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바로 선다면 10월 일 국군의 날, 대한민국도 러시아의 전승기념일처럼 대규모 군사퍼레이드와 함께 '볘스스메르뜨늬 뽈크', 즉 '불멸의 연대' 같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도 했으면 한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우리 주변의 4대 강국중 하나인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공산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 소수 야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대중이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체주의 국가는 더더욱 아니다. 모스크바의 새해 풍경을 보면 방역을 구실로 시민의 자유를 앗아가고 있는 여러 서구국가와는 달리 너무나도 자유롭다. 눈발이 휘날리는 붉은 광장 등 도심 곳곳은 코비드 이전과 전혀 다른 게 없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이도 거의 없고 거리두기, 요식업 통제는 아예 없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러시아의 일상은 서구와는 전혀 딴판이다. 일찍이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소련을 두고 지칭한 ‘악의 제국’(Evil Empire)의 이미지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방역 관련 행정을 보면 러시아가 자유민주주의, 서구가 전체주의다.

한국에서는 많은 대중들이 러시아와 소련을 구분하지 못한다. 러시아를 소련이라 부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같은 논리라면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도 소련이라 불러야 한다. 러시아가 소련이 아닌 것은 대한민국이 조선이 아닌 것과 같다. 현재 러시아의 사상적 정체성은 ‘러시아식 보수주의’(Russian Conservatism)다.

남동노르웨이대학 글렌 디센 교수의 저서 《러시아식 보수주의》의 표지.(출처=아마존)
남동노르웨이대학 글렌 디센 교수의 저서 《러시아식 보수주의》의 표지.(출처=아마존)

란 책은 러시아가 어떻게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러시아식 보수주의를 채택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보통 서구 세계는 공산주의의 반대 개념이 리벌럴리즘(Liberalism)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착각이다. 러시아는, 리버럴리즘이 아닌, 그들 전통의 보수주의를 받아들였다고 글렌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리버럴리즘은 문자 자체로는 자유주의지만 지금 서방의 리버럴리즘은 방종주의(放縱主義)라고 정의해도 될 만큼 퇴행적이다. 가족을 해체하고 성 구분을 없애는, 세기말적인 PC(Political Correctness)로까지 진화했다. 이에 반해 러시아식 보수주의는 과거 역사를 현대에 정통성과 안정을 제공하는 기제로 보고 중시한다. 그리고 전통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혁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현재의 러시아 크렘린이 구소련의 유산을 다루는 것을 보면 인간 본성과 사회에 대한 러시아식 보수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 보수주의자인 푸틴은 민족과 가족을 해체하고 정교회를 뿌리뽑으려 한 볼세비키 혁명을 부정한다. 반면 소비에트 시기도 역사의 엄연한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면 국민들을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는 또 다른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비에트 시절 나치 독일의 파시즘에 싸워 승리한 역사다

 러시아는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2700만의 희생으로 독일을 격퇴한 역사를,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이라고 해서,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한다. 러시아에서는 매년 전승기념일인 5월9일 대규모 군사퍼레이드가 열린다. 그리고 별도 행사로 대조국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가족들을 추모하는 ‘볘스스메르뜨늬 뽈크’(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 즉 ‘불멸의 연대’라는 행사도 거행된다. 2012년부터 시작된 행사로 러시아 시민들이 저마다 대조국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부친, 조부들의 영정을 들고 행진한다.

푸틴 대통령도 이날이면 독일 침략에 맞서 전선으로 달려가 레닌그라드에서 큰 부상을 입은 부친의 영정을 들고 시민들과 혼연일체가 돼 걷는다. 푸틴의 모친 마리아 이바노브나도 레닌그라드 봉쇄당시 죽을 고비를 넘겼고 큰 형은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푸틴은 자신이 조국을 지켜낸 참전용사의 자식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부친과 동년배인 참전 노병을 극진하게 대우한다. 한번은 전승기념일에 외국국가원수들과 함께 붉은 광장을 걷다가 참전 노병이 다가오자 바로 곁을 내주기도 했다.

‘볘스스메르뜨늬 뽈크’(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 ‘불멸의 연대’).(사진=로이터)
‘볘스스메르뜨늬 뽈크’(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 ‘불멸의 연대’).(사진=로이터)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시기를 비록 자기파괴적인 우울한 시기였지만 러시아 천년역사 큰 맥락의 일부로 기억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시기와는 사상적으로 단절한지 오래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들어선 소련체제와 그 멸망이 러시아 역사에 재앙을 가져왔다는 게 푸틴의 역사관이다.

푸틴이 채택한 러시아식 보수주의를 보면 한국이 벤치마킹할 부분이 많다. 한국은 국가를 이끌어갈 이념이 부재한 상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가 지워져 버리고 있다. 극도의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무엇이 보수의 가치인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한민국이 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림판박이인 586의 국가 허물기에 나라가 지옥으로 변한지 오래다. 조선의 멸망과 36년의 상실의 시대를 거쳐 탄생한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의 보수정체성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6·25 국난을 극복한 이후에도 북한의 도발은 계속돼 왔다. 2020년 3월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천안함 용사 고 민평기 상사의 모친 윤청자 여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천안한 폭침이 누구 소행인지 한 마디만 해달라고 호소하는 절절한 장면에 눈시울을 붉힌 이가 많다. 나라가 바로 선다면 10월 일 국군의 날, 대한민국도 러시아의 전승기념일처럼 대규모 군사퍼레이드와 함께 볘스스메르뜨늬 뽈크, 즉 ‘불멸의 연대’ 같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도 했으면 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연평해전, 천안함 용사들, 그리고 유가족과 함께 손잡고 행진하면서 애국심을 드높이고 대한민국의 한국식 보수주의(Korean Conservatism)을 세우면 어떨까 싶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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