞의 기사).

최익현·유인석 같은 골수 주자성리학자들이 음력과 상투를 고수한 이유는 “중국에서 오랜 옛날부터 사용해 왔던 제도"였기 때문이다. 공자가 “인간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송시열-이항로의 학통을 잇는 화서학파의 정통 적자(適者) 유인석에게 상투란 인류와 짐승을 나누는 선명한 징표였다. 이러한 주자성리학 원리주의자에게 단발은 “소중화 문명을 짐승의 처지로 전락시키는 장례식”으로 인식되었다. 음력 폐지를 비롯하여 단발령에 대한 저항은 단순한 생활의 편리나 보건위생 따위로는 잴 수 없는, ‘중화 문물의 고수’라는 문명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중대사였다.

#. 스스로 상투 자른 개화인들

유인석·최익현 류의 주자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이 양력과 단발에 목숨 걸고 저항할 때 개화 지지파와 기독교인들은 양력 사용 및 상투를 자르는 행위는 “낡아빠진 구습과 단절하는 숭고한 행위”라면서 기꺼이 참여했다.

배재학당에 다니던 이승만도 단발이 새 시대를 위한 큰 흐름이라고 판단하여 에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에게 상투를 잘라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의 스승 에비슨은 “나는 그의 상투를 단번에 잘라 테이블 위에 얹어두고는 남은 머리카락을 내 기술껏 조발해 주었다. … 이발이 끝나자 리씨(이승만)는 상투를 집어 가제에 쌌는데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면서 집에 가져가 어머님께 드리겠다고 한다”라고 기록했다(올리버 에비슨 지음·에비슨 기념사업회 옮김, 『구한말 비록』, 대구대학교 출판부, 1986, 150쪽).

이처럼 개화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기꺼이 양력을 사용하고 상투를 잘라 봉건시대적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그들은 외세나 친일 권력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단발을 시행한 것이다.

단발을 한 이승만. 이승만은 "낡아빠진 구습과 단절하기 위해" 자신의 스승 에비슨 선교사에게 상투를 잘라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은 "낡아빠진 구습과 단절하기 위해" 자신의 스승 에비슨 선교사에게 상투를 잘라달라고 요청했다. 오른쪽 두 번째가 단발을 한 이승만이다.

『명절의 탄생』의 저자 하수민은 음력설 폐지가 조선인들에게 주권 상실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고 해석했다(하수민, 『명절의 탄생: 한국 명절의 역사와 휴일의 변동연구』, 민속원, 2016). 한겨레신문은 일본이 친일 개화 정부를 앞세워 양력을 도입하고, 음력설을 폐지한 이유는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일제 시절 조선 민중들이 음력설을 고수한 것은 일제 수탈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한겨레신문, 앞의 기사).

이런 주장을 근거로 할 경우 이중과세 방지 차원에서 음력설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민족반역 세력이 민족정기를 훼손하기 위한 고도의 문화적 탄압”이자 "토착왜구의 망언" 정도로 해석되고 만다.

#. 이승만의 ‘음력설 박해설’

투철한 개화사상의 소유자였던 이승만의 음력설에 대한 견해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후에 표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제124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에 의해 3·1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했고, 식목일·한글날·추석·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했다. 하지만 음력설은 공휴일에서 제외했고, 신정은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 사흘을 연휴로 정했다. 추석을 공휴일로 지정한 이유는 양력·음력으로 이중과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6·25가 한창이던 1952년 1월 26일 이 대통령은 “일정 때 양력 과세는 남이 시켜서 한 것이오, 우리 설이 아니라고 해서 구습을 타파하지 못한 경향이 있었으나 양력 과세는 세계만방에서 공통으로 실시하는 것이오 어느 한 나라의 력(曆)이 아닌 것이다. 이중과세의 폐해는 대단히 큰 것이니 음력 과세는 단연 없애야 한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미국인으로서 한국에 귀화하여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한 민병갈(영문명 Carl Ferris Miller)은 “이승만 대통령이 ‘음력설은 우리 민족의 수치’란 표어를 내세운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63년 4월 22일). 이 대통령이 음력설을 공휴일에서 제외한 조치에 대해 한겨레신문은 “서구적 근대화의 신봉론자이자 개신교도였던 이승만은 이중과세 철폐에 있어서만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한겨레신문, 앞의 기사).

#. 독재정권은 양력설 강제, 민주정권은 음력설 부활?

박정희 정권도 양력설만 공휴일로 지정했고 음력설은 이중과세라며 인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매불망 봉건, 쇄국, 위정척사 정서에 촉촉히 젖어 있던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기존의 관습대로 음력설을 "민족의 명절"로 고수했다. 1985년 전두환 정부는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지정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민속의 날’을 설날로 바꾸고 음력설과 추석을 3일 연휴로 하는 대통령령을 개정함으로써 민족적 국민 관습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공식으로 정부가 ‘음력설’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1991년부터는 신정 휴일을 사흘에서 이틀로 축소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난국 극복과 이중과세 폐해를 없애기 위해" 1월 1일 신정 연휴를 하루로 줄이고, '설'이란 명칭도 폐지했다. 이 조치로 인해 이승만, 박정희 정부 시절 폐지되었던 음력설이 민족 고유의 명절로 확고부동한 뿌리를 내렸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난국 극복과 이중과세 폐해를 없애기 위해" 1월 1일 신정 연휴를 하루로 줄이고, '설'이란 명칭도 폐지했다. 이 조치로 인해 이승만, 박정희 정부 시절 폐지되었던 음력설이 민족 고유의 명절로 확고부동한 뿌리를 내렸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8년부터 1월 1일을 ‘설’이라 부르는 명칭을 폐지했고, 이틀 연휴도 하루로 줄였다. 김대중 정부가 신정 연휴를 하루로 줄인 이유는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난국을 극복하고 이중과세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음력설을 폐지한 이승만·박정희 정부의 이중과세 방지책과는 정반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흘을 쉬게 되어 있던 음력설은 손도 못 대고, 신정 연휴를 하루로 축소한 이 조치로 인해 음력설은 민족 고유의 명절로 확고부동한 뿌리를 내렸다.

이와 관련, 한겨레신문은 “일제로부터 이어져 온 100년 가까이 이르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저항하며 ‘음력설’의 전통을 고수해온 민중의 끈기” 덕분으로 해석했다. 일제와 독재정권은 양력설을 강제한 반면, 민주정권은 음력설을 부활시켰다는 뜻일까? 한국인들의 심리 구조는 몸은 양력의 이치를 따르면서도, 정신은 위정척사 사고에 젖어 음력을 고수하려는 이중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임을 우리는 냉정하게 자각해야 한다.

몸은 근대이되, 정신은 봉건상태로 방치된 결과 아직도  음력설을 고수해야 하고, 선거 때만 되면 지연·학연·혈연에 근거한 투표행위가 판을 친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아직도 씨족사회, 부족사회의 봉건 관습에서 헤어나지 못한 수준임을 입증하는 증거다. 대체 이 나라 국민들은 언제쯤 근대화된 개인,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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